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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오늘, 다시 선택하라 – 2026년 03월 22일

에스겔서 18장1-4절, 21-32절, 누가복음서 23장 39-43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성도님들의 삶이 한 주간 정말 평안하셨기를 바랍니다. 평안하지 못할 때, 성도는 방향성을 잃습니다. 하나님께 삶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불안과 두려움이 선장이 되어 어긋난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삶을 이끌어갈 때면 나의 계획과 욕망에 더 충실하게 되고, 나의 기준과 경험이 우선시 되곤 합니다. 하나님이 이끌어가시기를 기다리거나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인내는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평안은 소유와 상황의 안정 여부에 따라 누릴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평안은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나의 삶을 이끌어가고 계시는 이가 누구신지를 다시 기억하기만 하면 누릴 수 있는 마음입니다.

불안과 두려운 마음 역시도 외부에서 오지 않습니다. 이런 감정을 누가 집어 넣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마음입니다. ‘나는 불안하기로 선택했어, 나는 두렵기로 선택했어!’ 그래서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러니 다시 선택하면 됩니다. 다시 평안을 선택하고 누리며, 그 평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살아내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참된 평안은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게 합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이들을 발견하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지난 목요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폭격,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 등의 중동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는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는 에큐메니칼 평화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에큐메니칼 평화 기도회에서 팔레스타인 평화운동가는 이런 인사말로 증언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안녕하냐는 인사가 싫습니다. 저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안녕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안녕해서는 안 됩니다.’

이 짧은 인사말로 광화문에서 평화 기도회에 몸은 참석하고 있었지만, 마치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먼 곳에서 나와 상관없는 이들이 경험하는 일이라 여기며 한가했던 마음이 마치 팔레스타인 고통의 땅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마음으로 전환될 수 있었습니다.

충격적인 인사말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안녕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에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고, 중동의 많은 민중 역시 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될지 모를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간 바로 근처에서는 BTS가 4년 만에 돌아오는 콘서트 준비로 세종문화회관 계단 전체가 BTS의 홍보 글로 덮여 있고, 이 계단과 계단 주변에서 많은 외국인이 즐겁게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팔레스타인과 중동에 있는 민중의 고통을 짊어지고 울부짖는 ‘비탄의 소리’가 들리는데, 바로 옆에서는 세상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설렘과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질적인 풍경이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입니다. 두 가지 모습 다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는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우리가 어느 면만을 바라보고자 하고, 선택하며 살고 있는지를 비추어 보여줍니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무감각해지고, 얼마나 쉽게 책임을 회피하며, 얼마나 쉽게 현실 앞에서 숨어버리는지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왜 우리가 지금, 오늘, 다시 선택해야 하는지, 또 왜 다시 선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에스겔 18장은 당시 이스라엘 땅에 널리 퍼져 있던 속담 하나를 고발하며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다.”(2절) 아버지가 이가 신 포도를 먹었습니다. 그럼 아버지만 이가 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신 포도를 먹지 않은 아들까지도 이가 시리게 된다고 표현하는 속담입니다.

이 속담은 당시 바벨론 포로기에 처해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우리가 지금 왜 이 고생을 하는가? 우리 조상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이가 신 포도를 먹었으니, 오늘 우리는 신 포도를 먹지 않았음에도, 이가 시리게 되었다. 조상들이 저지른 죄의 값을 아무 잘못 없는 우리가 대신 치르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회피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맥락 없이 이들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말을 하는 데는 그들 나름의 전통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9:1-2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1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2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이게 바로 이들의 일반적인 시선이자 사고였습니다.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하실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출애굽기 20:5)

시편 51편에서 저자는 이렇게도 고백했습니다. “이 몸은 죄 중에 태어났고,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읍니다.”(5절) 태어나기 이전부터 죄인이었다고 시편의 시인은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다’라는 속담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틀린 표현은 아닙니다. 심각한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속담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감추려 했음에 있습니다.

이 속담의 뒤에서 자신들이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이 속담을 방패로 삼아 현재의 고난을 조상들의 탓으로 돌려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낯설지는 않습니다. 우리 역시도 우리의 삶을 부모의 탓이나 조상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고, 환경 때문에 이렇게 되었고 등등. 누구의 탓으로 돌릴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물론 과거의 환경이 오늘 우리의 삶과 전혀 관계가 없지는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더욱이나 부모의 재정이나 삶의 상황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은 더 지대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나의 상황을 과거의 원망에만 가둘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원망에만 갇히면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바꾸기 위해 과거의 삶을 넘어서서 우리만의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 너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다시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속담을 입에 담지 못할 것이다. 모든 영혼은 나의 것이다. 아버지의 영혼이나 아들의 영혼이 똑같이 나의 것이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을 것이다.”(3-4절)

이 말씀은 무서운 선언이기 이전에, 놀라운 해방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네 영혼은 과거의 것이 아니다. 네 영혼은 조상의 죄의 것이 아니다. 네 영혼은 환경의 것이 아니다. 네 영혼은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선언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어제의 실패가 오늘의 나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조상의 죄나 환경의 상처가 나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과거를 붙들고 있지 말고, 오늘 너의 삶의 자리를 보아라. 그리고 오늘 다시 선택하여라.”

이것이 에스겔 18장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지 “너희 잘못했다.”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너희는 오늘 돌이킬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의 본문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가 명확하게 담겨 있습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에서 떠나 돌이켜서, 나의 율례를 다 지키고 법과 의를 실천하면, 그는 반드시 살고, 죽지 않을 것이다.”(21절)

“의인이 자신의 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죄를 범하고, 악인이 저지르는 모든 역겨운 일을 똑같이 하면, 그가 살 수가 있겠느냐? 그가 지킨 모든 의는 전혀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불성실과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24절)

우리에게도 공평해 보이지 않는 이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더 놀라운 말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데 너희는, 내가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을 하는구나.”(25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논의에 대해 하나님은 쐐기를 박으십니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서 너희를 심판하겠다. 너희는 회개하고, 너희의 모든 범죄에서 떠나 돌이켜라. 그렇게 하면, 죄가 장애물이 되어 너희를 넘어뜨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지은 죄를 모두 너희 자신에게서 떨쳐내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왜 죽고자 하느냐?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는 것을 나는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30-32절)

하나님은 죽음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죄를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무너지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다시 방향을 정하는 선택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오늘 무엇을 다시 선택해야 합니까? 과거의 원망이 아니라 오늘의 책임을 선택해야 합니다. 외면이 아니라 기억을 선택해야 합니다. 무감각이 아니라 연민을 선택해야 합니다. 핑계가 아니라 회개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에스겔이 회개의 명령을 전한다면, 누가복음의 십자가 위 죄수는 그 회개가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23장에는 예수님 곁에 달린 두 명의 죄수가 등장합니다. 한 명은 자신이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을 향해 끝까지 비아냥거렸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죄수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간구했습니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42절)

이 고백을 한 죄수가 평생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십자가형이 최악의 형벌이었음을 고려할 때,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죽어 마땅한 놈”이라며 욕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라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죄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명확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돌이킨다면, 우리의 과거가 어떠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 즉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회개, 돌이킴에는 결코 늦은 때란 없습니다. 과거의 선과 영광이 오늘을 구원하지 못하듯, 과거의 실패와 어둠도 오늘 주님께 돌이키는 자를 막지 못합니다.

우리는 에스겔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가장 근원적인 선언을 마주해야 합니다. “모든 영혼은 나의 것이다. 아버지의 영혼이나 아들의 영혼이 똑같이 나의 것이니”(4절)

이 말씀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밝히는 선언입니다. 왜 우리가 과거의 절망과 실수, 조상으로부터 대물림된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오늘을 새롭게 살 수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영혼이 과거의 것이라면, 우리는 영원히 과거의 상처 속에 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영혼이 부모나 환경의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그 환경을 극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그 영혼은 내 것이다. 그러니 과거의 절망도, 조상의 죄도, 어제의 실수도 내 허락 없이는 너를 소유할 수 없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우리는 과거에 매이지 않고 오늘을 새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시고, 오늘 우리가 내딛는 그 한 걸음을 보십니다.

다시 광화문의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여러분도 안녕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팔레스타인 평화 활동가의 외침은, 신앙 양심을 흔드는 목소리였습니다. 오늘 내가 어떤 생각과 선택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깨우치는 일침이었습니다.

“모든 영혼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나만의 안녕 속에 갇혀 살 수 없습니다. 참된 평안은 현실을 외면하는 무감각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깨어 있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다른 영혼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어제 광화문 광장에서 있었던 BTS의 컴백 무대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주일 내내 아침과 낮과 저녁마다 안전문자가 오고, 저도 ‘참 난리구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전 세계인이 기다린 컴백 무대에서 한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잊혀질까 두려웠다.”

전 세계의 수많은 팬을 가진 방탄소년단도 “잊혀질까 두려웠다”고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기억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잊히지 않는 존재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십자가 위 죄수의 기도는 참 인상적입니다.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응답은 복음의 절정입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기억하겠다는 것은 대단한 위로이고, 대단한 사랑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기억하겠다는 것, 누군가의 죽음을 잊지 않겠다는 것, 누군가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아픔 앞에 기도하며 서겠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의 시작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묻고 계십니다. 너는 여전히 과거 뒤에 숨겠느냐, 아니면 오늘 내 앞에 서겠느냐? 너는 여전히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겠느냐, 아니면 기억하며 기도하겠느냐? 너는 여전히 무감각하게 살겠느냐, 아니면 내 마음으로 깨어 있겠느냐? 너는 여전히 절망을 붙들겠느냐, 아니면 십자가 위 죄수처럼 나를 붙들겠느냐?

오늘, 다시 선택하십시오. 과거의 원망이 아니라 오늘의 책임을 선택하십시오. 외면이 아니라 기억을 선택하십시오. 무감각이 아니라 연민을 선택하십시오. 핑계가 아니라 회개를 선택하십시오.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 안의 평안을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십시오. “모든 영혼은 나의 것이다.” 이 위대한 해방의 선언을 붙잡고, 오늘 다시 선택함으로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생명의 길로, 낙원의 길로 담대히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