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글: 한문덕 목사

목소리: 강미희 전도사

반주: 박지형 집사

23. 노아의 트라우마

노아는, 처음으로 밭을 가는 사람이 되어서, 포도나무를 심었다. 한 번은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서 아무것도 덮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었다. 가나안의 조상 함이 그만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았다. 그는 바깥으로 나가서, 두 형들에게 알렸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가지고 가서, 둘이서 그것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드렸다. 그들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렸다. 노아는 술에서 깨어난 뒤에,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고서, 이렇게 말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가장 천한 종이 되어서, 저의 형제들을 섬길 것이다.”(창세 9: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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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은 가나안의 조상이고, 셈은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노아가, 함이 천한 종이 되어서 셈을 섬길 것이라는 저주를 하였고, 그래서 사사기에 보면(1장 28절, 30절, 33절, 35절), 가나안 주민들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내어줄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강제 노동까지 하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저는 다분히 제국적이고 국수주의적 시각으로 오늘 본문을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특히 중동의 현대사에서 이스라엘이 저질러 온 만행을 보면 더더욱 이 본문을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노아에게 집중하고 싶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처음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왜 많은 작물 중에 포도나무를 심었을까요? 모든 생명을 구하는 사명을 띠고 의롭고 흠이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창 6:9)이 왜 포도나무를 심고 술에 취하여 자기 아들에게 저주를 퍼 붓는 사람이 될까요? 저는 여기서 하나의 상상을 해 봅니다. 2014년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제작했고, 러셀 크로우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노아(Noah)를 보고 느낀 것입니다만, 모든 생명체들의 죽음을 목도했던 노아의 트라우마가 오늘의 본문을 낳은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사는 우리가 제정신으로 살기 쉽지 않았듯이, 노아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방주만을 기억하고 싶어 하지만, 수많은 생명체들이 죽음의 홍수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그 아비규환의 생지옥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노아가 어찌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을까요? 노아 덕분에 새로 태어난 인류는 노아의 트라우마를 치유해 주어야 합니다. 그의 부끄러움, 죄책감, 그 엄청난 고뇌와 혼돈을 알았다면, 그의 벌거벗은 존재를 배려하며 그의 아픔을 부드럽게 감싸 주었어야 합니다. 오늘 함에게 쏟아져 내린 저주는 트라우마의 흔적임을, 그것을 까발리는 자에게 내려진 분노의 찌꺼기일 것입니다. 기도 : 생명의 하나님!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을 지니고, 우리의 역사 속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생명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유가족들을 기억하고, 남겨진 상처의 치유를 생각합니다.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쌓인 한(恨)을 풀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