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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 2026년 02월 01일

창세기 15장 1-6절, 18장 10-15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평안이 있음을 깨닫고, 그 평안을 기꺼이 누리고자 하는 마음의 용의(用意)를 내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평화를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지난 주중에 서울북노회 신년 목회자 세미나 참석차 강원도 고성에 다녀왔습니다. 작년에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했던 ‘평화 통일 순례’의 여정을, 이번에는 노회 목사님들을 모시고 인도하고 왔습니다.

이러한 평화 순례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 안에서 먼저 이루어야 할 평화’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외부적으로 많은 실천을 하지만, 그 모든 실천보다 선행되어야 할 본질적인 과제는 내 내면의 평화입니다.

가정의 평화, 이웃과의 평화, 남북의 평화,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내 안에 평화가 자리 잡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 내면에 스스로 쌓아 올린 평화에 대한 선입견이나, 부정적인 마음의 장벽이 여전히 굳건하다면, 우리는 결코 밖으로 평화를 흘려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완벽한 평화를 유지하며 살 수 있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의도’와 ‘방향성’이 필요합니다. 즉, 평화를 향한 올바른 지향이 우리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완전해서도 아닙니다.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향하려고 하는 방향성, 내 안에 평화를 이루고자 애쓰는 그 중심이 오늘 우리의 신앙에 매우 중요합니다.

이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더 깊이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15장 1절에서 3절을 보십시오. “1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2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3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의 방패요, 네 상급이다.”라고 엄청난 약속을 주시지만, 아브람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대를 이을 자식이 없다는 현실적인 불안과 아쉬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당장의 결핍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걱정을 이미 알고 계셨고, 그 걱정이 현실이 되지 않게 하실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이끌고 나가셨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이 대화 끝에 성경은 매우 인상적인 장면을 기록합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창 15:6)

아브람은 현실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라고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아브람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이 대목은, 창세기의 전체 맥락을 볼 때 참으로 의아하고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브라함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를 ‘의인’이라 부르기에는 민망한 순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온 아브람과 하나님의 이야기를 보면,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라고 하셨을 때 아브람은 일흔 다섯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4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근이 들자, 아브람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아브람은 주저 없이 약속의 땅을 버리고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믿음 있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거기서 어떤 일을 벌입니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아내 사래를 누이라 속였습니다.

아브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서,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 것이오.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그렇게 하여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

상상할 수도 없는 비겁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아내를 바로의 궁으로 보내고 자신의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대를 이을 자녀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12:2),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12:7),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13:16),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15:4),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15:5)

오늘 본문에서는 그가 ‘믿었다’라고 인정받았지만 그 이후, 아브라함은 끊임없이 흔들렸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브라함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며,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7:15-16).

이때 아브라함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뢰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창 17:17-18)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냉소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그전에는 자식이 생기지 않자,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여종 하갈을 통해 대를 잇으려 했습니다.

아브람의 아내인 사래 역시 남편의 고통을 이해하고 당시의 관습에 따라 희생적인 제안을 했지만, 그 결과 창세기 16장은 가정불화라는 막장 드라마 같은 상황으로 치닫고 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 없는 모습, 인간적인 꼼수를 부리는 아브람을 창세기 15장에서 미리 ‘의로 여기셨다.’라고 하셨습니까?

그것은 믿음이란 단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라가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비록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그의 삶의 ‘방향성’이 결국에는 다시 하나님을 향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의로 ‘여겨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조급해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해 내 방식, 내 계산대로 일을 처리하려다 실패를 맛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완벽함’을 보고 의롭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방향성, 바라봄 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끝까지 자기 자신을 믿습니다. 자기가 옳다로 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비록 부족하고 깨어지더라도, 끊임없이 다시 주님을 바라보려고 고개를 드는 그 ‘방향성’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끈질기게 우리를 믿음의 여정으로 초대하십니다.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18장 본문에서도 그 초대는 계속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묻습니다.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선포하십니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장막 뒤에서 이 말을 들은 사라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며 속으로 웃었습니다.

지극히 당연하고 인간적인 반응입니다. 성경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고, 사라는 월경마저 그쳐서,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난 사람”이라고 그 불가능한 현실을 확증합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하나님은 비웃는 사라에게, 믿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대신 다시 믿음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강력하게 초청하십니다.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음성입니다. 우리 역시 너무나 인간적인 방식으로,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경험으로, 내게 이득이 되는 계산으로 상황을 판단하며 절망하거나 혹은 스스로 해결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이자 무교회주의를 제창했던 우찌무라 간조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경뿐이며, 교회 제도와 전통은 껍데기일 수 있다”고 주장하며 본질을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미국 유학 시절 일기에 쓴 기도에 대한 통찰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특별한 중재로 자신의 욕망을 채워 주기를 바라는 단순한 요청이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영원하신 성령과의 교제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가지고 계신 그 뜻을 우리로 기도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 드리는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며, 아니 들으실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기도는 예언이다.”

참으로 깊은 통찰입니다. 기도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관철시키거나,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기도는 이미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그 뜻을 우리가 발견하고, 그것을 나의 입술로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의 용의를 내어야 합니다. 내 뜻대로 하려는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시기 때문입니다.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지난 주중에 채경숙 장로님으로부터 교회 옆 마사지 샵 공간에 대한 연락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을 할 경우 월세를 기존 120만 원에서 150만 원으로 올릴 것이며, 당장 팔 생각은 없지만 매매할 경우 4억 원에 팔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로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우리에게 저 옆공간이 너무나 중요하고, 그래서 성도님들은 저 특정한 공간을 놓고 기도하기도 하셨는데,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질문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기도의 방향성이 잘 못 되었구나. 특정하게 지정을 하고 달라고 한 기도가 참으로 인간적일 수밖에 없었구나.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주시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구나. 우리의 계획 속에 하나님을 가두려 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채장로님께 드렸던 이야기조차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조차 제가 판단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는 긴 시간 동안 그들은 수도 없이 넘어졌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끝내 의롭다 여겨주신 까닭은, 넘어지는 와중에도 툭툭 털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며 일어섰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여정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다시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믿음의 모험으로, 믿음의 여정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나를 믿으라”고, “전능한 나를 신뢰하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무엇이 이익인지, 무엇이 손해인지 따지는 좁은 시야를 버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이 질문 앞에, 우리의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