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이상중 목사]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 주신다. – 2026년 04월 12일

스바냐서 3장 14-20절, 베드로전서 1장 3-12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지난 한 주간에도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삶은 늘 우리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답답해지는 걱정들, 쉽게 떨쳐지지 않는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바로 그런 순간에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괴로운 일들이 다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평안이 이미 우리 안에 주어져 있고, 그 평안을 다시 누리도록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굳어 있는 우리의 시선을 조금씩 풀어 주십니다. 경직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로, 더 넓은 시야로 삶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다른 마음으로 오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 평안을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말씀과 삶이 참되었다는 것을 확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 틀리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과 순종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사건이 바로 부활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예수님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넘어지고 흔들려도, 그래도 이 길이 맞다고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오늘 이 예배에 오셨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다시 용기를 얻고, 각자의 자리에서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다가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나의 욕망과 나의 삶을 돌아보며, 여전히 내가 버리고 포기하지 못하는 것, 오물로 여기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그 완고한 욕망을 내려놓기 위해 분투하다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오늘 스바냐서와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통해, 여전히 분투하며 부활 이후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씨뿌림주일을 맞아 우리가 세상 속에 어떤 씨앗으로 심겨야 하는지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스바냐서의 후반부는 벅찬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이 희망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바냐의 시작은 오히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선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말끔히 쓸어 없애겠다. 나 주의 말이다. 사람도 짐승도 쓸어 없애고, 공중의 새도 바다의 고기도 쓸어 없애겠다. 남을 넘어뜨리는 자들과 악한 자들을 거꾸러뜨리며, 땅에서 사람의 씨를 말리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손을 들어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을 치겠다. 이 곳에 남아 있는 바알 신상을 없애고, 이방 제사장을 부르는 그마림이란 이름도 뿌리 뽑겠다.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을 섬기는 자들, 주에게 맹세하고 주를 섬기면서도 밀곰을 두고 맹세하는 자들, 주를 등지고 돌아선 자들, 주를 찾지도 않고 아무것도 여쭙지 않는 자들을 내가 없애 버리겠다.”(습 1:2-6)

참 두려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그 말씀을 저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속임수와 폭력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부터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자기 욕망을 위해 타인을 도구화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힘을 더 의지했고, 하나님께 묻기보다 자기 계산을 더 신뢰했습니다.

‘나만 괜찮으면 된다.’, ‘나만 손해 보지 않으면 된다.’라는 삶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결국 하나님마저도 내 삶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우상숭배는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내 이익, 내 안전, 내 욕망을 더 우선에 놓는 삶,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스바냐는 이렇게 고발합니다. “망하고야 말 도성아, 반역하는 도성, 더러운 도성, 억압이나 일삼는 도성아, 주님께 순종하지도 않고, 주님의 충고도 듣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도 않는구나. 그 안에 있는 대신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들이다. 재판관들은 이튿날 아침까지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우는 저녁 이리 떼다. 예언자들은 거만하며 믿을 수 없는 자들이고, 제사장들은 성소나 더럽히며 율법을 범하는 자들이다.”(습 3:1-4)

하나님은 폭력과 착취와 거짓이 지배하는 세상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는 질서를 끝내 심판하십니다. 이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동시에 고난받는 이들에게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지 않으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나라를 다시 회복하실 씨앗을 남겨 두시겠다는 희망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 쓸어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동시에 새롭게 시작하실 사람들을 남겨 두십니다. 그 씨앗은 누구입니까?

스바냐 3장 12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도성 안에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온순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남길 것이다.” 공동 번역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기를 못 펴는 가난한 사람만을 네 안에 남기리니 이렇게 살아남은 이스라엘은 야훼의 이름만 믿고 안심하리라.”

하나님께서 남겨 두시는 사람들은 가난하면서도 연약한 자리에서, 낮은 자리에서, 오직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심판의 자리에 서는 사람들은 부유하며, 자기 힘과 자기 욕망과 자기 기득권을 하나님보다 더 붙드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이 있어 보여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통해 자기 세계를 유지하려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의지하고 있느냐. 너는 무엇을 붙들고 안심하려 하느냐. 너는 정말 하나님으로 인해 평안을 누리고 있느냐, 아니면 아직도 네가 가진 것 때문에 안심하려 하느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기를 못 펴는 이들, 가난한 이들, 세상의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 억압과 차별 속에서 눈물 흘리던 이들을 향해 기쁜 소식을 들려주십니다. “도성 시온아, 노래하여라. 이스라엘아, 즐거이 외쳐라. 도성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징벌을 그치셨다. 너의 원수를 쫓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왕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습 3:14-15)

이 기쁜 소식은 세상 속에서 이미 안전하게 살고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 상처 입은 사람들, 폭력과 차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자기 힘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된 말씀이 선포됩니다.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습 3:17)

개역 개정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이 말씀은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기뻐하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새롭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상처 입은 자기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 한가운데로 들어오셔서 ‘다시 일으키겠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다시 새롭게 하겠다. 내가 너를 다시 기뻐하겠다. 내가 너를 다시 일으키겠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의 선언입니다.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습 3:20)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부끄러움을 끝없는 수치로 남겨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시고, 그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그 낙심을 새 생명으로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이 고난과 가난, 억압과 차별, 무력감과 상실감 가운데 있는 우리 모두에게 참된 위로와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혹 우리의 마음이 아직도 완고하다면, 혹 아직도 나의 성취와 나의 힘과 나의 기득권을 놓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 말씀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이키게 하기 위해 주어진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완고한 마음까지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불의한 세상을 정화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을 씨앗처럼 남겨 두셨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낮은 자리에 있고, 연약한 자리에 있고,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이 남겨 두신 씨앗일 수 있습니다.

씨앗은 어디에 심깁니까? 세상은 효율과 자본과 이익을 따라 더 많이 거둘 수 있을 것 같은 곳에만 씨를 뿌립니다. 계산이 맞는 곳, 성과가 보이는 곳, 손해 보지 않을 곳에만 씨앗을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자리,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자리, 희망이 싹틀 것 같지 않은 자리에도 씨앗을 심으십니다.

하나님은 작은 씨앗 하나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세상이 외면하는 자리로 심겨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싹을 틔우시고 자라게 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 역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편지합니다. 베드로는 본도와 갈라디아 등지에 흩어져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려 했지만, 현실은 너무 혹독했습니다. 여러 가지 시련을 겪어야 했고,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삶은 실패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다.”(3절)

부활은 고통이 없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부활은 시련이 더 이상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부활은 그 고난이 끝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여러 가지 시련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기뻐할 만한 상황이어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에 갈등이 있고, 내면의 싸움이 있고, 때로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고통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정말 주님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아무런 흔들림도 없고, 아무런 씨름도 없다면, 우리는 오히려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시련의 용광로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순금처럼 단련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씨앗을 땅에 묻어 두신 채 잊어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씨앗을 자라게 하시는 분입니다.

때로는 어둠 같은 시간 속에서도,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은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씨앗을 품고 계시고, 마침내 싹을 틔우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위해 심겨진 하나님의 씨앗이셨다면, 이제는 우리 역시 예수님을 따라 세상 속에 심겨지는 씨앗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대단한 존재가 되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사랑으로 새롭게 된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베드로는 또 말합니다. “예언자들은 자기들이 섬긴 그 일들이,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임을 계시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일들은 하늘로부터 보내주신 성령을 힘입어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이제 여러분에게 선포한 것입니다. 그 일들은 천사들도 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벧전 1:12)

이 말씀은 믿음이 우리에게까지 오는 길에, 언제나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언자들이 그랬고, 복음을 전한 이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에게 소망이 닿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씨앗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곳에 심겨야 할 씨앗입니까? 또 어떤 씨앗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지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에 우리는 일곱 분 성도님들의 그림과 묵상글을 통해, 이미 그 답을 조금씩 보았습니다.

성도님들의 묵상은 배신과 욕망, 전쟁과 죽음의 현실 속에서도, 가장 낮고 어두운 자리에서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시선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우리가 심겨야 할 자리를 결정합니다. 때로는 불의에 맞서 연대하는 자리일 것입니다. 때로는 상처와 분노와 욕망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내면의 싸움을 묵묵히 감당해야 하는 자리일 것입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자리, 때로는 말없이 견디며 기도하는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계산기를 두드리며 실용적인 곳에만 씨앗을 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곳에 생명을 숨겨 두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도무지 희망이 싹틀 것 같지 않은 절망의 틈에 심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틈에서 생명을 시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들의 지난한 싸움을 보며 세상은 말합니다. “이제 끝났다.” “5년이나 안 변했으니 앞으로도 안 변한다.” 그것은 철저히 계산의 언어이고, 자본의 언어이고, 사람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버려진 자리에도 씨앗을 심으십니다. 그리고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들이야말로 이 세상에 심긴 생명의 씨앗임을 오늘 말씀은 선포합니다. 비록 지금은 가난하고 고난 가운데 있지만, 그렇기에 스바냐의 위로의 선포가 들리게 될 줄 믿습니다.

“내가 너에게서 두려움과 슬픔을 없애고, 네가 다시는 모욕을 받지 않게 하겠다. 때가 되면, 너를 억누르는 자들을 내가 모두 벌하겠다. 없어진 이들을 찾아오고, 흩어진 이들을 불러모으겠다. 흩어져서 사는 그 모든 땅에서, 부끄러움을 겪던 나의 백성이 칭송과 영예를 받게 하겠다.”(습 3:18-19)

부활의 산 소망을 품고 우리는 세상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차갑고 단단한 땅에도 기꺼이 떨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씨앗이 스스로 싹을 틔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심으시는 자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스바냐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베드로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시련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에게 산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새롭게 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상처 속에서도, 낙심 속에서도, 완고함 속에서도, 하나님께 다시 붙들려 새로워지는 사람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롭게 된 채, 다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세상 속으로 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새롭게 되고, 산 소망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