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글: 한문덕 목사

목소리: 이준일 장로

반주: 박지형 집사

43. 신앙의 신비와 깊이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곳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 놓았다. 그런 다음에 제 자식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 놓았다.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창세 2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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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를 읽어가다가 여러 군데에서 멈추어야 하지만,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 앉고 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설익은 사람들이야 이 본문에서 ‘여호와이레’를 들먹이며 하나님께서 미리 다 준비하셨고, 아브라함도 그럴 줄 믿었다고 뇌까릴지 모르지만, 이 장면에서 숨이 막히지 않으면 성경을 헛 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앙이란 어줍지 않은 자기 신념이 아닙니다. 머리로 금방 이해되고, 깔끔하게 설명되는 것도 아니며, 쉽게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평생의 짐이며 계속되는 고뇌이며 몸서리치는 일종의 강박, 영원한 딜레마, 끝내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이고 늪입니다. 초월적 존재와 맞닥뜨리는 사건이란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인간의 인간됨이 그 근원으로부터 의문에 붙여집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은 무엇이며, 자식됨은 무엇이며 부모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칼을 들었을 때, 이삭의 눈을 쳐다보았을까요? 이삭의 눈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이삭은 칼을 들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을까요? 아버지의 얼굴에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이삭은 신앙의 깊이를 깨달았을까요? 이 때 하나님은 그 자리에 정말 계셨을까요? 제단을 쌓고 장작을 벌려 놓은 그 시간의 길이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을 때, 정말 이삭은 아무 말도 어떤 몸부림도 없었던 것일까요? 아들을 잡으려는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육신의 아버지를 죽여야만 하늘의 아버지를 만나는 것일까요? 육신의 아들을 잡아야만 생명의 근원에 다다르는 걸까요? “‘제나’가 죽어야 ‘얼나’가 살아 난다”고, 다석 선생은 말하셨다는데 죽는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정신은 몸을 넘어서는 건가요? 몸의 자식인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정말 무엇일까요? 정작 우리네 삶의 질곡에서 하나님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오늘 이야기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요?

기도 : 하나님, 대답 없는 삶 속에서 답 없는 물음을 던집니다.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우리는 그저 덜덜 떨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우상을 깨뜨리게 하시고, 알 수 없는 미래로 자신을 던지는 모험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소서. 허우적대더라도 거기가 주님의 바다임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