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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나는 아니오! – 2026년 03월 01일

사무엘기하서 12장 1-13절, 요한복음서 18장 15-27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늘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내 삶을 이끌어 가시는 이가 누구이신지를 잊지 않음으로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참 평안을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사순절을 시작하며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면 아무리 금식을 하더라도 그 금식은 자기만족 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으며, 식사를 하더라도 하나님이 중심이 될 때 그 식사의 자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도 너희 스스로 만족하려고 먹고 마신 것이 아니냐?”라는 이 질문은 굉장히 충격적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의 만족과 배부름을 위해 먹었기 때문입니다. 별 다른 생각 없이, 어떤 의식 없이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날에만 나를 찾지 말고, 매일의 식탁에서 나를 기억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요청에 따른다면 신앙은 특별한 체험이나 행사, 프로그램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순간 속에서 우리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순절은 평범한 식탁에서, 반복되는 평범한 하루 속에서 “주님이 주인이십니다.”라고 의식하고 고백하는 삶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먹고 마시던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비우고 채우는 존재가 되는, 일상의 모든 순간에 주님을 의식하고, 주님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내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과 사무엘하의 두 본문에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이야기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이 예언자 나단으로부터 책망받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우리가 모르는 어디로 가세요?”(요13:36)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올 수 없다는 말씀에 베드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요13:37)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13:38)

예수님의 이 말씀을 베드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예언의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의 삶에 실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로마 군대 병정들과 그 부대장과 유대 사람들의 성전 경비병들에게 잡혀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끌려갔을 때, 베드로는 잡혀간 예수님을 보기 위해 대제사장의 집 안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문지기 하녀가 베드로에게 질문합니다.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베드로가 자신만만하며 예수님에게 했던 고백,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를 증명할 기회가 왔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말했던 예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라고 문지기 하녀가 질문했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아니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 이 안타까운 사람. 그런데 다시 기회가 베드로에게 주어집니다. 날이 추워서 불을 쬐고 있는데, 같이 불을 쬐고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당신도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지요?” 베드로는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합니다.

이번엔 예수님이 잡혀갈 당시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으로서, 대제사장의 종 가운데 한 사람이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동산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는데 그러시오?” 베드로는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이 우는 소리를 베드로는 듣게 됩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한마디 해주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 번이나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한 베드로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제자임을 시인하면 자신의 목숨도 위험해질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는데, 우리라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더 이로운 선택이라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머리를 썼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는 당장의 두려움과 위기에서 벗어나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자신의 생명, 안전이 너무나 중요한 시점이었기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선택한 대답은 “아니오!, 나는 아니오!” 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나의 스승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다.’라는 인지를 전혀 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지금 베드로에게 ‘아니오’라는 고백은 이 위기에서 벗어날 대답으로만 여겨질 뿐이었습니다. 이 ‘아니오’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하는 대답임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닭이 울었을 때, 베드로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아니오!”라고 말한 그 대답이, 자신의 생명을 지켰을지는 몰라도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신만만하게 예수님에게 말했던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고, 자신은 얼마든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고 말했던 그 고백이 떠올랐습니다.

누가복음 22:61-62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똑바로 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기에게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그는 바깥으로 나가서 비통하게 울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부인하면서도 자신이 스승을 배신하고 있다는 ‘실존적 감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닭이 우는 순간,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르며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 역시 그렇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빼앗기 위해 우리야를 전쟁의 최전선으로 보내 죽게 했습니다. 위대한 왕인 다윗이 성욕에 빠져 남편이 있는 여성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인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칼로 죽이지는 않았지만, 다윗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이 벌인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게 더 큰 문제이기는 합니다. 자신의 성욕과 정당함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이용해서 벌인 일이었으나 그 일이 얼마나 참혹하고 부끄러운 죄인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예언자 나단이 말하는 동안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유로 표현한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공분하며 정의를 외쳤지만, 정작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임을 몰랐습니다.

“다윗은 그 부자가 못마땅하여, 몹시 분개하면서, 나단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서 맹세하지만,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또 그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 그는 마땅히 그 어린 암양을 네 배로 갚아 주어야 합니다.””(사무엘하 12:5-6)

예언자 나단이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라고 지목했을 때, 다윗도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이 나단에게 자백하였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사무엘하 12:13a)

성도님들 ‘이불 킥’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이불을 덮고 잠들기 전 과거의 실수·부끄러운 순간을 되새기며 몸부림을 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여러 가지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그 순간, 우리가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시간에 기회가 찾아옵니다. 잠들기 전, 고요한 그 시간, 더 깊이 스스로 돌아보며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다 미쳐 놓쳐버린, 실수한 말과 행동을 더 넓은 시야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 시간이 어쩌면 우리에게 ‘빛의 조명’의 순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이 땅 가운데 오셨다는 요한복음의 고백은 그래서 이 빛이 단순히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어두움을 발견하고 보게 만드는 은혜의 조명입니다.

이 빛의 조명을 통해 내가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 내가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거룩해질 수 있는 ‘틈’은 바로 이 깨달음의 지점, 나의 상태를 직시하게 되는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내가 내 행동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는 순간, 내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는 순간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조율됩니다.

오늘 두 본문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 채 흔들리는 베드로·다윗과 달리, 정확하게 자신이 말하는 것과 행동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이 ‘선명한 자기 인식’이 바로 우리가 사순절에 추구해야 할 목표이기도 합니다.

대제사장 앞에 서신 예수님은 당당하십니다. “나는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소. 나는 언제나 모든 유대 사람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으며, 아무것도 숨어서 말한 것이 없소.”(요18:20) 이 말씀은 단순히 가르침의 장소를 뜻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내면과 외면, 의도와 행동 사이에 단 1%의 어둠이나 감춤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경비병에게 맞으면서도 “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으면, 잘못되었다는 증거를 대시오. 그러나 내가 한 말이 옳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시오?(요18:23)”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역시 예수님이 자신의 말과 행동의 정당성을 하나님 앞에서 확신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대단한 순교나 이벤트, 프로그램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내뱉는 말의 온도가 어떠한지 의식하는 것. 내 이익을 위해 타협하고 있는 내 마음을 솔직하게 대면하는 것. “아,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행하고 있구나.”라는 자각自覺 자체가 일상을 거룩하게 물들이는 틈이 되고 거룩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거룩해진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내 말과 행동에 ‘숨겨진 의도’나 ‘비겁한 자기 합리화’가 없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거룩은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죄 가운데 있는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과정입니다. “나는 아니오!”가 아니라 “네, 바로 접니다!”라고 스스로가 어떤 상태인지를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모릅니다.”라고 말할 때 그는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닭이 울고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빛으로 나올 수 있었고, 후에 순교로 이어지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 말을 왜 하는가? 내 안전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기 때문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것.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평범한 일상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거룩한 성소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아무것도 숨어서 말한 것이 없소.”라고 고백할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의 중심과 겉모양을 일치시켜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베드로처럼 실수할 수 있고, 다윗처럼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시기보다 ‘정직한 자각’을 원하십니다. 닭 울음소리가 들릴 때, 나단 선지자가 나를 지목할 때, 숨지 않고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시인하며 빛 가운데로 걸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으로 변하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