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 2026년 03월 29일
요한복음서 12장 20-26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우리가 누려야 하는 평안은 상황의 안정으로 인해 주어지는 평안이 아닙니다. 상황이 바뀌지 않아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평안은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진 평안입니다. 이미 주어졌기에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미 주어진 평안을 다시 선택하고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2천 년 전 예루살렘 거리는 ‘지금 구원해 주소서!’라는 찬양의 “호산나” 소리가 거대한 함성으로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 불렀습니다.
이러한 열광적인 환호와 환영은 예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풍요를 이루어줄 ‘강한 왕’을 향한 욕망의 투영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수많은 표징을 보고, 듣고, 경험도 했지만, 정작 그 표징이 가리키는 예수님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욕망과 결핍을 채워줄 도구로서의 예수라는 메시아를 원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전쟁에서 승리할 만한 위풍당당한 말이 아닌 초라하고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만의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겠다는 상징입니다.
당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실 예수님의 걸음걸음을 군중은 말할 것도 없고, 제자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욕망이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란스러운 입성 직후,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왔음을 아시고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25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군중은 ‘죽지 않고 승리하는 왕’을 기대하며 종려나무를 흔들었는데, 예수님은 ‘죽어서 생명을 살리는 밀알’이 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을 살리시는 방식이고, 앞으로 제자들이 따라야 할 ‘제자도’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따라야 할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이 초대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죽음의 자리, 가장 낮은 곳으로의 초대입니다.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은 예수님 죽음 이후에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 걸어가 자신들도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어,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2천 년이 흐르는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여전히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할 메시아를 기다리거나 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 현대사의 깊은 아픔인 제주 4·3과 세월호 참사를 마주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사실은, 이 거대한 고통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종종 예수님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에 서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제주 4·3 당시, 일부 기독교 세력은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이념의 잣대로 이웃을 정죄하고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들은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민중, 우는 자들과 함께하는 ‘밀알’이 되기보다, 권력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기득권을 지키는 편에 섰습니다.
이 부끄럽고 참담한 모습은 12년 전 세월호 참사 앞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자식을 잃고 절망 앞에 선 유가족들을 향해, 교회는 함께 울기보다 냉담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 권력에 편승하여 ‘이제 그만하라’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고통과 고난이 있는 곳, 생명이 죽어가는 그 자리, 가장 낮은 곳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계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참혹했던 제주 4·3을 기록한 1978년에 쓰인 현기영씨의 <순이 삼촌>에 국가 폭력의 지독한 트라우마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30년이라면 그럭저럭 잊고 지낼 만한 세월이건만, 순이 삼촌은 그러질 못했다.”
제주 4·3 당시, 최대 피해 마을이었던 북촌 마을에서 두 아이를 잃은 소설 속의 주인공은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데 소설은 그 죽음을 이렇게 부연합니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이제 제주 4·3의 시간은 더 흘러 곧 80년이 되어갑니다. 여전히 멈춘 시간 속의 사람들이 제주에 있습니다. 아니 제주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여전히 숨죽인 체, 살아도 온전히 살아있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주 4·3을 기억하고 세월호 참사를 추모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내 삶의 기득권과 안락함이라는 울타리를 내려놓고, 고통받는 이들의 곁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실천적 전향’을 의미합니다.
나의 욕망으로 꽉 짜인 일상을 조금씩 비틀어, 누군가의 슬픔이 들어올 ‘틈’을 내야 합니다. 내 이익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던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타인을 향한 환대’의 틈을 내야 합니다.
우리가 기꺼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을 때, 비로소 우리 삶의 자리와 교회 공동체는 ‘생명의 공간’이 되고, 고통받는 이들의 삶과 억울한 죽음들은 부활의 열매로 피어나리라 믿습니다.
이제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어머니이신 최순화님을 모시고 우리가 여전히 기억해야 할 일들이 있음을 깨닫고, 예수님이 초대하시는 자리로 어떻게 따라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