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글 : 한문덕 목사

목소리 : 송실 전도사

반주 : 박지형 집사

69. 누명

하루는 요셉이 할 일이 있어서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 종들이 집 안에 하나도 없었다. 여인이 요셉의 옷을 붙잡고 “나하고 침실로 가요!” 하고 졸랐다. 그러나 요셉은, 붙잡힌 자기의 옷을 그의 손에 버려 둔 채, 뿌리치고 집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여인은, 요셉이 그 옷을 자기의 손에 버려 둔 채 집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 집에서 일하는 종들을 불러다가 말하였다. “이것 좀 보아라. 주인이, 우리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이 히브리 녀석을 데려다 놓았구나. 그가 나를 욕보이려고 달려들기에, 내가 고함을 질렀더니, 그는 내가 고함지르는 소리를 듣고, 제 옷을 여기에 내버리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창 39:11-15)

=======================

오늘 이야기에서 요셉이 누명을 쓰게 되는 결정적 증거는 바로 요셉의 옷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옷이라는 단어가 유독 반복됩니다. 요셉의 옷은 요셉 이야기의 첫 머리에 등장합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화려한 옷을 지어 입혔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그 옷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아들이라는 징표가 되었고, 그래서 형들의 미움을 사는 인간이 됩니다.

며칠 뒤 요셉의 옷은 숫염소의 피로 물들게 되고, 아버지 야곱은 그 옷을 보고 요셉이 사나운 들짐승에게 찢겨서 죽은 줄로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옷은 이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고 보니 그를 유혹할 때 그 여성은 요셉이 아니라 요셉의 옷을 붙잡았네요.

가만 생각해 보면 요셉은 요셉의 옷이 아닙니다. 요셉은 언제나 요셉 그대로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꾼 꿈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을 뿐이고, 요셉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대로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갔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요셉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요셉을 보지 않고 그의 옷을 보고 그를 미워하고, 그가 죽었다 생각하고, 그가 주인을 배신하고 주인의 아내를 능욕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오해와 누명을 쓰고 살아가는 걸까요? 또 누군가에게 얼마나 많은 누명을 씌우며 살고 있는 걸까요?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옷을 보고 말이지요. 또 살다보면 본인의 진심과 행동은 그렇지 않았음에도 모든 상황이 어쩔 수 없이 누명을 쓴 대로 밀려가 옴짝달싹 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요셉처럼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의지할 수 있을까요?

누명을 쓸 때처럼 억울한 마음이 들 때가 없지요. 그러나 때로 누명조차도 묵묵히 받아 들여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 또한 삶이니까요!

기도: 신비의 하나님! 우리는 주님의 크기를 알지 못합니다. 주님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높이를 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도 모르고, 나 자신도 모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그 깊은 신비도 모릅니다. 그러니 주님! 때로 누명을 통해서라도 인생의 깊은 자리를 맛보게 하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