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안규식 목사] 불가능성의 가능성 – 2022년 12월 11일

이사야 62:10-12 / 요한복음 1:23-28 / 히브리서 11:38-12:2

[인사]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세 번 째 주에 생명사랑교회 성도님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말씀을 전하기 전에 제가 하고 있는 위탁교육과정과 생명사랑교회에서 하는 신학세미나에 대해 잠깐 이야기 해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가 되기 위해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교단위탁과정을 이수하고 있습니다. 이번 달 말이면 그 과정이 끝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저는 기장의 훌륭한 전통과 신학을 배우고, 많은 교수님들과 목회자분들 그리고 대학원 원우들과 교제하고 배울 수 있는 특별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한국교회에 탁월한 목회자를 배출하기 위해 기도와 뜻을 모아 도와주신 생명사랑교회 여러분들과 한문덕 목사님의 섬김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깊이 감사드리며 여러분들의 기도와 뜻처럼 저 역시 탁월한 목회자로 서기 위해 정진하겠습니다. 또한 저는 생명사랑교회에서 신학세미나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한문덕 목사님, 부목사님들과 함께 신학을 공부할 뿐 아니라, 목회현장과 사역, 한국교회와 사회에서 그리스도교 복음이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있습니다. 저 역시 전도사, 목사로 사역하면서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은 한 사람의 목회자가 온전히 설 때, 그 교회가 온전히 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는 목회자의 위기입니다.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목회자가 복음 앞에 바로 설 때, 한국교회 역시 변화할 것입니다. 이 일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이번 주일은 교회력으로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기간이면서도, 우리 교단이 정한 성서주일이자 인권주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읽은 본문들을 통해서 기다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 말씀 –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다림을 준다]

  첫 번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다림을 준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기다림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무척 기대되고 흥분되는 일입니다. 취업을 위해 입사원서를 내거나, 대학이나 대학원에 입시원서를 내는 등 중요한 일을 시작한 분들은 그 결과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릴 것입니다. 또 지금 쯤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믿는 순진한 아이들은 곧 있을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산타가 줄 선물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초등학교 1학년 때가 생각납니다. 당시 저는 ‘태권브이라는 로봇 장난감을 가지고 싶었고, 수시로 부모님께 내가 받을 선물은 태권브이이니 산타에게 꼭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었을 때, 일어나자마자 저는 아침에 제 머리맡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머리맡에 태권브이 로봇은 없고 레고와 맘모스빵, 그리고 태권브이 주제곡이 녹음된 카셋트 테이프가 있었습니다. 사실 레고가 그 장난감보다 훨씬 비싼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날 저는 산타에게 분노하지 않고 부모님에게 분노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시는 분들은 대략 제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그 당시의 저의 기다림의 시간에 있었던 간절함과 기대, 긴장이 뒤섞인 마음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그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며, 동시에 그것을 이미 나에게 주어진 것처럼 소유하고 기뻐하고 누립니다. 이처럼 기다림이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주어진 것 사이에 있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입니다. 아직 내가 가질 수 없어 불가능한 것이지만, 이미 우리에게 가능성으로 주어져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면 그것은 불가능하지만 이미 가능한 것으로 나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 속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이미 가능한 것 같지만 아직은 불가능한 것이기에 긴장이 있는 것입니다. 이 긴장이 때로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더 나아가 포기하게 만듭니다. 결국, 기다림이란 불가능의 가능성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기다림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이사야 62장 10절부터 12절까지를 보면 그러합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본문이 제2의 이사야가 기록한 것이라 주장합니다. 이사야 1장부터 39장까지가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말씀을 전한 기원전 8세기 이사야 선지자의 기록이라면, 나머지 40장부터 66장까지는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인 기원전 6세기의 어떤 예언자 곧 ‘제2의 이사야’로 불리는 예언자의 기록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사야서의 본문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말하자면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말씀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황에 처한 유다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유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는 이미 오래 전에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에 관한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 말씀과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는 현실 사이에 놓인 커다란 간극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예루살렘과 시온의 영광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악한 이방민족들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이들에 비해 하나님의 백성은 굴욕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아마도 오래 지속된 포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거나 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낙심 속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본문 이사야 62장 10절에서 12절입니다. 이 본문을 저는 이렇게 표현해 보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앞으로 더 나아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밖으로 나아가라. 그렇게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준비해라. 네 믿음의 눈을 들고 바라보아라. 주님이 일하시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너의 구원자가 지금 너에게 오고 있지 않느냐. 너에게 주어질 구원과 상급이 여기 있다.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주님의 것이다.’ 요약하자면, 약속과 현실 사이에서 낙담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를 촉구합니다. 힘을 내어 나아가라는 것 그리고 바라보아라는 것입니다. 이제 유다인들에게 예루살렘의 영광, 하나님의 구원, 열방의 빛으로서의 부르심이라는 불가능성의 말씀은 기다림이 되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 기다림은 가능성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유다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완성해 갔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다림을 주고, 그 기다림은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꾸어 갑니다.

  만약 여러분이 유다 백성들이었다면, 오랜 포로 생활로 인한 낙심 속에 있던 사람들이었다면 이 말씀이 어떻게 다가왔겠습니까? 바로 기다림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비록 현실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구원과 회복과 영광의 가능성으로 이끌어갔을 것입니다. 머물러 있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고,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회복,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기다림을 줍니다. 그 기다림은 불가능의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이 우리를 불가능성에서 가능성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두 번째 말씀 – 우리의 불가능성은 가능성을 위한 조건이다]

  두 번째 말씀입니다. 우리의 불가능성은 가능성을 위한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언제나 즐거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19세기 프랑스 소설가, 빌리에 드 릴라당이 쓴 단편소설의 제목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처럼, 기다림은 희망고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랜 기다림 속에 여전히 불가능한 현실을 경험하며 혼란스럽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더 나아가 포기하기도 합니다. 특히, 오늘날 정의와 용서, 그리고 평화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담론들 중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정의는 많은 사람들이 불공정과 불평등을 겪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불의함의 큰 힘은 과연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지를 묻게 합니다. 용서 역시 불가능해 보입니다. 때로는 우리는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도,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는 것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는 용서해야 하고 용서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기에 기도의 영역입니다. 마지막으로 평화입니다. 인류 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적 없었고, 우리가 사는 모든 곳에 갈등과 대립이 존재합니다. 온전한 평화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처럼 정의와 용서, 평화는 우리에게 불가능의 영역으로 경험됩니다. 그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만 오랜 기다림 속에 우리는 실망하고 포기합니다. 그런데 이런 불가능성이 꼭 비극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오늘 읽은 요한복음 1장 19절에서 28절을 보면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곧 오실 메시아를 위한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는 사람들에게 불의한 삶을 청산하고 곧 오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준비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는 정의와 공의,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말과 삶을 통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올 그리스도인지 묻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통해 진정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가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탐욕적이고 위선적인 유대인 종교지도자들, 유다 민중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잔인한 로마의 군인들, 그리고 이들과 비열하게 야합한 유대인 지도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마도 세례 요한 역시 자신이 꿈꾸던 그 새로운 세상이 왔음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는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힙니다. 그것도 어이가 없이 권력자의 불륜을 비난한 것 때문에 옥에 갇힌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 안에서 무엇을 경험했을까요? 감옥에서 그는 자신이 꿈꾸던 세상이 불가능함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세상과 단절하여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온 자신에게 주어진 결말이 고작 권력자의 불륜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임을 알았을 때 그는 절망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지난 모든 삶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메시아 예수에 대한 의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분명 그 사람이었는데. 분명 성령이 그에게 임했는데.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확신했는데. 자신은 여전히 차가운 감옥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묻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세례 요한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의와 심판의 불가능성을 경험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분명 자신의 한계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왔던 신념이 무너졌고, 지난 자신의 삶이 부정되었습니다. 지금 그의 눈에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은 불가능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세례 요한과 같은 경험을 합니다.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일구고 그 믿음대로 살아온 사람일수록, 변화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는 현실에 처할 때 그 충격은 더 큽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있던 시절 예수님은 그의 기대였고, 기도였고, 기다림이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 있는 지금 예수님은 그의 걸림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을 가장 괴롭힌 사람은 헤롯도, 종교지도자들도 아닌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가 오셨다면 자신의 정의와 심판이 이 세상에 임하고, 새로운 세상이 왔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예수님은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이런 답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리고 그는 얼마 되지 않아 처형당하고 맙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세례 요한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평하길,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가장 큰 인물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는 율법에 있어서 가장 큰 자였지만, 복음에 있어서는 가장 작은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죄인을 심판하고 벌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전부라고 알았지, 못 보던 사람이 보고,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고, 못 걷는 사람이 걷는 회복과 용서와 긍휼의 하나님 나라는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가 생각한 메시아는 지금 당장 세상을 심판해야 했고, 자신과 같은 의인들이 통치하는 나라를 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한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오히려 그는 이러한 한계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고민합니다. 사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이전까지 그는 예수가 진정 누구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예수는 걸림돌이었던 것입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냐고 묻는 그의 불가능성의 고백이야말로 그가 진정한 가능성을 발견했음을 반증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의 한계와 무너짐이라는 불가능성은 새로운 가능성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총입니다. 율법을 모르면 복음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지 못하면 용서를 알 수 없습니다. 나의 한계를 알지 못하면 그것을 뛰어 넘는 가능성도 알지 못합니다. 나의 무능을 모르면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처럼 예수가 걸림돌이 될 때, 우리는 예수가 누구인지 아는 길에 있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정의와 용서와 평화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가 정의를 위해, 용서를 위해, 평화를 위해 나아갈 때, 특히 하나님 말씀 안에 있을 때, 분명 불가능성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정의와 용서와 평화를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가능성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불가능성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불가능성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기다리며 더욱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불가능성은 가능성의 조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불가능성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세 번째 말씀 –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상상력을 주어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꾼다.]

  세 번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상상력을 주어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언제나 우리의 상황을 능가하는 상상력을 줍니다. 그 상상력이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이 주는 상상력으로 인해 결단하고 헌신하고 참여하는 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1장 38절에서 12장 2절을 둘러싼 본문 전체를 보면,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자신이 가진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상상력으로 인해 고통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불가능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불가능한 약속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가능하게 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성서 주일이면서 인권 주일입니다. 오늘날 정의와 평등을 위해 헌신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약자와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서 세상의 부조리한 힘에 맞서 싸우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처럼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믿음은 인정받지만 약속된 것을 실제로 받는 경우가 드뭅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것의 상상이 주는 은총은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세상을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어디서 나올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실, 더 나은 세상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이나 무지가 아니라 바로 상상력의 빈곤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지 못합니다. 이 상황이 가장 좋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선지자를 박해했던 사람들의 공통적 특징은 이들이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상상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 했을 때, 이들은 두려워하고, 이 두려움이 타자를 향한 폭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상력의 빈곤은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상상력을 깨우고, 불가능성을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새로운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고 세상은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으며 – 이미 주어진 가능성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세 가지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다림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은 불가능성과 가능성 사이에 기다림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둘째, 우리의 불가능성은 가능성을 위한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불가능성을 고백한다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라는 가능성을 위한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상상력을 주어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꿉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새로운 세상을 향한 상상력을 일깨우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미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저는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도의 가능성, 연대의 가능성, 은총의 가능성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이미 우리보다 앞서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기도에 우리가 참여하는 게 기도입니다. 우리는 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불가능성을 경험합니다. 인간의 죄성이 낳은 폭력과 거짓, 차별과 배제, 거대한 악의 구조 앞에서 우리는 무기력합니다. 그러나 그 무기력을 경함한 사람들이 서로 연대한다면 거기서 새로운 공동체라는 가능성이 주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거기서 겨자씨처럼 시작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는 이미 주어진 은총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미 용납 받았고, 용서 받았고, 사랑 받았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 안에서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말씀으로 우리에게 기다림의 소망을 주시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총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정의와 용서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기도와 눈물과 노력 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께서 이미 주신 기도의 가능성과, 새로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는 연대의 가능성과, 이미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은총의 가능성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루는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