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이상중 목사] 믿음의 선한 싸움 – 2025년 7월 6일

시편 9장 9-20절, 디모데전서 6장 6-19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평안의 마음은 멀리 어딘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평안할 수 없다면, 많은 경우 스스로가 자신을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내버려두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의 가사를 고백하며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지만,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삶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다시 평안을 선택하고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성도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합니까?’라는 제목으로 삶의 자리, 사회적 자리 등등. 성도가 서 있어야 하는 자리는 안락하고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 불확실하고, 불편한 자리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공간적, 사회적 위치에 따라 보이는 풍경, 경험이 다를 수밖에 없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경험하느냐에 따라 성도로서 살아갈 수 있거나 살아갈 수 없기도 하기에 성도에게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고민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님들은 어디에서 어떤 풍경을 보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어떤 경험을 하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한 주간 말씀을 듣고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고민해 보셨습니까?

내가 가고 싶고, 내가 서 있고 싶은 곳이 아니라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설 수 있는 성도와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리는 결코 안락하거나, 편안하거나, 쉬운 자리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익숙하거나, 우리의 얕은 지식과 경험으로 계산이 서는 자리도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네”라고 응답하며, 그 부르심의 자리, 믿음의 모험을 떠나야 하는 자리에 서서, 성도라는 이름에 맞게 살 수 있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수요예배 시간에 성도님들께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만, 주중에 오랜만에 동생 가족과 만나 저녁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야기 중에 현재 고등학교 교사인 매제가 ‘드디어, 저희 반에 교회 다니는 친구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매번 자신이 담임으로 맡은 반 아이들에게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에 관한 여부를 물었고, 해마다 조금씩 줄어들기는 했어도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올 2025년에는 드디어 한 명도 교회에 다니지 않는 고등학생들을 보게 되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럼, 교회에 다녀본 적이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도 아주 소수만 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매제의 이야기를 들으며 교회가 얼마나 위기인지 피부로 확 느끼게 되는 충격을 경험했습니다. ‘정말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의 핵심은 교회의 부정적 행태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있는 교회의 부정적 행태는 최근에 부각 된 극우주의 교회, 목회자, 성도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들이 부정적 인식을 좀 더 심화시켰을지 모르지만,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아주 오래전부터 진행이 되어왔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이유는 교회 안의 모습이 세상과 다르지 않거나 더 형편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성도는, 교회는 이 시대에 무엇과 싸워야 하는가?’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믿음의 선한 싸움’의 출발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전서는 교회 지도자뿐 아니라 구성원들에게 교회 안과 밖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편지입니다. 교회의 젊은 리더인 디모데에게, “아무도, 그대가 젊다고 해서, 그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도리어 그대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이들의 본이 되십시오.”(디모데전서 4:12)라고 하는 바울의 권면에서 디모데전서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혹은 편지의 저자는) 성도라 이름 불리는 모든 자, 직분을 맡은 자는 교회의 안과 밖에서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을 나누며 우리가 싸워야 했는데 싸우지 않고 회피했거나, 또는 이겨야 하는데 지고만 싸움이 무엇인지 깨닫고, 다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교회의 안과 밖에서 본이 되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성도는 무엇과 싸워야 합니까? 오늘 말씀에 따르자면, 육신의 욕망과 싸워야 합니다. “6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7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8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더 좋고 비싸고 맛있는 것, 나를 남들과 비교하여 더 돋보이게 하거나 우월하게 하는 것을 위하여 삶을 허비하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단순한 삶을 살라는 조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 좋은 것이 주어질 때도 있고, 좋지 않은 것이 주어질 때도 있지만, 그렇게 주어진 것에 불평과 불만을 쏟아낼 것이 아니라 오늘 주어진 것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삶이란 사실 쉽지 않습니다. 늘 비교하고 더 나은 것을 소유하라고 끊임없이 부추깁니다. 더 나은 것을 소유하지 못하면 실패자라고 또 불행한 삶이라고 광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계속해서 강조하며 말합니다. “9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10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더, 더, 더를 욕망하는 사람은 이 말씀과 같이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반드시 떨어지고 맙니다.’ 더 누리고, 더 소유하고, 더 축적하려는 마음은 성도를 파멸과 멸망에 빠트리고 맙니다.

바울은 이런 욕망의 핵심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과도 전혀 다르지 않은, 너무나 정확한 진단입니다.

전쟁도 돈 때문에, 환경파괴도 돈 때문에, 살인도 돈 때문에 벌어집니다. 세상의 존경과 인정도 돈 때문에 발생하며, 감사도 돈 때문에 발생합니다. 무엇이든 척도는 돈이 기준이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더 많이, 더 크게, 더 높이, 더 화려하게’ 이 끝없는 욕망의 중심에는 ‘돈’이 있습니다. 세상도, 교회도 어느새 그 질서 안에서 평가받고 있습니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를 나누는 기준도, 결국은 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도 돈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돈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누가복음 16:13)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돈, 하나님과 재물은 함께 섬기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을 들은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오늘 많은 교회와 성도에게도 이 말씀은 비웃거나 혹은 불가능한 일이라 취급되기도 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누가복음 16:15)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러한 것이, 예수님 생전과 지금이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들을 우리는 오히려 혐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부러워하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오히려 자신을 비하하고 절망하곤 합니다.

우리의 사고가 뼛속까지 사실은 돈을 숭배하고, 돈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고가 오늘 성도가 싸워야 할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이 세상의 부와 인정은 끝없는 욕망을 자극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것은 단 하나, ‘영생’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미래 보장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점입니다.

“11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 악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십시오.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생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대를 부르셨고, 또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영생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대를 부르셨고, 또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기가 막힌 선언입니다.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대를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이 선언은 예수님이 요한복음 6장에서 하신 말씀과 맞먹는 ‘기가 막힌’ 선언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까지 쫓아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조상들이 만나를 먹은 사실을 언급하며, 예수님에게 “주님, 그 빵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빵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육체적 욕망을 뛰어넘어 영적 생명을 제시하신 선언입니다. 먹을 양식을 구하던 군중에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양식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충격적인 전환입니다. 마치 오늘 우리에게 ‘돈을 내려놓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흐름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목표가 변해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13 나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훌륭하게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대에게 명령합니다. 14 그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그 계명을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돈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 예수님이 주신 말씀과 삶을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삶이 성도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삶을 살면서 부자들에게 경고하라고 말합니다. 돈을 좇고, 돈을 욕망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경고하라고 합니다. “17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18 또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고 하십시오. 19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

부자 되기를 갈망하고, 부자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부자들에게 명령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앞날을 위해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는 일인지, 어떤 삶을 살아야 참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확실히 말하라고 합니다.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

믿음의 선한 싸움은 결코 감정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선택, 매일의 습관, 작지만 일관된 결단으로 이어지는 싸움입니다. 더 높이 올라가려는 욕망 대신, 더 낮은 자리를 선택하는 훈련입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본능 대신, 더 많이 나누려는 마음으로 견디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뭐라고 말합니까? ‘이렇게 할 시간이 어디에 있어요!?’,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밥이 나와요, 떡이 나와요!’ 찬송으로 고백하는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는 다 거짓이요.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도 거짓 고백일 뿐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았던 교회의 모습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연스럽게 또는 쉽게 이루어진 결과물이 아닙니다. 사도들과 성도들이 끊임없이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무릎 꿇린 결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역시 끊임없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기에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교회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 줄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싸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았고, 싸웠고,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히려 세상보다 더 돈을 욕망하고 돈에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더 비상식적이고, 폭력적인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돈은 무엇과 연결됩니까? 삶의 안정과 연결됩니다. 인정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이 혐오스러워해야 하는 것들과 긴밀하게 연결이 됩니다.

이런 욕망과 싸우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고, 덜 소유하는 삶을 살게 되고, 육신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더 움직여야 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삶을 사는 이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건넵니다. “9 주님은 억울한 자들이 피할 요새이시며, 고난받을 때에 피신할 견고한 성이십니다. 10 주님, 주님을 찾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결단코 버리지 않으시므로, 주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주님만 의지합니다.”

왜 고난을 자처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수밖에 없는지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고난 가운데 주님께 부르짖을 때 피할 요새가 되어 주시며, 견고한 성이 되어 주십니다.

또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18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끝까지 잊혀지는 일은 없으며, 억눌린 자의 꿈도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19 주님, 일어나십시오. 사람이 주님께 맞서지 못하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저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십시오. 20 주님,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시며, 자신들이 한낱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알게 하여 주십시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이 일하시고 우리 안에 은혜의 힘을 부으시는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근육은 마지막 몇 회의 고통 속에서 자랍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 타협하고 싶은 그 갈등 앞에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순간이 바로 신앙의 근육이 자라는 자리입니다. 지금이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때입니다. 오늘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더 많은 것’이 아니라, ‘참 생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