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강미희 전도사] 고난과 신앙의 성숙 – 2022년 7월 10일

예레미야서 29장 4-14절, 시편 4편 5-8절, 사도행전 18장 24-28절

[불편한 소리]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지금 이 프로그램은 한 주제를 가지고 그 주제에 맞는 몇 명을 초대하여 그들의 삶 이야기를 듣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지만 이 프로그램의 시작은 두 명의 MC가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들과 인터뷰하며 서로 대화하는 형식으로 진행이 되었었습니다. 프로그램 초창기에 유명한 명언을 남긴 초등학생이 있었는데요. 한 MC가 “잔소리와 조언”의 차이가 뭔 것 같아요? 물었더니, “잔소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데, 충고는 더 기분 나빠요”라고 답하며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충고나 조언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라는 예언자도 이런 불편한 소리를 열심히 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환영받던 예언자는 아니었죠.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자가 아니었고, 하나님의 말을 전하는 예언자였기에 당시 사회에 불편하고 쓴소리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쓴 소리를 하는 예레미야를 비웃었고,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멀리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예레미야를 통해 사람들에게 계속 자기 뜻을 밝히셨고, 반복해서 예레미야를 통해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듣기에 좋은 말만 들었던 사람들은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인지 구별할 줄 몰랐고, 참 하나님의 뜻인지 어떤 것인지 분별할 줄 몰랐습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에게 듣기 좋은 말들만 골라 듣고, 당장의 변화와 손에 닿을 듯한, 짧은 시일 내에 이루어질, 거짓 희망을 주는 거짓 예언자들의 말을 가까이 하고, 예레미야의 충고를 듣고 그냥 넘겨버렸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말들로 잠깐 잠깐의 희망을 얻었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을 마주쳤을 때, 백성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을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절망과 마주할 때]

  예레미야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전했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바빌로니아로 끌려가게 됩니다. 오늘 예레미야서 본문은 기원전 6세기경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예레미야의 편지입니다. 이미 포로로 끌려갔던 상황이고, 포로로 끌려간 이들은 왕과 왕후, 궁중 관리자, 고관들과 기능공, 토공들이었습니다.

강대국의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스럽고, 희망을 잃어버린 듯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에 가지고 있던 가장 간절한 바람은 자신들이 다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당시 많은 예언자가 ‘곧’ 바빌로니아로부터 벗어나 그들이 다시 살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예레미야 역시 당장의 희망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겠지만,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그는 하나님이 맡기신 임무에 충실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전하는 예언자이기에 그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합니다. 당시 편지라는 것은 오늘날처럼 사적인 이야기의 전달 수단은 아닙니다. 공식적 문서이며, 그것을 받는 이들이 편지를 돌려보는 형식의 회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편지는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보낸 엘리사와 그마랴를 통해 전달되었고, 이 편지를 받는 이들은 장로들, 제사장들,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입니다.

  예레미야는 포로로 끌려간 자들에게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전했던 속히 올 희망에 대해 전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듣고자 하는 말은 곧 우리의 하나님이 자신들을 자신들이 살던 나라로 되돌아가게 해주겠다는 것이겠지만, 예레미야를 통하여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희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전한 것은 너희가 끌려간 그 바빌로니아에서 집을 짓고 정착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과수원도 만들고, 경작하여 그 열매를 따 먹으라는, 그곳에서의 생활을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또 그곳에서 자손을 낳아 번성하여 줄어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포로민들은 자신들이 끌려온 이 나라, 이 성읍이 평안하고, 번영하도록 하나님께 구하라는 요청을 듣고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평안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이 명령은 포로민들로 하여금 곧 돌아갈 수 있다는 헛된 꿈을 버리고, 이곳에서 정착하고 머무르며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편지에 나오는 말들은 철저하게 포로민들을 절망하게 만들고, 헛된 희망을 품지 못하게 합니다. 지금 이 시기에 하나님의 뜻은 때가 찰 때까지 끈질기게 버티고, 줄어들지 말고, 번성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 사람들은 이 이후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향이 아닌 낯선 세계에서 또는 낯선 자들의 지배 아래 살아야 할 경우에 거듭거듭 되살려 따랐던 가르침입니다.

[거짓 예언자들과 예레미야의 예언 –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이어지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은 포로민들을 더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포로민 가운데 있는 거짓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말고, 점쟁이들에게 속지도 말고, 꿈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듣지 말라고 합니다. 이들을 통해지는 말들은 아마도 오늘 예레미야 본문 바로 전 28장에 등장하는 거짓 예언자 하나냐처럼 곧 하나님께서 이 바빌로니아를 망하게 하고 우리를 조만간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 역시 예레미야와 같이 이 말들이 하나님이 너희에게 전한 말이라고 하며, 사람들에게 예언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포로민들의 입장에서는 이 예언자들의 말이 듣기 좋은 말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말의 현혹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나의 이름을 팔아서 거짓된 말을 전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그곳에 정착함으로써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이제 백성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말과 예레미야의 편지 사이에서 무엇이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삶의 아픔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자들]

  하나님께서는 왜 백성들에게 바빌로니아의 평안을 빌도록 하였을까요? 바빌로니아가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평안의 시기에는 잘 모르지만, 사회나 공동체가 위기나 혼돈, 분란이 있는 경우에는 기존에 유지되고 있던 질서들이 파괴됩니다. 이런 질서의 파괴, 혼돈의 상황은 기존에 권력을 가지고 있던 자들에게 혼란을 야기시킵니다. 왜냐하면, 질서가 유지될 때, 평안할 때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던 자들이 이 위기의 상황에서는 피해를 보고 더 이상 침묵하지 않으며 발언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기에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폭력의 방향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러면 이 기득권 세력은 희생양을 만듦으로 잠시 이 혼란을 잠재우려고 합니다. 그 희생되는 자들은 대부분 힘이 없어서 되갚을 능력이 없는 약자들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바빌로니아의 평안이 백성들의 평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명한 이 고난의 시기가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바빌로니아에서 70년이라는 시간을 다 보내면, 다시 너희를 너희가 있던 땅으로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 기간 동안 백성들을 향한 계획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알지만, 그 끝이 절대 재앙이 아님을 하나님은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까지 그 시간 동안 현실의 서러움과 절망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 절망 너머의 그분이 계획한 하나님 때의 희망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 시간이 결코 절망으로만 끝나는 시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의 성숙을 일으켜 줍니다. 사람들은 이전에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써 예루살렘과 성전이 앗시리아의 위협(산헤립)에서 벗어난 적이 있습니다(왕하 18-19). 이를 근거로 사람들은 하나님은 절대로 자기 성전을 그 어떤 적에게도 넘겨주시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겨나서, 누군가가 이에 반한다면 하나님 모독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포로의 생활은 성전 안에 갇혀있는 하나님이 아닌 그 백성이 찾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만물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만나는 신앙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끌려온 바빌로니아에서는 하나님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손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의 상황에서 그들만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고, 유대 사람들의 신앙 역사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어쩌면 삶의 변화와 신앙의 발전은 이런 고난과 함께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삶의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것을 놓지 않았던 자들은 멈추고 기다릴 줄 알았고, 하나님을 단지 나의 불편함, 아픔, 고통을 제거해주는 자로만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현실을 마주하고 멈출 줄 알고, 물러설 때를 배우고, 조급한 결정을 내리지 않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온전히 하나님 존재를 의식하며 자신의 신앙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아볼로_멈추지 않는 자]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아볼로라는 인물도 이처럼 자신의 신앙을 발전시켜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볼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름이죠. 사도행전뿐 아니라 신약성서 곳곳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아볼로의 위치는 신약성서에서 중요하게 평가된 것 같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태생이라고 밝히는데, 우리는 이 알렉산드리아에 대해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알렉산드리아는 상당한 지위를 누릴 만큼 명성이 아주 높은 도시입니다. 유대교 철학자인 필로의 고향이며, 오리겐과 같은 초대 교회의 교부들의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 중 알레고리해석이 있었는데, 그 해석의 본산지이고, 클레오파트라와 로마의 격전이 있었던 최후의 유산을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구약성경을 고대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이 만들어지던 곳이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공동체가 가장 번성했던 곳입니다. 그렇기에 이 알렉산드리아는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손색이 없고 높은 명성을 유지할 만한 대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 ;알렉산드리아의 출신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당사자가 학문적인 훈련을 제대로 받았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아볼로가 ‘알렉산드리아 태생이다.’라는 것은 그가 학문, 특히 성서의 지식 또는 해석에 정통할 수 있는 잠재성을 소유한 인물임을 잘 드러내 주는 수식어입니다. 이 표현은 ‘다소’ 출신의 바울과 견줄 수 있는 것으로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 아볼로를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그립니다. 또한 그는 이미 주님의 ‘도‘를 배워서 잘 알고 있었고, 예수에 관한 일을 열심히 말하고 정확하게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었는지는 설명이 없지만 아볼로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아는 자’라고 말합니다.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들도 있었는데 그도 그 부류에 속한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그 역시 유대교 회당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바울의 동료들 역시 이 회당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의 말을 듣고서 그를 따라 자신들이 더 알고 있는, 아볼로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더 알려줍니다.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았던 자이기에 성령세례와 성령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성취를 위해 행하는 역할에 관한 것들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성령의 체험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하나님의 도에 대해 더 자세하게 설명을 들은 아볼로는 이 둘을 만나기 전보다 더 발전된 주님의 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자기 삶을 한층 더 진보시켰습니다. 이제 그가 다음으로 가고자 하는 아가야에서 그가 전하는 주님의 ‘도’는 브리스길리와 아굴라를 만나기 전, 에베소 회당에서 전한 것보다는 더 발전된 상태로 많은 사람 앞에서 그리고 유대 사람들과 논쟁하며 예수가 진정한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였을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서 주님의 뜻을 찾고, 삶에서 신앙을 발전시키기]

  오늘 시편 기자는 고난과 분노의 때에 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주님을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을 각별히 돌보심을, 주님을 찾는 자들을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분노 가운데 죄를 짓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자를 기억해 주십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 불평하고 절망에 빠져 있겠지만, 주님께 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마음에 안겨주신 그 기쁨은 풍요를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클 것이고, 내가 눕거나 잠드는 모든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나에게 평안히 쉬게 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고난 가운데 절망에 매몰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절망의 너머에서 희망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절망 가운데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주님의 뜻을 잘 찾고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당장의 해결을 이야기하는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주님을 찾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삶의 순간에서 우리의 신앙을 발전시키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매일을 살아가며, 우리가 주님과 함께 만들어간 우리의 신앙을 더 발전된 모습으로 우리의 자손들에게 물려주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단지 우리의 위로의 대상, 나의 불편함을 해소해주는 자로 여기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획하신 모든 것들이 재앙이 아님을, 미래에 대한 희망이고, 우리의 믿음의 성장임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도를 전할 힘이 생긴다면, 그 매일의 신앙은 나의 잘남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우리의 신앙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모든 때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