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황은영 목사] 슬픔 기쁨 아름다운 마음 – 2026년 05월 17일

이사야서 32장 9-17절, 요한복음서 16장 16-24절

원래 AKMU(악동뮤지션)의 노래 「기쁨, 슬픔, 아름다운 마음」은 매우 선풍적인 인기를 끈 노래입니다. 유튜브에서 검색해보면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달려 있습니다. 잘 부른 노래에는 평가와 찬사가 따르지만, 좋은 노래에는 사연이 달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가사를 듣고 각자 떠오르는 삶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건 / 아름다운 마음이야 / 쫓아내지 말고 품어주어라 / 아주 예쁜 돌이 된단다 / 햇빛 뒤에 그늘이 있는 건 / 사랑스러운 모습이야 / 밝은 미소를 짓지 않아도 / 사랑할 이유가 많단다 / 너의 웃음과 조화로운 너의 눈물 /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 / 흐린 날도 화창한 날도 시린 날도 / 끼우고 나면 다 퍼즐이 될 거야 / 겁내지 말고 마주앉아라 / 찬란한 그림이 된단다.”

이 노래에는 정말 많은 사연들이 달립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쁠 수만은 없습니다. 빈곤, 상실, 질병, 고독, 사별, 실직 등 여러 피할 수 없는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살아갑니다. 기쁨과 만족, 즐거움만을 강박적으로 누려야 한다는 당위 속에서, 그리고 우울은 운동이나 약물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퇴치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 속에서, 이 노래는 우리에게 슬픔과 아픔과 함께 살아가도 충분히 괜찮음을 말해줍니다. 그 속에서 내면의 단단함이 세워지고, 사랑과 선을 볼 수 있는 눈이 밝아지며, 사랑을 베풀 수 있는 품이 넓어지고, 삶의 부침 속에서도 매 순간을 절정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결국 생의 마지막 장면에 그려질 “나”라는 그림의 작은 조각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본문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 역시 “슬픔, 기쁨, 아름다운 마음”이지만, 그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나 개인의 삶 속에서 아픔과 슬픔의 다채로움을 헤아리며 아름다움을 그려가는 삶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굳이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단지 각자의 삶 속에서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고, 그것을 성찰하는 존재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와 세상이라는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삶으로 살아내며, 또 다른 차원의 슬픔과 기쁨, 그리고 아름다움을 구현해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사야는 우리의 삶의 안전함과 만족, 여유의 한복판에서 역사적 위기와 결핍, 그리고 파국을 바라보게 합니다. 동시에 그 피할 수 없는 위기와 결핍, 파국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도달하게 되는 진정한 의미의 안전과 평화와 정의를 약속합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은 역사 속에 진정한 평화와 정의를 가져오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서 기쁨을 누리지만, 동시에 그분의 곁에 없음으로 인해 슬픔을 느끼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마음 속에서 그 정의와 평화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결국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단지 만족스럽고 안전한 일상의 표면에 안주하는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오히려 그 삶은 역사 속의 엄중함과 위기감과 불만족, 파국을 읽어내되, 그 위기와 파국에 절망하지 않고, 그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내며, 각자의 자리에서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구현하면서 삶의 보람과 기쁨을 발견하는 삶입니다.

오늘은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주일입니다. 최근 헌법 개정은 부결되었지만,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으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5·18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12·12 이후 수개월간 진행된 군부독재의 정착 과정 속에서 다양한 민주적 저항이 일어났고, 그 가운데 광주는 본보기식 탄압을 당했습니다. 어린 시절, 장갑차를 배경으로 무력한 시민을 진압봉으로 때리는 군인의 사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시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시민을 해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지난 12·3 계엄의 실패는, 결국 시민은 물론 군 역시, 비록 부분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민주주의를 지켜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역사적 변곡점에서 자신의 삶을 드러낸 시민들, 그리고 부당한 명령 앞에서 주저하거나 저항했던 군인들. 그들 모두에게는 역사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거꾸로 퇴행하는 방향을 결국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였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는 결국 한국 역사 속에서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했던 광주의 기억이 반복되어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과 5·18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저는 바로 이 세속 역사의 한복판에서 오늘 본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가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반복되는 5월의 봄, 여느 봄과 같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그것이 직장이든 가정이든 학교든 영업장이든, 그 일상의 표면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역사적 위기와, 그에 맞서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감지하고 행동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실패를 보면서도 끝내 그 가치를 살아내려 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헌법에 그러한 가치를 새긴다는 것은 결국,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시민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기억하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봅시다. 오늘 본문은 제1이사야입니다. 즉 기원전 8세기 유다 궁정에서 활동했던 고위층 예언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궁정 정치와 종교의 중심에서 활동하며, 외교 정책을 인간적인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 위에 세우라고 외쳤습니다. 당시 유다는 동쪽의 앗시리아와 남쪽의 이집트 사이에서 반앗수르 정책을 택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오늘의 본문은 슬픔과 기쁨, 그리고 정의와 평화의 아름다운 꿈에 대해 말합니다. 9절에서 14절까지 우리는 삶의 피상적 안락함에 대한 경고를 봅니다. “안일한 여인들”, “염려 없는 딸들”이라는 반복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속 편한 부잣집 사모님들”, “한가로운 부잣집 따님들” 정도의 뉘앙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여성 폄하 표현이 아닙니다. 삶의 안락함 속에 안주하며 자기 일만 생각하는 게으름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예언은 단순히 미래를 맞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입니다. “목소리를 들어라”, “귀를 기울여라”라는 말은 삶의 피상적인 안락함에서 벗어나 성찰하라는 요청입니다. 무엇을 성찰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 곧 역사 속에서 삶의 가장 깊은 의미와 가치를 세우시는 궁극적인 영의 힘을 마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위태로운 국제정세 속에서도 포도의 수확, 좋은 밭, 좋은 옷에만 몰두했습니다. 이사야는 그 표면적 안락함 속에서 임박한 역사적 위기와 파국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궁전은 폐허가 되고, 망루와 오벨은 들짐승의 거처가 되며, 논과 밭에는 가시가 자라고, 포도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경제위기가 아니라 국가의 치안과 국방, 문명 인프라, 공급망 전체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다르지 않습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보다 효율적이고 민주적인 정부가 세워졌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불안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여기서 특정 정파적 논의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코스피의 상승,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신고가, 주주친화 정책과 시장 활황 속에서도 우리의 삶은 여전히 위태롭습니다. 인공지능과 대량실업의 전조, 미국 국가부채와 금융위기 가능성,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군수산업 기지로 편입되는 한국의 현실, 기후위기의 시간표들. 이 모든 것 속에서 우리는 기존 자본주의 질서가 만들어낸 소비의 안락함이 무너져가는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15절부터 갑자기 방향을 바꿉니다. 슬픔과 폐허의 한복판에서 다시 기쁨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합니다. 성서는 “위에서부터 영이 우리에게 부어질 때” 새로운 현실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이 “위에서 오는 영”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세계와 자연을 새롭게 하시는 생명의 힘입니다. 그 힘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는 절망을 넘어 더 큰 희망을 보게 됩니다.

이제 광야는 아름다운 밭이 됩니다. 현재의 풍요로움 뒤에 숨겨진 폐허를 보았던 예언자는, 다시 그 폐허 너머에서 숲처럼 우거진 새로운 생명의 미래를 바라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정의가 광야에 거하고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한다.” 여기서 정의(미슈파트)는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행위를 의미하고, 공의(체다카)는 그 심판을 통해 이루어질 의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위에서 오는 영을 받을 때, 우리는 궁극적인 정의와 평화의 비전을 보게 됩니다. 현실의 부정의와 혼란 속에서 슬픔과 절망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 한복판에서 치유와 회복의 가능성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느냐”입니다. 일상의 안락함에 매몰되지 않고, 역사의 흐름을 읽으며, 정의와 평화의 비전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삶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가장 먼저 살아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의 본문은 제자들을 떠나가시는 예수의 상황을 다룹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삶으로 투명하게 드러내셨지만, 그만큼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결국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성령으로 다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꿈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사람들로서, 일상의 안락함 속에서도 역사의 흐름을 읽고, 안타까움과 불만족을 느끼며, 우리의 삶 속에서 평화와 정의를 살아내려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종말의 기쁨과 아름다운 삶의 비전은 헛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예수의 운동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예수의 떠남은 제자들에게 슬픔이었지만, 동시에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낳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꿈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건이었고, 부활은 그 내어줌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실을 볼 때, 역사 안에서 그러나 역사 너머에서 정의와 평화를 불어오는 그리스도의 영의 힘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이상은 여전히 멀리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꿈을 조금씩 흘려보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늘 냉정하고 견고합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꿈은 때로 우리 안에서 조롱당하고 잊혀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꿈의 무게만큼의 불편함과 주저함과 머뭇거림을 품고 살아갑니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이미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매끄러운 일상은 사실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과 희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인공지능 챗봇의 한 줄 뒤에도, 노동을 소모품으로 만들고 환경을 파괴해온 자본주의의 역사와, 데이터센터와 에너지 소비, 대량실업과 사회적 불안의 미래가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를 믿으며 궁극적인 정의와 평화의 꿈을 붙들고 살아가려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삶의 보람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물론 그 기쁨은 때때로 흐려집니다. 그리스도는 없는 것 같고, 종교적 체험 역시 단지 스쳐가는 생각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흐려짐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정의와 평화의 이상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안락한 일상 속에서 더 깊은 슬픔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그 슬픔을 넘어 정의와 평화가 시작된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며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비전이 흐려질 때마다 다시 슬픔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모습 그대로, 우리는 이미 정의와 평화를 꿈꾸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존재들로 빚어져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