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김하나 목사] 흩어진 생명, 모으시는 하나님 – 2025년 9월 28일

신명기 30장 1-5절, 골로새서 1장 3-6절, 누가복음서 12장 29-34절

서로의 안녕을 묻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워지는 시간들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서로의 평안을 더욱 간절히 바라며 인사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 옆에 계신 분들과 “평안을 빕니다.”라고 인사 나누겠습니다. 여러분의 평안을 빕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흩어짐’과 ‘모임’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를 흩어놓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불안이 우리를 흩어놓습니다. “오늘은 괜찮을까? 내일은 어떻게 될까?” 염려가 우리 마음을 흔들고 , 불신이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아올립니다. “저 사람은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우리는 누군가를 신뢰하기에는 너무 많은 상처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 문을 잠그고, 점점 더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편견과 아집이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다른 생각을 듣고 관찰하기보다 설득하는 것에 에너지를 집중하고, 조율하고 비켜서는 것을 고려하기보다 내 생각이 관철되지 않는 것에 집중합니다. 가족이 흩어지고, 친구가 멀어지고, 함께였던 공동체가 깨져버립니다.

관계보다 성과를, 과정보다 결과를 우선시하는 사회는 우리를 돌아보는 방법을 잊게 했고, 서로를 연결하는 방법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흩어짐을 구조화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모일 수조차 없게 만들어졌습니다. 돈이 없으면 그 모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학벌이 없으면 그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인맥이 없으면 그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소외와 배제, 혐오와 차별이 시스템이 되어버렸습니다. 반대로, 특권을 가진 사람들끼리는 단단히 뭉칩니다. 카르텔을 만들고, 그 안에 들지 못한 사람들은 영원히 바깥에 남겨둡니다. 어제 전교인 소통방에 공유된 마다가스카르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기후 위기로 인한 가뭄과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떠돌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생존을 위해 각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흩어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생명을 다시 모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도 놓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모으시고, 회복하시고, 자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는 바로 그 일에 함께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1. 끝까지 가도 다시 모으시는 하나님 (신명기 30:1-5)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의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백성을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긴 설교를 합니다. 그 설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땅을 돌보며 살아라. 그러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너희가 이것을 저버리면, 너희는 이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젠가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리 말합니다. “너희는 결국 흩어질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모세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너희가 하늘 끝까지 쫓겨가더라도…” ‘하늘 끝’은 어디입니까?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먼 거리입니다.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적인 거리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어떤 상황일까요? 고향을 떠나 난민촌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전쟁 때문에, 가난 때문에, 박해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낯선 땅을 떠도는 사람들입니다. 마다가스카르의 가족들처럼, 기후 위기로 인해 더 이상 땅이 그들을 먹여 살릴 수 없게 되어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사람들, 인류의 탐욕으로 축복의 땅으로부터 쫓겨난 동물들, 멸종의 위기에 선 식물들입니다. 경제적으로 나락에 떨어진 사람들, 빚더미에 앉아서 내일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계가 완전히 깨진 사람들, 가족에게 버림받고 친구들에게 외면당하고 사회에서 낙인찍힌 사람들이 ‘하늘 끝’에 있습니다. 돌아갈 길이 없어 보이는 상황,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 그것이 바로 하늘 끝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렇게 계속 말합니다. “그래도 네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돌아서면, 하나님께서 너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그리고 너를 흩으신 그 모든 곳에서 너를 다시 모으실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다시 모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찾아갑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 한 생명을 기억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는 어떠합니까? 우리 사회는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버립니다.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배제합니다. “너무 멀리 갔다, 이제 돌아올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하늘 끝까지 간 사람도 다시 모으십니다. 모두가 포기한 사람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회가 “넌 끝났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네게 다시 시작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신명기 30장 3절에는 히브리어 ‘슈브’라는 단어가 2번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돌이키다’, 즉 회개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돌아오다’, 즉 물리적으로 귀환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하나님이 백성에게 돌아오시는 것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방향,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서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돌아섭니다. 관계의 회복은 양방향, 상호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단지 어디론가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땅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땅, 이것은 단순한 공간이 아닙니다. 이것은 뿌리이고, 소속이고,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땅의 관계,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 이 모든 것이 함께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모으심은 이렇게 총체적입니다. 부분적이지 않습니다. 선택적이지 않습니다. 한 생명도 빠뜨리지 않고, 모든 관계를 회복하시며, 모으십니다. 마다가스카르의 흩어진 가족들에게도, 기후 난민들에게도, 쫓겨난 동물들과 식물들에게도, 성소수자들에게도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1. 흩어져 있어도 자라는 생명 (골로새서 1:3-14)

오늘 또 하나의 본문은 골로새서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이라는 곳은 어떤 곳인가요? 흩어지는 곳입니다. 자유를 잃는 곳입니다. 사람들과 단절되는 곳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들을 방문할 수도 없었고, 제자들을 직접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감사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런 상황에 무엇이 감사할까요? 복음이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이 복음이 여러분에게 이르러,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듣고 깨달은 날부터, 온 천하에서처럼 여러분 안에서도 열매를 맺고 자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열매를 맺고 자란다’는 표현을 주목해보겠습니다. 이것은 농사 언어입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집니다. 뿌리를 내립니다. 싹이 트고,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물론 농부가 물을 주고 돌봐야 하지만, 실제로 자라는 것은 씨앗 자체의 생명력입니다. 농부가 “자라라!”고 명령해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복음은 살아있는 씨앗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자라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흩어져 있어도, 복음은 자랍니다. 우리가 만날 수 없어도, 복음은 퍼져나갑니다. 우리가 연약해도, 복음은 강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갇히지 않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에 가본 적이 없지만, 복음은 거기에 도착해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골로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온 천하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거대한 로마라는 제국 곳곳에 작은 집들에 모여 있는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무리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직접 만날 수도 없고, 통신도 느린 이 상황에서 그들 모두에게 동일한 복음이 전달되고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같은 방향을 향하여 자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는 흩어져 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한 장소에 모인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교회는 흩어져 있어도 같은 복음의 생명으로 연결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흑암의 권세’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단지 개인의 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을 억누르는 모든 힘을 말합니다. 불의한 구조이자 차별하는 시스템입니다. 약자를 짓밟는 사회이고, 생명을 착취하는 경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기서 ‘건져내셨습니다’. 여러분 주목해주십시오. ‘건져내실 것이다.’가 아닌 ‘건져내셨습니다.’, 과거형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른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사랑의 나라, 정의의 나라, 평화의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살고 있기에 여전히 불의를 목격하고, 여전히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흑암의 시민이 아니라 빛의 나라의 시민이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살아가기로 결단하고 실천하는 신앙공동체입니다.

  1. 염려를 넘어 나라를 구하는 삶 (누가복음 12:22-34)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마지막 본문인 누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쉬운 말 같지만, 실제로는 정말 어려운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염려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염려하다’는 말의 헬라어 ‘메림나오’는 ‘생각을 분산시키다’, ‘마음을 나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산산조각 냅니다. 우리는 이것저것 걱정하느라 생각이 분산되고,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염려가 깊어지면 염려는 우리를 고립시킵니다. 내 생존이 급박하면, 나는 이웃을 돌볼 여유가 없습니다. 내가 불안하면, 나는 타인을 위협으로 봅니다. 염려는 공동체를 흩어놓습니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라 흩어진 개인들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까마귀와 들꽃을 보라고 합니다. “까마귀를 생각해 보라. 그들은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창고도 없지만, 하나님이 먹이신다.” 까마귀는 당시에 쓸모없는 새로 여겨졌습니다. 먹을 수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다고 취급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까마귀도 먹입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해 보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이 꽃 하나만큼 아름답지 못했다.” 들꽃은 오늘 피었다가 내일 시들어 아궁이에 던져질 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짧은 생명도 아름답게 입힙니다. 예수님은 까마귀와 백합화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생명도 돌보시는 분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누군가의 생명에 높고 낮음의 기준을 정해놓고, 보잘것없이 여길지 몰라도 하나님에게는 귀하지 않은 생명이 하나도 없으며, 그 생명을 보살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초대합니다. “오직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 그것은 어떤 나라입니까? 그것은 흩어진 사람이 모이는 나라입니다. 배제당한 사람이 환영받는 나라입니다. 억압받는 사람이 해방되는 나라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을 받는 나라입니다. 그것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입니다. 평화가 산들바람처럼 불어오는 나라입니다. 생명이 풍성하게 피어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나라를 구하라. 그것을 네 삶의 중심에 두라. 그것을 위해 살아라.

예수님은 구체적인 삶의 지침을 제시합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신 것일까요? 만약 청중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극빈자들이었다면, 이 말씀은 의미가 없습니다. 팔 것이 없으니까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네가 가진 것을 움켜쥐고 염려하지 말고, 오히려 나눠라. 그러면 너도 자유로워지고, 받는 사람도 염려에서 해방된다.” 누가복음 12장 34절(개역개정)에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따라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 내 보물이 통장 잔고라면, 내 마음은 거기에 매여 있을 것입니다. 만약 내 보물이 명예와 성공이라면, 내 마음은 거기에 매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 보물이 하나님 나라라면, 내 마음은 거기로 향합니다. 정의가 실현되는 것, 가난한 자가 해방되는 것, 피조물이 회복되는 것—이것이 내 보물이 된다면, 내 삶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매여 있는 것들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두 가지 기적이 일어납니다. 첫째, 나 자신이 자유로워집니다. 서로가 서로를 짓밟고 살아남아야하는 오징어게임 같은 세상 속에서, 상처받은 과거의 나로부터, 너무나도 간절히 원했지만 온전히 얻지 못해 눈물이 되어버린 누군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둘째, 받는 사람도 염려에서 해방됩니다. 그는 이제 생존을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함께 구할 수 있게 됩니다. 나눔은 개인의 선행이 아닙니다. 나눔은 흩어진 공동체를 다시 모으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나눔은 불평등의 구조를 허무는 실천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다리며 기적을 목격하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동역자로 초대되었습니다.

  1. 결론: 새로운 공동체를 향하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세 본문을 통해 한 가지 진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생명을 다시 모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끝까지 흩어진 자를 모으십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가운데서도 복음이 자라게 합니다. 하나님은 염려로 산산조각 난 마음을 다시 하나로 모으시고, 하나님의 모으심은 모든 생명을 포함합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땅도, 피조물도 함께 회복됩니다. 정의, 평화, 치유, 해방이 함께 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역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우리는 배제의 시대에 환대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독점의 시대에 나누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착취의 시대에 돌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품는 자들입니다.

불안, 염려, 불신, 갈등, 반목이 우리를 흩어놓으려 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네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너를 다시 모으리라.” 우리는 그 약속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살아가고, 증거합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하나님을 향해 돌이켰을 때, 하나님도 우리와 상호작용하여 우리를 향해 돌이켜 마주합니다. 우리가 자랄 때, 우리는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신뢰하고 나눌 때,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함께 응답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우리의 보물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백이 우리 삶 속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열매로, 사랑으로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