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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 2025년 5월 18일

고린도후서 4:1-15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가 평안하셨나요?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며, 불완전한 평안이 아닌 완전한 평안을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소유와 편함을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멀어진 신앙은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과 같은 연결된 하나님, 경험된 하나님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지식적인 하나님으로 그치게 됩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내가 가진 소유를 어떻게 더 덜어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고, 편안함을 줄여 불편하게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비워진 자리, 불편함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웃에 관심을 가지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 살다 보면, 소유는 덜어질 수밖에 없고, 삶은 불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비워진 소유만큼, 불편해진 삶만큼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주간 어떤 고민을 해보셨습니까? 그 고민을 삶 속에서 실천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덜 소유하고, 더 불편한 삶을 결단하고 실천하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입니다. 첫 번째 편지인 고린도전서는 베드로파, 바울파 등 교회 공동체가 하나 되지 못하고 여러 분파로 나뉘어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고, 성도의 윤리와 도덕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보낸 서신입니다.

두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첫 편지를 보냈지만, 고린도교회로부터 여전히 좋지 못한 소식을 듣게 되어 다시 보내게 된 편지입니다. 이 두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의심과 가르침에 관한 강한 불만을 통해 교회 질서를 어지럽게 하고, 성도들을 괴롭게 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서신입니다.

바울의 사도권에 관한 의심은 사실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닙니다. 늘 의심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에게 직접 임명된 사도가 아니었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활동하거나, 예수님에게서 배운 적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6:12-13에, “그 무렵에 예수께서 기도하려고 산으로 떠나가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처럼 열두 사도와 바울은 구별됩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임명된 맛디아와 같은 공신력도 없습니다. 맛디아 이후, 공식적으로 사도라 불린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1:24-26 “기도하여 아뢰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주님께서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뽑아서, 이 섬기는 일과 사도직의 직분을 맡게 하실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유다는 이 직분을 버리고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맛디아가 뽑혀서,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의 수에 들게 되었다.”

그러니 바울이 스스로를 사도라 부르는 것에 관해 사람들은 당연히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바울이 처음 성경에 등장했을 때의 모습을 보면 절대 예수님의 사도가 될 수 없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열두 사도로부터 집사로 임명된 스데반이 공회에서 심문받고 성문 밖에서 돌에 맞아 죽임당할 때, 바울은 사도행전 8장 1절에서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8장 2-3절에서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생각하여 몹시 통곡하였다. 그런데 사울은 교회를 없애려고 날뛰었다. 그는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서,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서, 감옥에 넘겼다.”라고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9장 1-2절도 바울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믿었던 제자들과 사람들을 이렇게 심하게 박해한 바울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가 아무리 회개했다는 소식과 예수에 관한 말씀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고 하더라도 과거 그 누구보다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혔던 행보가 주홍글씨가 되어, 낙인이 되어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 예수와 예수의 말씀을 전하다가 자신이 어떤 고초를 겪게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졌기에 바울은 오늘 첫 번째 구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이라고 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계속해서 자신을 의심하는 이런 상황에서 낙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루에도 몇 번이고, 수십 번이고 속이 뒤틀리는 순간들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수고하였는데도, 끊임없이 의심을 샀고, 불확실한 사도권 때문에 복음마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자비량으로 사역하기까지 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8-9 “우리는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은 일이 없고, 도리어 여러분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으려고,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끊임없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당연히 헌신하는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응원하고, 칭찬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충분히 전달되지 못할 때도 있고, 인정받지 못한 채로 사역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순간들이 참 많습니다. 심지어 인정과 응원은 받지 못할망정 욕을 먹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사역하는 성도님들 때문에 교회 공동체는 유지되고, 운영될 수 있습니다.

오늘로 45주기를 맞는 518민주화운동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고, 누가 희생했습니까? 또 518민주화운동은 어떻게 ‘민주화운동’으로 불릴 수 있게 되었고, 나라에서 기념하는 날로 제정될 수 있었습니까?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죽음을 각오한 평범한 시민들에 의해 민주화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진실은 어떻게 알려졌습니까? 역시 자신의 이름이 누군가에게 알려지지 않지만, 죽음을 무릅쓴 평범한 시민들에 의해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518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제정될 수 있었던 것도 많은 위협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제정을 위해 운동한 평범한 시민들에 의해 가능했습니다.

김장하 선생의 장학생이었던 사람이 선생님을 찾아와, “제가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돼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자 김장하 선생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들은 명언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런 거를 바란 것은 아니었어.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

오늘날 기독교가 이 사회에서 신뢰를 회복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평범한 사람, 평범한 성도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눈에 띄지 않더라도, 특별한 직업을 갖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는 성도 말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도 다음 주면, 장로 선출을 위해 투표를 하게 됩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교회 안에서는 공동체를 위해, 교회 밖에서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위해 일하고 섬길 수 있는 장로가 선출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처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섬기는 장로가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고린도후서 4장의 본문 말씀은 사실 교회력으로 지난주에 해당하는 본문이었습니다. 그런데 2주 전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 본문은 따로 성도님들과 나누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이 한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묵상하면서 이제 읽어드릴 세 구절이 저를 가장 힘들게 한 말씀이자, 감동을 준 구절이었습니다. 10-12절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고 사는 삶 그렇기에 늘 자신의 몸 역시도 죽음에 내어 맡기는 삶을 살아왔다고 또 살아갈 것이라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또 이렇게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사는 이유는,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살고자 타인을 죽이는 삶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하며 살고 있습니까? 자신의 자리를 위해 계엄을 선포하는가 하면, 기득권과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의 삶과 생명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아니 우리에게도 여전히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또한 바울이 말하듯 다른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생명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두고 또 제자들을 향해 한 말씀,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요한복음 12:24-26)

죽음을 나에게서 작용할 수 있는 삶, 자신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이 바로 성도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입니다.

이런 바울의 고백과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518 광주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 생각합니다.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의 한 부분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 예수는 한번 죽고 / 한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 번을 죽고도 / 몇 백 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 더욱 젊어져 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하나님에 관해, 예수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이 기록한 평범한 시민이자, 민주 영령들의 삶에서 생명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의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다시 바울은 자신이 이 모든 일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전합니다. “15 이 모든 일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죽어간 광주 민주 영령들의 마음이자, 바울의 마음이고 오늘날 교회학교 선생님의 마음이며 우리들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앞으로 10년을 ‘작으나 건강한 교회, 평신도 중심의 사역, 선교 사역에 충실한 교회’를 이끌어 갈 장로가 될 수 있기를 또한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