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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너희 스스로 만족하려고 먹고 마신 것이 아니냐? – 2026년 02월 22일

스가랴서 7장 1-10절, 시편 27편 1-4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짧은 한 주일이지만,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일을 겪습니다. 때로는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좋은 일을, 때로는 누구도 겪지 말아야 할 나쁜 일들을 겪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스스로가 조절할 수 없습니다.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은 내가 겪어야지, 이 일은 내가 겪기 싫으니까 겪지 않을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그저 좋든 싫든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어난 일들을 ‘어떻게 겪을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또는 타인이 어떻게 겪어야 할지 선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 앞에 견고하게 설 수 있는 또는 위로자, 함께하는 자가 될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 재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생각하고, 그 죽음의 의미를 우리 몸에 새기는 애도와 추모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가 이 사순절에 ‘특별’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무언가를 하곤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프로그램도 하지, 우리 교회는 이런 프로그램까지도 한다.’와 같은 ‘우리가 더 특별한 사순절을 보내고 있어 경쟁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도시 교회로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도시 교회를 떠나게 된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특별 프로그램을 마친 뒤에 남는 허무와 프로그램 자체를 잘 마쳤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습니다.

그 프로그램들이 나와 성도의 삶으로 어떻게 연결되고 실천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더 특별하고, 더 색다르고, 더 많이 참여시키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 만족감 또는 불만족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 오후 ‘명랑 대화’를 통해 사순절에 나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기록하고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사순절이라는 기간을 특별하게 보내고자 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사실은 굉장히 특별한 시간임을, 평범한 일상이 거룩한 시간임을 알아가고자 함입니다.

이 사순절에 저와 성도님들에게 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마음과, 죽음의 의미를 몸에 깊이 새길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스가랴 7장은 매우 구체적인 연대를 명시하며 시작합니다. “다리우스 왕 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나흗날에 주님께서 스가랴에게 말씀하셨다.”

이 ‘다리우스 왕 4년’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희망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지 수십 년이 흘렀고, 멈췄던 성전 재건이 페르시아 왕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막바지에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완공을 불과 2년 정도 앞둔 시점, 나라가 안정되고 살만해지자, 백성들이 예언자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지난 여러 해 동안에 해 온 그대로, 다섯째 달에 애곡하면서 금식해야 합니까?”

성도님들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 속에는 지금껏 그들이 한 금식에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들에게 금식은 ‘성전 재건’이라는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드렸던 일종의 ‘종교적 대가’였습니다.

이제 성전이 눈앞에 완공되어 가고 삶이 안정되니, 이들에게 금식은 더 이상 슬퍼할 이유도, 지속할 필요도 없는 ‘귀찮고 고생스러운 의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전이라는 외형적인 완공에 도취 되어서, 정작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금식의 이유가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된 삶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된 삶으로 흘러갔습니다.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해 이들의 위선을 날카롭게 폭로하십니다. “너희가 지난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며 애곡하기는 하였으나, 너희가 진정, 나를 생각하여서 금식한 적이 있느냐?” 너 자신을 생각하면서가 아니라 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금식한 적이 있느냐? 너의 뜻이 아니라 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금식한 적이 있느냐? 라고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뒤이어 6절에서 오늘 설교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도 너희 스스로 만족하려고 먹고 마신 것이 아니냐?” “너희가 진정 나를 생각하여서 금식한 적이 있느냐?”라고 물으신 뒤에 “그래서 내가 바라는 금식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금식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먹고 마시는’ 일상의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식(비움)’이나 ‘식사(채움)’는 본질적으로 똑같았습니다. 둘 다 그 중심에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신앙의 문제도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금식이냐 식사냐가 아닙니다. 문제는 중심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면, 금식도 자기만족이 되고, 식사도 자기만족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중심이 되면, 식사도 예배가 되고, 금식도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금식할 때는 “내가 이만큼 고생하니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시겠지.”라는 자기만족을 위해 굶었습니다. 식사할 때는 “내 배가 부르고 즐거우니 좋다.”라는 자기만족을 위해 먹었습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도 너희 스스로 만족하려고 먹고 마신 것이 아니냐?” 왜 이 말씀을 하십니까? 종교적 행위와 일상의 삶이 분리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금식할 때만 나를 찾는 척하지 마라. 특별하게 하는 무언가를 통해서만 나를 찾는 척하지 마라. 너희가 매일 먹고 마시는 일상의 식탁에서도 나를 기억한 적이 있느냐?”라고 다리우스왕 4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근래에 동기 목사들이 몇 번 보였습니다. 동기 목사의 담임목사 취임과 동기 목사의 결혼식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동기들이 모여 부부 동반으로 이야기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가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까지 했다.’ 아무말 대잔치입니다.

남편들끼리 흥분해서 이야기 베틀을 하고 있을 때 배우자들을 보면, ‘한심한 놈들, 평소에나 잘해라.’라는 눈빛을 읽을 수가 있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제가 아내에게 묻습니다. “와~ 애들 이야기하는 거 들었어?, 내가 제일 잘하지 않아?” 그러면 아내는 대답하지 않고 먼 산을 바라봅니다.

‘평소에 잘해라.’ 이 말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관계에서도 실천되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늘 말씀드리고 싶어 합니다. 오늘 본문 6절,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도 너희 스스로 만족하려고 먹고 마신 것이 아니냐?”는 ‘일상의 특별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세 끼 식탁의 주권, 평범한 일상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일상이 특별한 이유는 그 평범한 반복 속에 우리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경건이 결국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자기 숭배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특별한 행사나 금식 기간에만 반짝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먹고 마시는 일상의 순간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삶의 중심으로 모시는 삶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시편 27편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에서 이러한 하나님께 자신의 초점을 맞추고, 조율되고자 하는 갈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 시를 노래할 때의 상황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군대가 그를 에워싸고 전쟁이 일어나는 위기 속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 저 원수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내 생명을 보존해 주십시오.”라고 자신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한 기도를 먼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기도는 전혀 다릅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다윗이 구한 ‘단 한 가지’는 상황의 반전이 아니라 ‘시선의 조율’이었습니다. 나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사고였습니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기도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조율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비워 그 자리에 주님의 뜻을 채웠습니다. 우리 역시도 이러한 다윗과 같은 마음으로 사순절을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를 비우고 주님께 조율될 때, 비로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언급하신 금식, 그리고 이사야가 말했던 ‘진정한 금식’이 가능해집니다. 진짜 금식은 굶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방향으로 일상이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스가랴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주님께서 스가랴에게 말씀하셨다. “나 만군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공정한 재판을 하여라. 서로 관용과 자비를 베풀어라.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지 말고, 동족끼리 해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이 스가랴의 선포는 이사야의 선포를 떠올리게 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6-7)

금식은 단순히 먹지 않는 행위가 아닙니다. 내 삶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평화, 자유, 정의에 조율 되어가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단식을 퍼포먼스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금식은 나의 의지를 무력화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내 삶을 통해 흘러가게 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비우고 또 비워, 내가 먹지 않음으로 남겨진 것이 누군가의 배고픔을 채우고, 내가 말을 아낌으로 생긴 침묵이 누군가의 신음을 듣는 ‘틈’이 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는 진짜 금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순절의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합니다. 다음 주 ‘명랑 대화’를 통해 우리가 결단할 여러 종류의 금식이 “내가 무엇을 참아냈다.”라는 자기만족의 기록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특별한 계기’나 ‘특별한 체험’을 찾습니다. 금식도 그중 하나입니다. 평소와는 다른 고통을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하나님께 점수를 따려 하거나, 무언가 대단한 영적 성취를 이루었다는 뿌듯함을 느끼려 합니다.

하지만 오늘 스가랴 7장 6절은 우리의 그런 종교적 허영심을 산산조각 냅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도 너희 스스로 만족하려고 먹고 마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우리가 일 년에 몇 번 하는 ‘특별한 금식’보다, 우리가 매일 세 번 마주하는 ‘평범한 식탁’의 마음가짐을 먼저 물으십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도 너희 스스로 만족하려고 먹고 마신 것이 아니냐?”라는 주님의 질문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금식할 때뿐만 아니라, 다시 음식을 먹고 마시는 일상의 모든 순간에도 주님이 주인이 되시게 해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 평범한 일상을 의식하며 삶으로서 주님의 뜻을 채우고, 깨달은 주님의 뜻으로 생명을 살리는 ‘틈’들이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먹고 마시던 우리가, 이제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비우고 채우는 존재로 거듭나기를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