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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너희는 나의 증인이며,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다. – 2026년 04월 19일

이사야서 43장 8-13절, 사도행전 10장 34-43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우리 곁에서, 우리 안에서, 우리 가운데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평안을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고진수 지부장님이 부당전보 철회와 부당해임 복직을 위한 ‘지혜복 교사 복직’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참여했다가 지난 15일 오전 경찰에 연행되어 현재 구속 상태에 있습니다.

부당한 일은 끊임없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그 부당한 일이 부당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는 이들끼리 서로 연대하며 목소리를 내어주는 참담하고 안타까운 형편을 자주 보게 됩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부당’한 일이, 기득권자의 입장에서는 ‘부당’이 아닌 ‘정당’한 일로 바뀝니다. 특히나 법정은 ‘부당’하다고 해야 할 판결을 대부분, 노동자의 편에서가 아닌 기득권자의 편에서 ‘정당’한 일이라고 판결합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법정이 기득권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부당’해야 할 일들을 ‘정당’한 일들로 계속해서 뒤바꾸다 보니 사람들은 ‘부당’하다는 소리를 더 이상 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해도 어차피 안 된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체념은 차라리 건강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부당한 일을 정당한 일로 바꾸려는 노력을 그만두어서 그렇지, 적어도 부당한 일과 정당한 일은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건 노동자 조차도 ‘부당’한 일을 더 이상 ‘부당’으로 보지 않고 기득권의 입장에서 ‘정당’한 일로 보기 시작할 때입니다. 자신이 착취를 당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음에도, 착취를 당하고 있는지,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기득권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스라이팅’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어느 노동자가 야근 수당도 받지 못하면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월급은 넉넉하지 않고, 노동환경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노동자는 자기 현실을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다른 노동자를 향해 “저 사람들은 나라 경제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회사가 살아야 우리가 산다.”, “지금은 참아야 할 때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상황의 부당함을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를 착취하는 이들의 말로 자기 현실을 해석한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거대한 사회적 가스라이팅에 길들여져 살아갑니다. 우리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시각이 기득권자들이 가장 바라는 점이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이사야에는 이런 잘못된 시각과 사고를 가진 이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8 백성을 법정으로 데리고 나오너라. 눈이 있어도 눈이 먼 자요, 귀가 있어도 귀가 먹은 자다!”

어떤 장면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고발하는 장면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기에 눈이 먼 자라 말씀하십니다. 귀가 있지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있기에 귀가 먹은 자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들었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만 피고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많은 인원을 법정에 피고인으로 세우십니다.

“9a 모든 열방과, 뭇 민족도 함께 재판정으로 나오너라.” 자, 이제 이스라엘 백성, 모든 열방, 뭇 민족까지 하나님 앞에 피고인으로 섰습니다. 하나님의 고발 내용은 무엇입니까?

“9b 그들의 신들 가운데서 어느 신이 미래를 예고할 수 있느냐? 그들 가운데서 누가 이제 곧 일어날 일을 예고할 수 있느냐? 그 신들이 증인들을 내세워서, 자신들의 옳음을 증언하게 하고,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게 하여서, 듣는 사람들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하게 하여 보아라.”

나, 하나님만이 진정한 신이고 유일한 신인데, 너희는 도대체 누구에게 절하고, 미래를 묻고, 도와달라 호소하고, 지켜달라고 기도하는가? 너희들이 신이라고 하는 그것들이 정말 신이 맞는지 증명해 보라! 고 고발하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열방과 뭇 민족에게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유일한 신임을 증명해야 할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며,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다.”라고 오늘 말씀은 기록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증인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에 매몰되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하실 수 있는 분인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하고 성전이 무너지고, 백성의 일부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은 패배하셨나?”, “우리는 버림받았나?”,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실까?”, “바벨론의 신들이 더 강한 것 아닌가?”, “역사는 힘센 제국이 결정하는 것 아닌가?” 지금 겪고 있는 자신들의 상황, 눈에 보이는 상황으로 인해 두려움, 상실, 정체성 붕괴, 신앙의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혼란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한 것은, 너희가 나를 알고 믿게 하려는 것이고, 오직 나만이 하나님임을 깨달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 지음을 받은 신이 있을 수 없고, 나 이후에도 있을 수 없다. 나 곧 내가 주이니, 나 말고는 어떤 구원자도 없다. 바로 내가 승리를 예고하였고, 너희를 구원하였고, 구원을 선언하였다. 이방의 어떤 신도 이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 일에 있어서는 너희가 나의 증인이다. 내가 하나님이다.”

마땅히 증인의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떠한 분이셨는지 다시, 직접 상기시켜 주시고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마!, 너희는 이렇게 끝날 백성이 아니야!, 이제 눈을 떠서 나를 봐, 귀를 열어 나의 말을 들어봐!”라고 말씀하시며 제국에 가스라이팅 당해 힘과 권력과 이방 신이 진짜인가라며 혼란을 겪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언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법이 약자와 노동자를 지켜주지 못한다고 해서, 권력과 부를 가진 기득권자들이 승승장구한다고 해서 불의에 저항해 보지도 않고 ‘불가능한 일이야.’, ‘바위에 계란치기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라고 말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며,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다.”

하나님은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만 증인으로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하고 흔들리며, 상황에 눌려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백성을 먼저 붙드시고, 바로 그런 백성을 당신의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자신들의 헛된 신 그리고 제국의 힘과 부가 영원하고 또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믿는 이들에게 선언하십니다. “태초부터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 내가 장악하고 있는데, 빠져 나갈 자가 누구냐? 내가 하는 일을, 누가 감히 돌이킬 수 있겠느냐?” 이제 눈을 떠 나를 바라보라, 이제 귀를 열어 내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가 진정 깨닫는다면, 그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고, 그 일은 더 이상 바위에 계란치기가 될 수 없으며, 그 일은 할 수 있는 일이 됩니다.

무엇이 저와 성도님들을 두렵게 만들고 있습니까? 어떤 문제가 저와 성도님들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두려움과 초조함 때문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증인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피고석에 앉아, 증인으로 살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 책망을 들어야 하지는 않습니까? 모든 열방과 뭇 민족들처럼 하나님이 아닌 힘과 우상과 권력이 승리하게 하고, 지켜주고, 보호한다고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내리는 어떤 결정이 우리의 삶을 결정지을 수 없습니다. 제직회를 통해 어떤 결정을 내리고, 공동의회를 통해 어떤 결정을 내린다 해서 그 결정이 우리 공동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이 우리의 삶을 결정지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우리의 공간과 소유가 전부라고 여기게 될 때, 아무리 좋은 공간과 많은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눈 앞에 보이는 상황, 지금 겪고 있는 일이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결정짓지 못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두려워하지 마!, 너희는 이렇게 끝날 백성이 아니야!, 이제 눈을 떠서 나를 봐, 귀를 열어 나의 말을 들어봐!”라고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제국주의적 가치와 삶만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외치는 이들에게 다른 삶이 가능할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단지 입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국의 힘이 승리의 언어가 아니며, 권력과 소유가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역사의 주인이심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 증인의 삶입니다.

이사야에서 하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백성에게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장에 이르면 그 증인의 자리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제 증인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신 일, 곧 사람들이 죽이라고 판결한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이사야의 법정에서는 하나님이 누가 참 신인지 밝히셨다면,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누가 참 주님인지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0장은 단지 고넬료 한 사람의 회심 이야기가 아니라, 초대교회가 자기 문턱을 넘어 하나님의 새 일을 증언하기 시작하는 전환점의 이야기가 됩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한 로마 백부장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입니다. 고넬료는 “완전히 바깥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안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아직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입니다.

제국주의에 연결된 이방인 고넬료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다면, 이방인을 유대인 중심 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드로는 선포합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여 주신 증인인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고넬료 앞에 단지 설교자로 서 있지 않습니다. 증인으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증언은 단지 “예수님을 믿으십시오.”라는 권유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죽이라고 판결한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것, 그러므로 최종 판결은 사람의 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 가이사가 아니라 예수님이야말로 만민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경계보다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고넬료 앞에서, 제국의 질서와 종교적 경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평화”, “만민의 주님”이라는 표현은 로마 제국 질서 속에서 매우 정치적인 표현입니다. 황제 가이사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진정한 주님이시라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사야의 법정과 사도행전의 증언은 하나로 만납니다. 거짓이 진실인 것처럼, 불의가 정당한 것처럼, 권력이 구원인 것처럼 말하는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말을 해야 한다고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라고 선언하고, 사도행전에서는 “우리는 그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4·19 혁명은 단지 과거의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거짓이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던 시대에 시민들이 자신의 생명으로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증언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은 교단에서 재정한 4·19 혁명기념주일입니다. 4·19 혁명은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이 되어 3.15 부정선거와 독재, 부패에 항거한 민주주의 운동으로,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하야로 이어졌습니다. 국가는 이 날을 기념일로 정하고, 그 정신을 “자유·민주·정의”의 계승과 희생자 추모의 의미로 기리고 있습니다

교단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4·19혁명을 기억하는 것은 불의에 항거한 열사들의 삶, 바위를 계란으로 처서 깨트린 사람들의 삶을 기억하며 신앙을 가진 이들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돌아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4·19 혁명기념주일은 역사의 고통과 진실 앞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기억하고, 불의한 재판과 권력에 침묵하지 않겠다고 다시 다짐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증인으로 살겠다는 다짐의 주일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승자가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증언하는 데 있습니다. 증인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증인은 기억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증인으로 살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옳아서만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워하는 백성을 향해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라고 먼저 불러 주시고, 사람들이 죽이라고 판결한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자기 진실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의가 정당한 것처럼 말해지는 시대에도, 거짓이 법의 이름으로 포장되는 시대에도, 힘과 권력이 승리의 언어인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도, 우리는 침묵하는 사람이 아니라 증언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는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당함이 정당한 것처럼 말해지고, 힘 있는 자의 판단과 말이 승리자의 언어인 것처럼 여겨지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긴 시간 싸우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진실을 드러내시고 생명의 길을 여시도록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와 공동체와 사회 속에서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죽음을 넘어서 생명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저와 성도님들, 그리고 생명사랑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