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현 목사] 우리 안에 뚜안 – 2025년 11월 30일
이사야서 2장 1-5절, 마가복음서 13장 32-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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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오늘은 대림절 첫째주일입니다. 대림절이 기다림의 시간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다시 돌아온 대림절, 바로 성탄을 기다리는 교회력의 시간을 맞이한 우리가 만나는 오늘 성서의 말씀은 예언자 이사야의 희망적인 이상과 마가복음서의 묵시록 말씀인데요. 이 말씀이 대림절의 문을 여는 우리에게 복된 소식이 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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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안 이야기
뚜안의 사망
저는 지난 금요일 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기사의 제목은 “25살 뚜안을 누가 3층 낭떠러지로 몰았나”[1] 입니다. 이 기사는 베트남 출신 유학생이자 구직 비자를 가지고 한국에 체류중인 ‘뚜안’이라는 여성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뚜안은 올해 2월 우리나라의 계명대학교를 졸업 후, 같은 학교의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이후 뚜안은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서 구직활동에 나섰고, 사건 발생 2주 전 경북지역의 한 공장에 취업 했습니다.
뚜안이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리 정부는 APEC을 맞아 대구경북지역에서 고강도로 불법체류자 단속을 실시하게 됐습니다. 이때 뚜안은 그가 일하던 공장에 들이닥친 단속반을 피하다가 건물에서 추락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우리 사회가 저지른 공동체적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가 필요에 의해 유학생들을 불러들여 놓고는 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제반과 여건 마련에는 책임 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입니다.
뚜안의 사망에는 우리나라 대학들의 존폐문제와 일자리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우선 우리나라는 급격한 인구 감소율로 지난 10년 전부터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 대학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중 다수는 부실한 재정상태의 사립대학으로 재학생들의 등록금에 대학의 존폐가 달린 곳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도 국내의 여러 대학이 부족한 내국인 재학생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대학들에게 유학생들은 중요한 현금 수입원입니다. 그러나 정작 유학생들의 삶과 관련한 제도적인 준비는 미비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정부는 유학생 유치 장려 정책까지 발표 했지만 정부차원에서 마련된 유학생의 삶을 위한 정책은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그렇다 보니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은 자신의 나라에 비해 비싼 물가와 학비를 충당하는 일이 만만치 않은 상황입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의 방만한 대학 운영 정책과 유학생과 관련해서 부실하기 짝이 없는 국가 제도 상태는 우리 사회의 야만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유학생을 모집하지만 이들의 삶은 관심 없고, 그저 이들이 우리나라에 가지고 오는 돈에만 관심을 두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의 태도가 뚜안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뚜안의 두 번째 사망 원인은 우리나라 일자리 구조 문제입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재 우리나라 노동현장 급격한 변화를 피부로 느끼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경기도 외각 지역으로만 시선을 돌려도 우리나라의 노동현장의 현실이 확연히 체감됩니다.
경기도 외각을 비롯해서 수도권 밖 대부분의 농장과 공장, 어촌계, 공사 현장, 인테리어 업체, 유통 업체 등 각종 노동 현장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없이는 현장이 돌아가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들 중에는 우리나라의 빡빡한 기준을 통과한 정식 취업비자를 받은 사람 못지 않게 비자가 허락한 범위를 넘어서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불법체류자들도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밖 여러 사업장에서는 여전히 일손 부족 현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불법체류자 단속이 일어나면 관련 소식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sns를 타고 빠르게 퍼져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취를 감출 경우 많은 노동 현장에서는 일이 멈추는 경우가 파다합니다.
이번에 대구경북지역에서 실시된 법무부의 불법체류자 단속은 APEC을 치르면서 대구경북지역의 외국인 치안과 더불어 내국인 일자리 보호라는 명목에서 고강도로 진행됐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모습은 마치 80년대 서울에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준비하며 노숙인들을 상대로 인간 청소를 벌였던 모습과 닮았습니다.
게다가 이번 단속이 내세운 중요 이유 중 하나인 내국인 일자리 보호는 실소를 자아낼 수밖에 없는 명목이었습니다. 이미 여러 통계와 기사로 증명 됐듯이 대구경북지역은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정책을 가장 잘 지키지 않는 지역입니다. 대구경북지역의 최저임금법 위반 신고율이 4년 연속 전국 1위이고, 최저임금 위반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훨씬 높습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대구경북지역은 내국인은 물론, 정식 취업 비자를 받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외면하는 사업장들이 태반인 지역입니다. 이런 현실은 이 지역의 사업장들이 불법체류 노동자들로 꾸려지게 되는 큰 원인입니다.
그래서 얼토당토 않는 내국인 일자리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이뤄진 정부의 단속은 역설적으로 대구경북지역의 공장과 농장들을 멈춰 세웠습니다. 이는 국가가 한국의 현재 노동상황을 도외시한 채 진행한 엇박자 정책과 단속이었다는 반증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모습이 몇달 전 미국 조지아에서 일어난 사건인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감금 및 추방 사건과 큰 틀에서 닮았다고 보여집니다. 두 사건 모두 해당 국가의 필요에 의해 외국인 인력을 받아 들였지만, 미비한 정책과 대안 그리고 현실의 엇박자와 더불어 정치적 목적이라는 폭력이 수반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구약성서의 레위기 19장 33-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외국 사람이 나그네가 되어 너희의 땅에서 너희와 함께 살 때에, 너희는 그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 말씀을 읽고 뚜안을 비롯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로 시선을 돌리면 대림절을 맞아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양심은 요동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외국인들을 초청한 뒤에 그들의 삶을 학대하다가 결국엔 생명을 잃게 만들고 있는 현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반복되는 이 사실 앞에서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부끄러움과 무력함을 그리고 자괴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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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풀이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대림절을 맞이합니다. 올해 다시 찾아 온 대림절을 시작하면서 뚜안과 우리가 함께 선 이 땅의 현실에서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성서를 통해 함께 고민했으면 합니다.
우선 오늘 마가복음서의 말씀은 13장에 위치합니다. 마가복음서 13장은 마가복음서의 핵심적인 신학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에 관한 통렬한 비판입니다. 이는 마태복음서나 누가복음서와 확연히 다릅니다.[2]
이런 특징을 가지는 마가복음서는 예수님을 현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 시작의 기준점과 같은 존재로 부각시킵니다. 이를 통해 마가복음서는 기존 종교 헤게모니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은 사라져야 하고,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신앙이 세워져야 한다는 급진적인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이 위치한 마가복음서 13장은 소묵시록이라고 불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이 묵시라고 불리는 문학 양식이라는 말입니다.
묵시 양식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가려진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가려진 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묵시는 하나님의 가려진 계획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성서는 당연히 하나님의 계획 말하는 것 아닌가?’ 하는 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냅니다.
큰 틀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묵시는 하나님의 “가려진”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즉 명확한 계획이 아닌 가려진 계획이 차이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서의 말씀도 하나님의 계획인 ‘그 날과 그 시간’은 가려져 있습니다. 추가적으로 묵시 양식은 상징적인 언어들로 모호하게 묘사됩니다. 이런 경향은 마가복음서 13장에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묵시의 이야기들은 왜 이런 특징을 지닐까요? 그 이유는 묵시의 탄생 배경에서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성서의 묵시들은 유대 민족이 제국의 지배 아래 있을 때 탄생했습니다.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유대 민족처럼 제국의 지배 아래에 놓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을까요? 예를 들면 독립을 말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나 구원자를 기다린다는 말들을 하기 쉬웠을까요? 그러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묵시가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묵시는 기본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피해자들의 이야기, 약자들의 이야기 입니다. 그렇다 보니 지배자의 폭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 묵시는 구체적이어선 안되고, 숨겨야 하고, 상징적이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묵시란 처참한 현실에서 피어난 이야기입니다. 유대 민족은 제국의 지배 아래서 묵시를 통해 하나님의 숨겨진 계획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마가복음서 본문의 묵시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어떤 현실에서 말해지는 것일까요? 우선 오늘 본문은 다짜고짜 ‘그 날과 그 시간을(τῆς ἡμέρας ἐκείνης ἢ τῆς ὥρας[3])’ (막 13:32) 아무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조심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막 13:33) 왜 그럴까요? 도대체 ‘그 날과 그 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길래 조심하고 깨어 있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 앞선 말씀에서 나타나는 마가복음서 13장 14-23절의 ‘큰 재난’ 때문일까요?
본문의 내용을 보면 재난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 34-36절에서는 여행(ἀπόδημος)을 떠나는 사람(ἄνθρωπος)의 예가 나옵니다. 여기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집주인(ὁ κύριος τῆς οἰκίας)이라 불리는 사회적 계층에 해당합니다.
이 예는 예수님 시대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익숙한 예화입니다. 로마가 지배하던 지중해 사회에서 주인에 해당하는 계층은 정치적인 이유로 출장을 떠나거나 무역 또는 전쟁을 이유로 먼 여행을 떠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때 주인의 노예들과 문지기는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며, 주인이 ‘각자에게 맡긴 일과 명령’(τοῖς δούλοις αὐτοῦ τὴν ἐξουσίαν ἑκάστῳ τὸ ἔργον αὐτοῦ)을 수행 하면서 깨어서(γρηγορέω) 주인을 기다리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충실한(πίστις) 주종관계의 모습입니다.[4]
이 충실한 주종관계의 예화에는 ‘주인’이라는 기호가 담겨 있습니다. 마가복음서에서 ‘주인’이라는 기호는 하나님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막 10:18, 12:29-30 참조).
그리고 예수님 당시 유대 민족에게 사람의 아들은 메시야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는 존재를 가리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막 14:61-62).이런 정황을 종합하면 오늘 마가복음서 말씀의 ‘그 날과 그 시간’이라는 때는 13장 24-27절의 재난 이후 하나님이 보내는 존재인 사람의 아들(인자,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이 오는 때와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이 오는 때, 아무도 언제인지 몰라서 깨어 있으며 기다려야 하는 그 때는 무엇을 뜻할까요? 유대 신앙이 말하는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역사의 종말일까요? 저는 이 말씀을 마가복음서의 맥락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 마가복음서 1장 15절을 보면 예수님은 ‘때가 찼다’(πεπλήρωται ὁ καιρὸς)는 말로 하나님 나라 복음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때가 찼다’는 선언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시작 문구이자 마가복음서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때가 찼다’는 선언은 마가복음서의 다른 핵심 사상인 예루살렘 성전의 생명과 기능이 끝났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때가 찼다’는 선언은 그 말의 발화 시점에서 현재의 종말에 관한 선언이자 새시대의 시작이란 선언으로서, 이제 성전의 시대가 끝났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시작되었다는 새로운 시대의 개시 선언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따라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우선 저는 오늘 본문이 담겨 있는 마가복음서 13장이 성전의 신성함을 해체하는 이야기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묵시의 표현인 ‘그 날과 그 시간’으로 표현되는 가려진 때, 바로 하나님만이 아는 때는 사람의 아들이 오는 때와 연결된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가 선입견으로 가지고 있는 역사적 종말이 아닌 현재적인 종말을 선언하는 예수님의 선언,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로서 내뱉은 첫 일성이자 하나님 나라 복음의 시작 문구인 ‘때가 찼다’는 현재적 종말의 선언 위에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말씀의 ‘그 날과 그 시간’은 바로 하나님이 보내는 존재인 메시아, 곧 사람의 아들이 오는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는 성전 멸망의 때, 성전의 기능과 생명이 죽어버린 때입니다. 하나님이 보내는 존재인 사람의 아들은 바로 그 때에 와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서를 읽는 우리는 그 때가 이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서가 말하는 하나님이 보내는 존재인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막 14:62). 따라서 예수님은 이미 오신 상태였고, 그 예수님은 성전이 죽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막 11:12-14).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늘 말씀의 ‘그 날과 그 시간’이 사람의 아들이 오는 때라는 해석에 꽤 확신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시작 부분은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앞서 살펴본 바에 따라서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마가복음서의 상황과 딱 들어 맞습니다. 마가복음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왔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으로 서술하기 때문입니다.[5]
이에 관한 가장 확실한 예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에 의해서 사랑하는 나의 아들로 선언 됩니다(막 1:9-10). 그런데 이때 하늘로부터 난 선언은 오로지 예수님만이 들은 것으로 묘사됩니다.[6]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기 위해서 요단강에 세례 받으러 왔을 때 쓰인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우리가 보는 성서에는 ‘그 무렵에(ἐν ἐκείναις ταῖς ἡμέραις ἦλθεν Ἰησοῦς)’라고 쓰인 표현의 헬라어 본문을 살펴보면, 오늘 본문의 표현인 ‘그 날과 그 시간’에서 쓰인 ‘그 날’(τῆς ἡμέρας ἐκείνης)과 같은 표현으로 쓰여 있습니다.
이를 반영하여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다시 표현하면 ‘그 날들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셨다.’가 됩니다. 이와 같은 표현의 동질성은 아무도 모르는 때에 온 사람의 아들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에 확신을 더해 줍니다.
따라서 오늘 마가복음서의 말씀이 말하고 있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 ‘그 날과 그시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등장한 순간부터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시작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사람들이 이미 온 사람의 아들의 때,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때를 깨닫지 못하고 잠자는 것과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는 폭로의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이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읽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미 ‘그 날과 그 시간’이 시작되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때를 깨달으라! 이제는 깨어날 때이다! 그리고 깨어난 사람들은 다시 잠들지 말고 계속 깨어 있으라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마주하는 우리는 어떤 상태일까요? 우리는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으며, 깨어 있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지금 우리의 때는 우리 사회가 외국인 유학생 뚜안을 이 땅에 부른 뒤에 그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방관하며 그의 삶을 축나게 하다가 결국엔 죽음으로 몰고가는 때입니다.
이런 우리의 때는 예수님이 성전을 저주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은 과부와 고아의 재산과 유산까지 흡수하며 화려해지고,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익집단의 삶은 풍요로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살리지 못하는 죽은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부실 대학들은 외국인 유학생들의 학비로 운영되지만, 외국인 유학생들의 삶과 그들의 안전에는 무관심하고 무책임합니다. 또한 우리 사회의 노동 현장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만 역시 그들 주거와 안전을 등한시 합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우리의 필요와 이익을 채우기 위해 이 땅에 외국인들을 불러왔지만, 레위기의 말씀처럼 그들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거나 본토인처럼 대하기는 커녕 그들을 억압하고, 협박하고, 혐오하고, 학대하고, 그들의 약점을 잡아 이용하는 일들이 비일비재 합니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와 접점이 없는 사람들은 외국인 노동자의 삶에 무관심 합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머무는 다른 ‘뚜안’들은 지금도 억압과 협박과 혐오와 학대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의 전에 모여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길을 따라 행하라(사 2:3)고, 하나님의 빛 안에서 살아가라(사 2:5)고 말합니다.
나가며
여러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때, 바로 지금 우리 사회를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낮은 곳으로 온 하나님의 아들, 인간의 고통과 가난과 수모와 죽음을 겪으러 온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기억하고 기다리는 대림절의 시작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찾고 있는 중일까요?
사실 제 일상에는 뚜안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많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나누는 저 조차 우리 안에 온 다른 뚜안들, 우리 안에서 살아가는 다른 뚜안들의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지 못했고, 그래서 저는 이런 저를 반성하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지금이 무슨 때인지 분별하라는 말씀 앞에서 뚜안의 죽음이 말하는 지금의 때가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희망과 기대 속에 이 땅에 왔으나 이 땅의 차가운 폭력에 의해 죽어간 뚜안의 죽음 앞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에 오셨던 아기 예수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께서 이 땅 위에서 살아낸 삶을 생각합니다. 그러자 저는 제 언어로 오늘의 말씀을 마칠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 청소년부 책 나눔 시간에 이야기 나눌 책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글로 마칩니다.
“펄롱은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7]
[1] 이문영, “25살 뚜안을 누가 3층 낭떠러지로 몰았나…다시 맞춘 그날의 3시간”, 한겨례(2025. 11. 28).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31737.html
[2]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서는 성전 멸망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이 나오기는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가지는 신성함은 인정한다. 하지만 마가복음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신성함을 해체한다.
[3] 헬라어 ἡ ὥρα (헤 호라)는 물리적 시간의 의미가 강하다. 마가복음서에서 역사적인 시간으로서 ‘때’에 해당하는 표현은 ὁ καιρὸς (호 카이로스)라는 용어로 사용된다. 이 둘은 의미상 차이가 있으며 마가복음서 헬라어 본문에서는 두 단어의 의미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개역개정과 새번역 성서는 둘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4] 이 일화의 원조는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이다.
[5]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오직 악한 영들만 알아차린다. 사람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는 장면은 1회만 등장하며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로마의 백부장에 의해서 고백된다. 결과적으로 마가복음서는 사람들이 예수가 죽기까지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지 못했다.
[6] 세례 장면에서 예수에게 성령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을 때 쓰인 표현인 εἶδεν(에이덴)은 3인칭 단수 부정사이다. 세례를 베푼 요한이나 요단강에 있는 사람들 아무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설정으로 묘사되고 있다.
[7] 클레어 키건/ 홍한별 옮김. “이처럼 사소한 것들”. (서울: 다산책방, 2021),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