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 2025년 11월 16일
사무엘상 16장 1-13절, 시편 40편 5-10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성도의 평안은 매우 중요합니다. 평안은 믿음의 상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누리는 평안은 소유, 조건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소유나 조건이 평안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도는, 삶 중심이 또는 추구하는 바가 하나님이 아닌 소유와 조건에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가 될 뿐입니다.
또한 삶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일정하게 일어나는 밀물과 썰물의 자연 현상처럼 어떤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났다 사그라들었다 일어났다 사그라들었다 합니다. 일어날 일들은 일어날 수밖에 없기에 평안은 삶의 환경과도 무관합니다.
평안은 성도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신뢰하느냐에 따라 누릴 수 있는 마음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평안은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누구나 누릴 수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평안을 누리는 삶이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과 같은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괴로워하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리면 다시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인 이 평안을 저와 성도님들이 일상 가운데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읽은 사무엘상 16장의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칭송받는 다윗이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무엘을 통해 한낱 목동에서 왕으로 선택받게 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사울이 다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내가 이미 그를 버렸는데, 너는 언제까지 사울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냐? 너는 어서 뿔병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길을 떠나,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거라. 내가 이미 그의 아들 가운데서 왕이 될 사람을 한 명 골라 놓았다.”(1절)
사무엘은 사울이 이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빠져나갈 방법을 알려주시며 이새를 찾아가라고 재차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새를 제사에 초청하여라.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내가 거기에서 너에게 일러주겠다. 너는 내가 거기에서 일러주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라.”(3절)
사무엘 앞으로 이새의 아들 엘리압이 등장했을 때, 사무엘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시려는 사람이 정말 주님 앞에 나와 섰구나'(6절)
그런데 이때 하나님은 사무엘의 속 마음을 아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7절)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이 하나씩 지나가며 “이 사람이겠지”라고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겉모습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이렇게 일곱 명의 아들이 사무엘을 지나쳤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중심’ 히브리어 ‘레바브’라는 단어는 ‘내적인 마음 전체, 깊은 속’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존재 전체를 움직이는 가장 깊은 자리, 결정의 근원, 욕망과 분별의 자리, 누구를 신뢰하느냐가 드러나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신 이유는 그가 ‘잘생겼기 때문이거나, 풍채가 좋아서거나, 일을 잘하도록 영민하게 생겼거나, 성품이 좋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중심, 자신을 움직이는 가장 깊은 자리에 하나님이 계심을, 존재의 핵심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중심은 다윗의 삶 전체를 움직이는 동력이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울로부터의 끊임없는 핍박과 죽음의 고비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험난한 과정, 죽을 고비를 넘기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중심에서 밀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의 삶 중심, 너의 가장 깊은 근원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가? 정말 하나님이 네 삶을 결정하는 근원이 되고 있는가? 하나님이 삶의 중심인가?”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또는 많은 성도님의 희망 사항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 “환상을 보고 싶다.”, “음성이나 환상의 체험이 없어서 은혜가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한 번만 말씀해 주시면 제 삶도 바뀔 것 같습니다.” 등등
그러나 성경을 천천히 살펴보면 이 생각이, 이러한 희망이 틀렸음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여 주신 환상을 보거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가 고통스러운 삶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바울 등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환상을 보거나, 음성을 명확하게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을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은 이들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가장 고통스러운 길로 이끄시는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생활이 어려운 이유는 음성을 듣지 못하거나, 환상을 못 보기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온 삶을 하나님께 던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하나님께 두는 삶은 교육을 많이 받는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단 한 가지만을 깨달아도, 그 깨달음대로 하나님께 삶을 맡기는 이가 하나님께 ‘중심’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깨닫게 된 한 가지를 끊임없이 진실되게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창세기 12:1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음성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을 듣고 난 뒤에 온 것은 무엇입니까?
낯선 곳으로의 이주, 기근, 조카 롯과의 갈등, 전쟁 25년 동안 자녀가 없다가 낳았더니 그 자녀를 번제로 드리라는 요청 등.
아브라함은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평안한 삶을 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이전보다 훨씬 더 깊은 시련과 결단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모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 하나님의 임재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체험을 한 모세라면 평탄한 길을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이후 모세가 겪은 것은 고통, 갈등, 지도자의 무게, 백성들의 끊임없는 원망이었습니다. 바로 왕과의 치열한 대결, 홍해 앞 절망, 광야 40년의 불평, 결국 가나안 땅에 입성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환상, 음성, 체험이 신앙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을 때 고난 속에서도 신앙이 유지될 수 있고, 믿음이 굳건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왜 음성을 듣고 사람들은 무너질까요? 왜 체험이 있는데도 흔들릴까요? 성경과 역사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경험은 말합니다. 환상과 음성 뒤에도 절망이 오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비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결정의 중심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내려놓지 않은 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그 음성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망과 부딪혀 나를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가 아니라 방향 전환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은 대부분 내가 원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래서 ‘중심’이 비워있지 않으면 음성도 환상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심문관” 이야기가 있습니다.
16세기 종교재판이 극심하던 시대. 교회는 권력과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묶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시 땅에 내려오십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소녀를 일으키고, 고통받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사람들은 즉시 그분이 ‘예수’ 이심을 알아보고 따르기 시작합니다.
이때 예수 앞에 90세의 대심문관이 나타나 예수를 체포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을 잡아 가두는 사람은 이방인도, 로마 군인도, 무신론자도 아닙니다. 교회의 대표자인 대심문관입니다.
대심문관은 예수를 감옥에 가둔 채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왜 다시 오셨습니까? 당신이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1500년 동안 고생했습니다. 우리는 기적, 신비, 권위로 사람들을 다스리며 안전하게 해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오는 바람에 우리의 종교 사업이 모두 망가지게 생겼다.”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 저 스스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충격적입니다. 왜 종교 지도자는 예수님을 감옥에 가두었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되면 그들이 쌓아 올린 종교 시스템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민중들의 삶에 중심이 되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권력, 이익, 안전함, 구조가 와해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질문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있는가? 아니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예수님을 감옥에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겉모습만 신앙인일 뿐, 겉모습만 그럴듯할 뿐, 어쩌면 이 교회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결핍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감옥에 가두고 그럴듯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했을 때 그들의 문제는 뭐였습니까? 그들의 문제는 “왕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더 이상 왕으로 모시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들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밀어낸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는가? 누구를 주인으로 생각하는가? 삶의 방향과 결정을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가? 하나님은 이 자리, 우리 존재의 중심을 여전히 보고 계십니다.
다윗은 비록 막내였고, 평범했고, 인기가 없었지만, 그의 중심에는 오직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부르십니다.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의 ‘중심’ 때문입니다.
시편 40편의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40:8) 여기서 ‘마음 속’은 다윗을 부를 때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중심’과 단어가 같습니다.
시편의 기자는 말합니다. “주님은 제사나 예물도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번제나 속죄제도 원하지 않습니다.”(6절) 그럼 주님은 무엇을 기뻐하십니까?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뜻 행하는 성도를 즐거워하십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제 삶의 중심 되셔서, 나의 뜻, 나의 욕망, 나의 지식, 나의 경험대로가 아니라 고통스럽더라도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어도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겠습니다.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하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살아내는 성도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겉모습에 눈길을 주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이는 지와 상관없이 마음의 중심을, 존재의 근원을 보십니다. 행위가 아니라 동기를 보십니다. 결과가 아니라 신뢰를 보십니다.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로 돌려 드리십시오.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 우리 모두의 중심이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