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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 2026년 06월 14일

스가랴서 8장 18-23절, 사도행전 11장 1-18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참 숨 가쁘게 돌아갑니다. 하루하루 들려오는 소식들은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두지 않습니다. 뉴스를 보면 불안하고, 일터와 가정에서 마주하는 현실도 불안하게 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상황이 좀 나아지면 평안해지겠지.” “문제가 해결되면 괜찮아지겠지.” “저 사람만 바뀌면 내 마음도 편해지겠지.” 물론 상황이 나아지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누려야 하는 평안은 이런 상황의 안정에서 오지 않습니다. 참 평안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에서 옵니다. 풍랑이 사라져서 평안한 것이 아니라, 풍랑 한가운데서도 예수님이 배 안에 계심을 알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가운데서도, 아직 답이 보이지 않는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하신다.”라는 믿음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평안을 다시 선택하여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교단이 정한 총회선교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두 본문, 스가랴서와 사도행전을 통해 선교의 의미와 앞으로 우리 교회 선교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첫 번째 본문인 스가랴서는 기원전 520년경,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들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돌아온 것 자체는 감격이었지만, 이들의 삶은 감격적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은 폐허 상태였고, 성벽은 무너져 있었고, 성전은 불타 사라진 뒤였습니다. 과거의 영광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돌아왔지만, 돌아온 자리에는 집도 없고, 힘도 없고, 안전도 없었습니다. 먹고사는 일도 막막했습니다. 성전을 다시 지으려 했지만, 주변의 방해와 내부의 무기력으로 공사는 멈춰 섰습니다.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매일매일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어떻게 지켜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백성들이 살려달라 외쳐 이집트에서 탈출했지만, 막상 광야에서 겪은 고난으로 차라리 이집트 생활이 좋았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현재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백성들은 “우리가 정말 돌아온 것이 맞는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이 아직도 사실인가?”,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까?” 이런 의심의 질문들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자연스럽게 백성들의 온 관심은 ‘생존’과 ‘안정’, 그리고 ‘잃어버린 나라의 회복’에 쏠려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8-19절에 등장하는 네 가지 금식일, 즉 넷째 달, 다섯째 달, 일곱째 달, 열째 달의 금식일은 이런 사고를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열째 달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한 날을 기억합니다. 넷째 달은 예루살렘 성벽이 뚫린 날을 기억합니다. 다섯째 달은 성전과 왕궁이 불타버린 날을 기억합니다. 일곱째 달은 유다 땅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지도자 그달리야가 암살당하고, 남은 백성들마저 흩어지게 된 날을 기억합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금식일들이 있습니다. 날짜만 떠올려도 마음이 무거워지고 고통스러운 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날이 끝이 아니다.”, “그 슬픔의 날도 기쁨의 절기로 바뀔 수 있다.”

이처럼 생존의 불안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놀라운 말씀을 전합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 비참했던 금식일들이 바뀌어서, 유다 백성에게 기쁘고 즐겁고 유쾌한 절기가 될 것이다!“

이 선언은 곧 “너희의 안전과 먹고사는 문제, 억압자를 심판하고 회복하는 그 거대한 일은 역사의 주관자인 ‘내가’ 할 일이다. 내가 책임질 테니, 너희는 생존의 불안에 얽매여 진짜 해야 할 일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19절 하반절에 우리가 진짜 집중해야 할 삶의 방향을 주십니다. “너희는 마땅히 성실을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철저한 약육강식과 무한 경쟁의 사회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네 밥그릇은 네가 챙겨야 해. 남을 돌아볼 여유가 어디 있어? 일단 너부터 살아남아야지.” 그래서 우리는 내 삶의 문제, 내 가족의 안전에만 철저하게 매몰되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내 문제에만 갇혀 있을 때 일어나는 가장 끔찍한 비극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는 감각을 잃어버린다는 점입니다. 내 생존을 지키기 위해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타협할 때, 우리의 영혼은 메말라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실을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무력해 보이고 팍팍한 삶이지만, 내 밥그릇을 챙기던 손을 펴서 부당하게 밀려난 약자들의 손을 잡고, 혐오가 가득한 곳에서 평화를 만들어내는 삶을 살아가라고 그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성실은 단지 부지런함이 아닙니다. 성실은 진실함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속이지 않는 삶의 태도입니다. 사람 앞에서 말과 행동을 다르게 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이익을 위해 거짓을 선택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모두가 적당히 넘어가자고 할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옳은 길을 선택하는 태도가 성실입니다.

그리고 평화는 단지 싸우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의 평화, 샬롬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깨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고, 억눌린 사람이 숨을 쉬게 되는 것입니다. 소외된 사람이 공동체 안에 자리를 얻는 것이고, 무너진 곳에 생명의 질서가 다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실과 평화를 사랑하여라”라고 하신 말씀은 이렇게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오늘의 삶에서 진실하게 살아라.”, “내가 너희의 폐허를 회복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무너진 관계 속에 평화를 세워라.”, “내가 너희와 함께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이웃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의 흔적을 보여주어라.”

바로 여기에 선교의 본질이 있습니다. 선교는 멀리 가는 것에서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선교는 거창한 계획에서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선교는 오늘 내 삶의 자리에서 성실과 평화를 사랑하는 삶으로 시작됩니다.

가정에서 정직하게 말하는 것, 일터에서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않는 것, 교회 안에서 약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 갈등이 있는 곳에서 평화의 다리를 놓는 것, 사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아파하는 것, 이것이 선교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말보다 우리의 삶을 먼저 바라봅니다. 세상은 교회의 구호보다 교회의 태도를 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주장하는지 듣기 전에,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봅니다.

스가랴 8장 23절은 그래서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 때가 되면, 말이 다른 이방 사람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리가 너와 함께 가겠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유다 백성들은 힘이 없습니다. 그들은 제국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막강한 군대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대단한 경제력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포로에서 돌아온 비참한 백성입니다. 폐허 속에서 겨우 다시 일어서고 있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말이 다른 이방 사람들이 그들에게 다가옵니다. 한두 명이 아닙니다. “열 명”이라고 표현합니다. 말하자면 수많은 이방 사람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합니다.

“우리도 너희와 함께 가겠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신다는 말을 들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을 우리도 알고 싶다.” 이런 고백을 우리 생명사랑공동체도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각자가 삶의 자리, 가정과 일터와 소속된 공동체에서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유다 백성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유다 백성이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유다 백성이 세상적으로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흔적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총회선교주일을 지키는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옷자락을 내어주고 있습니까?”

누군가가 우리의 삶을 보고 “나도 당신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가정, 우리의 일터, 우리의 교회, 우리의 말투, 우리의 선택, 우리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흔적을 볼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다들 자기 살길만 찾는데, 유독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억울한 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손해를 보면서도 정직을 지키는 성도들의 삶에서 우리의 이웃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를 발견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찾아올 만큼 매력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 하나님과 동행함을 증명해 내는 일상, 그것 자체가 가장 강력한 선교입니다.

제 여동생과 지난 목요일에 연락을 주고받다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귀한 목회 해주는 오빠가 있어서 고맙고~ 자랑하고 다님 요새“, ”오빠랑 같은 교단에 있었으면 엄청난 부심이었을거야.“

정말 뜬금없었는데, 여동생이 몇 십년 만에 저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인정 받는게 쉽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마도 제 동생은 정확히 말하면 저에게라기보다 생명사랑공동체에 대한 고백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생의 말이었지만, 하나님의 응원처럼 들렸습니다. ‘잘하고 있구나.’

이런 의미에서, 선교는 단순히 남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사역이 아니라,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을 나 자신이 먼저 경험하고 회복하는 가장 강력한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스가랴의 예언은 참 아름답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유다 사람의 옷자락을 붙잡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장면은 참 벅찹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옷 자락을 잡고 찾아왔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시간이 흘러 이방인들이 복음의 은혜를 갈망하며 다가왔을 때, 정작 예루살렘의 교회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사도행전 11장 3절을 보면, 예루살렘의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한 베드로를 맹렬히 비난합니다.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이오!“

율법과 정결법을 내세웠지만, 이 배척의 깊은 밑바닥에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망이 깔려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얽힌 이방인들을 향한 혐오, 그리고 우리끼리만 뭉쳐야 덜 상처받고 안전하다는 생존 본능이 이방인과의 ‘평화’를 거부하게 만들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11장의 앞선 사건인 10장에서, 하나님이 환상 중에 부정한 짐승들을 보여주며 먹으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한 이 외침을 던집니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한 말입니다. 기도하던 베드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말 안에는 참 이상한 모순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동시에 “절대로 안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순종해야 하는데, 입으로는 주님이라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거절합니다. 말로는 주님을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기준을 내려놓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 우리 신앙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이끄실 때, 우리는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베드로의 그 기준과 신념을 산산조각 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17절에서 철저히 항복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은 선물을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의 이 진실한 고백 앞에 예루살렘 교회도 자신들의 고집을 꺾고 이방인을 품에 안았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고백이 그렇게 하겠습니다.’로 바뀌었을 때, 그들의 기준과 편견이 해체되었고, 나와 다른 자들에게 옷자락을 내어준 그 순간!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사도행전의 위대한 선교의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매몰되어 있는 삶의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땅히 살아내야 할 삶을 거부하며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외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평온한 일상만을 지키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문제, 나의 생존에만 매몰되어 있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선교는 나를 지키려던 삶에 틈을 내는 일, 이웃을 향해 닫아두었던 마음의 문을 여는 데서 시작됩니다.

내 몫을 조금 손해 보더라도 마땅히 성실을 선택하십시오. 불의에 맞서고 약자들과 평화로 연대하십시오. 그 순종의 걸음걸음마다 메말랐던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과 은혜가 부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 충만한 사랑을 누리며 넉넉히 삶의 옷자락을 내어줄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리고 성도님들의 치열한 일상이 이 놀라운 생명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