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나 목사] 사랑하나요? – 2026년 05월 03일
요한복음서 21장 15-19절
오늘은 교회교육주일 이자 어린이· 청소년 주일로 전교인 연합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매주 우리 곁에 있는 어린이· 청소년들. 그들을 마음 한가운데 두고 말씀 앞에 함께 섭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21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숫가에서 베드로를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베드로가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때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 “내 양들을 쳐라.” “내 양들을 먹여라.”
세 번의 질문, 세 번의 대답, 세 번의 사명.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맡기신 것은 양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어린이· 청소년 부서를 대부분 교육부서 라고 부릅니다.
신앙은 전인격적인 즉 몸과 마음, 생각과 행동, 영적인 부분까지 모두 아울러 경험하게 되는 것인데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학습’, 지식적인 것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육부서’라는 단어 때문일까요?
우리의 신앙교육 또한 통합적인 경험보다 지식 전수에 머무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교육보다 더 넓은 개념의 돌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서 돌봄이란 개념은 개인적인 일이고, 여성의 영역이라 여겨져 왔기 때문에 교육보다 더 넓은 개념이라고 보는 저의 관점에 의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돌봄이란 개념은 점점 한 생명이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나갈 수 있도록 몸과 마음, 인지, 영적인 부분까지 통합적으로 지원하는 개념으로 변화하고 있고 돌봄은 더 이상 개인의 과제가 아닌 함께 해야 할 과제임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 주일학교에 한 선생님이 있었어요. 그 선생님은 아이들을 참 좋아했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오래 지켜보다 보니, 신기한 걸 발견했어요.
교회에는 형제자매가 함께 다니는 가정이 많았는데, 첫째들은 하나같이 의젓했어요. 동생이 떼쓰면 달래주고, 과자가 있으면 먼저 양보하고, 선생님이 뭔가 부탁하면 “네!” 하고 달려와 도와줬어요. 작은 어른 같았지요.
그런데 둘째들은 달랐어요. 자기 것은 꼭 챙기고, “선생님, 이건 왜 그래요?” “저건 뭐예요?” 질문이 끝이 없었어요.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었지요.
선생님은 자기도 모르게 첫째들이 더 예뻐 보였어요. 칭찬도 자주 했고, 둘째들한테는 “좀 조용히 해봐”, “형, 누나처럼 해봐”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둘째들만 따로 모이게 됐어요.
선생님이 성경학교 모임 시간을 알려주려고 말했어요.
“얘들아, 다음 모임은 12시야!”
그러자 한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어요.
“선생님, 밤 12시요?”
옆에 있던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어요.
그 순간, 선생님 안에 있던 뭔가가 확 올라왔어요. 평소에 쌓인 것들이 있었던 거예요.
“너 진짜 밤 12시라고 생각하고 물어본 거야?” 정색이 나왔어요.
근데 그때 그 아이의 표정이 바뀌었어요.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는 게 보였지요. 선생님은 그제야 멈칫했어요. 한숨을 내쉬고 아이 옆에 앉았답니다.
“얘야… 너 혹시 관심이 필요하니?”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가 울기 시작했어요. 옆에 있던 아이들도 따라서 눈물을 훔쳤지요.
그날 선생님은 아이들과 오래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러면서 알게 됐습니다. 둘째들이 왜 그렇게 자꾸 질문하고, 장난치고, 말썽을 부렸는지를요.
선생님이 첫째들만 예뻐하는 것 같아서. 내 편은 안 들어주는 것 같아서. 그래서 어떻게든 눈에 띄고 싶었던 거예요. 장난이라도 쳐서, 질문이라도 해서.
선생님은 집에 돌아와 혼자 앉아 있었어요. ‘나는 왜 첫째들만 더 예뻐했을까?’
한참을 생각하다 알게 됐습니다. 자기가 첫째였거든요. 어릴 때 동생 챙기고, 참고, 양보하던 그 첫째. 그러니 교회의 첫째들이 자꾸 어린 시절 자기 모습으로 겹쳐 보였던 거예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첫째 편을 들고, 둘째들한테는 마음의 문이 잘 열리지 않았던 거였지요.
그날 선생님은 많이 울었어요. 그리고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제가 몰랐습니다. 제가 부족했습니다.”
그 이후로 선생님은 조금씩 달라졌어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아이들만 키우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라게 하는 시간이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거든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이야기 속 선생님은 저였습니다.
저는 그날 아이들 앞에서 제 한계를 만났어요. 제 안에 있는 편견, 제가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실은 골고루 품지 못했던 좁은 마음을 보게 됐습니다.
아이들을 돌본다는 건 이런 거예요. 내가 가르치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나 자신이 드러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게 불편해서 눈을 돌리고 싶을 때, 그 자리에 머무는 게 참 어렵습니다.
내가 부족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다시 사랑하기를 결심하는 것. 이게 쉽지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왜 하필 “양을 먹여라”고 하셨을까요?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세 번 부인한 사람입니다. 실패 앞에서 무너진 사람이에요.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그러니 넌 안 돼”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대신 양을 맡기셨습니다. 그 돌봄의 자리에서 베드로는 다시 일어섰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 변해갔지요.
저는 그게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양을 돌보는 일은 나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훈련하는 자리입니다. 거창하게 들릴 수 있는데, 사실은 아주 작은 데서 시작해요. 한 아이의 눈물 앞에서 멈추는 것, 내 안의 편견을 마주하는 것, 그리고 어제보다 조금 더 넓게 마음을 여는 것.
교육부서 주일, 오늘 우리가 함께 고백하고 싶은 게 있어요.
아이들은 우리가 돌봐줘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자라게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들 앞에서 우리는 자꾸 민낯을 들키고, 그 민낯을 하나님 앞에 내놓으면서 조금씩 달라집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할 때, 주님은 말씀하세요.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
이 자리에서, 이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