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육성한 목사]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 2021년 11월 28일

역대지상 29장 14-19절, 고린도전서 10장 23-33절, 시편 121편 1-8절

[대림절의 시작]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오늘부터 성탄절까지 약 4주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탄생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를 보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처한 상황이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려야만 하는 어두운 현실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림절은 우리의 한계와 아픔을 내어놓고,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하실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선물하시는 구원은 우리의 지금까지의 삶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절기 동안 새로움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삶 속에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이 세상을 궁극적으로 완성하시는 그분의 시간을 기다리며 기대와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많은 기다림의 시간을 보냅니다.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일 때도, 대중교통을 탈 때도, 누군가를 만날 때도,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도 우리는 항상 기다립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이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시간이 경제적 가치로 여겨지고, 기다림은 돈을 허비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은 일상이지만 이 기다림은 바라는 목적을 얻기 위해 인내하고 견뎌야 하는,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많은 교회가 대림절의 의미를 충분히 묵상하지 않고 성탄절을 준비하는 기간 정도로만 여기는데, 이것은 기다림을 줄이고자 하는 지금 우리 사회의 인식과 다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화물을 찾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는 민원에 시달리던 미국의 한 공항이 있었습니다. 평균적으로 수화물을 찾는데 8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공항 측은 민원을 해결해보고자 수화물을 담당하는 직원을 늘려서 2분의 시간을 단축합니다. 그럼에도 민원은 그치지 않습니다. 공항 관계자들은 발상을 전환합니다. 수화물을 찾는 곳을 오히려 걸어서 6분이나 걸리는 거리로 멀리 이동시키는 해결책을 내놓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걸으면서 6분의 시간을 보내고, 이후 2분 정도만 기다리면 수화물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요된 시간은 똑같이 8분이지만 민원은 사라졌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그 시간을 의미있다고 느낄 수도 있고, 지루하고 허비하는 시간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에 들어섰습니다. 우리는 늘 기다림을 줄이고 싶어 하지만 모든 의미있는 순간의 뒤에는 기다림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맞이하는 그 순간의 기쁨도 달라집니다. 4주간의 대림절, 기다림의 절기를 우리가 의미를 잘 묵상하며 보낸다면 대림절 그 자체로도 값진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성탄의 기쁨도 더 해질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이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자 합니다.

[비울 때 보이는 것들]

교회뿐만이 아니라 세상도 기대와 설렘, 기쁨으로 연말을 맞이합니다. 거리 곳곳은 화려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장식들로 꾸며지고, 각종 행사와 모임으로 거리는 붐비고,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공연들도 막을 엽니다. 블랙프라이데이(BLACK FRIDAY)라고 불리는 대대적인 할인 기간도 연말의 재미 요소인데, 이 기간에 사람들은 그동안 갖고 싶었던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하기도 합니다. 저도 SNS나 인터넷에 들어가면 블랙프라이데이 할인 광고에 멈칫하기 일쑤입니다. 한 해의 수고를 격려하고, 즐거움을 누리고,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이런 시간이 우리에게도 필요하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이 연말은 우리 사회의 소비주의 문화가 가장 힘을 발휘하는 때이자,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시기입니다. 파격과 합리라는 말로 우리 삶에 많은 물질을 채우도록 하고, 수많은 모임은 우리 삶을 풍성하게 만족시켜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 연말의 시기를 정신없이 채움의 시간으로 보내다 보면 우리가 잊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와서 우리를 채우는 것은 대부분 우리를 풍성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곤한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눈가림하는 그림자일 때가 많습니다. 내가 원하고, 나를 위해 채워왔던 것이 나의 진정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옷 한 벌을 사더라도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 고민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채우고자 하는 것들이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온 나의 욕구가 아니라 이 사회나, 국가, 자본이나,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가지게 된 욕망이 나의 내면에 깊이 스며든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역대지상의 말씀은 다윗의 아름다운 감사 기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서 온 힘을 기울여서 준비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29장 말씀의 앞 절인 2절에서 3절 말씀을 보면 다윗은 성전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금과 은과 동, 철과 목재, 수많은 보석을 아낌없이 내어놓습니다. 각 가문의 장들과 이스라엘 각 지파의 족장과 천부장 백부장과 왕실 관리자들까지 아낌없이 자신의 재산을 성전 건축을 위해 드립니다. 백성들과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께 기꺼이 바치게 된 것을 기뻐하였고, 그리고 다윗은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서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바치게 된 것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성전을 위해서 바친 것들이 모두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드리는 것도 주님의 것이라는 놀라운 고백을 하며 아름다운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감사 기도 속에 어둠과 슬픔의 언어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15절 말씀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조상처럼, 나그네와 임시 거주민에 불과하며, 우리가 세상에 사는 날이 마치 그림자와 같아서,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성서학자들이 탄식시나 애가의 특징으로 구분하는 ‘나그네’, ‘임시 거주민’, ‘그림자와 같아서’와 같은 어휘들이 눈에 띕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기도에서 이러한 슬픔에 언어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역대기서가 쓰인 시대적 상황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윗의 아름다운 기도를 써 내려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고단했던 바벨론 포로생활은 끝났지만, 다시 페르시아의 지배하에서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벨론보다는 견딜만 했지만, 여전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종속되어 있다는 것은 마음에 한이 맺히는 일이었습니다. 포로 생활을 끝내고 유대 땅으로 돌아왔지만, 성전은 파괴되었고, 가난은 계속되었습니다. 국가를 다시 일으킬 사람들도 부족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제사는 온전히 드려지지 못했고 이방 족속과의 통혼으로 인해 지켜오던 야훼 신앙은 계속해서 약화되었습니다.

가진 것도 없는 나그네와 같은 처지, 주권을 강대국에 빼앗겨 언제 또 지금의 땅에 쫓겨날지 모르는 임시 거주민에 불과한 처지, 물질적 가난과 영적 가난에 허덕이는 그림자와 같은 상황이 오늘 15절 한 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두운 처지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놀라운 신앙을 보게 됩니다. 수많은 소유와 욕망, 기대와 희망까지도 모두 내려놓게 되는 상황을 마주한 이들은 더 깊은 곳을 보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누리고 가져왔던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음을 고백합니다. 가진 것이 모두 주님 것이라고 고백하며 자신들을 내려놓고 비워냅니다.

그리고 이제 이들은 새로운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자신들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갈망, 자신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이 성전을 짓는 과업을 맡을 솔로몬을 위해 하는 기도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다윗이 하는 기도의 핵심은 아들 솔로몬이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짓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가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주님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살길 바라는 갈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에는 주님께서 오시길 바라는 갈망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고 싶은 열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런 진실된 갈망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갈증을 자꾸 다른 것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내면의 갈망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내면을 비워내야 합니다.

다가오는 새로움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시작하며 우리는 각자 자신의 내면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우리 내면의 진정한 갈망을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차분히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내려놓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 말씀에서 바울 사도께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언가를 비워내길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에서 고린도교회는 한가지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그것은 이방신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신전에서 베푸는 축제와 잔치는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평범한 행사였습니다. 신전이나 성소는 제의를 위한 장소와 대중에게도 공개되는 뜰과 여러 식당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그런 장소에서 제공되는 식사 자리에 초대받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또 시장에 나오는 질 좋은 고기는 우상 앞에 바쳐졌던 것이 많았기에 식사를 대접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기를 구매해서 잔치를 준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율법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은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을 수 없었기에 신앙과 현실의 갈등이 생깁니다. 잔치에 초대받아 음식을 거절하는 일은 아주 무례한 일이었고 또 식사는 사회관계망과 지위와 연결되는 문제였기에 더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가운데서는 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가 그냥 고기일 뿐이라며 먹는 것이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율법에 따라 그것이 신앙을 저버리는 것으로 판단하고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기본적인 입장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도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인데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처럼 시장에서 파는 것은 출처를 묻지 말고 먹고,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도 양심에 거리낌을 느끼지 말고 먹으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 사도는 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무엇이 더 덕을 세우는 일이고, 무엇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가입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이 이성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신앙적으로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말라고 합니다.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자기 권리와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그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철저하게 타자를 위해 살아가며 구원을 선물하는 삶.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삶이자 그리스도교의 진리인 것입니다. 내 신념과 진리에 대한 확신까지도 내려놓고 나를 비워내고 오히려 약해 보이는 타자와 같이 되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에도 지금 우리의 삶의 방식과도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제국은 타자를 정복하고 빼앗고 약한 이들의 것을 비워버립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앉고 자신의 욕망을 쏟아 버립니다. 남의 자리를 빼앗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채우는 것이 제국의 질서였던 것입니다.

군사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아주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고린도 지역은 뺏고 빼앗기는 제국의 힘겨루기 속에 이런 질서를 몸으로 습득할 수 있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른 삶을 제시합니다. 다른 사람을 죽여야 내가 사는 제국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약한 타자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타자 살인의 질서를 거부하고, 나를 내려놓고 오히려 타자가 되는 삶. 내 품을 내어 타자를 수용하는 삶. 우리는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경청을 통한 내려놓는 훈련]

물론 우리는 결코 타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타자를 배제하려고 하는 우리 사회의 풍조에 안주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나를 비워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서로 대화를 나누는 다양한 모임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목사님이 설교에서도 언급하셨던 청년 독서 모임, 최근에 시작한 석류나무회에서 주관하는 사도신경 모임, 권사회에서 주관하는 화요기도모임, 그 밖에 각 신도회 모임 등 일상과 신앙을 주제로 서로 생각을 나누고 대화하는 모임이 계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상황에도 거의 멈추지 않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계속 지속되어 왔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다양한 대화의 자리가 자신을 내려놓는 훈련을 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종종 독서 모임이나, 교육부에서 대화 모임을 인도하게 될 때 가장 먼저 하는 순서는 이 모임 안에서 약속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 대화의 자리에서 내가 안전함을 느끼려면, 즉 진심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함께 나누고 지켜야 할 약속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누는 대화는 사실 나의 진심을 솔직하게 내어놓기보다 나를 보호하는데 급급한 대화일 때가 많습니다. 누가 내가 하는 말을 나쁘게 평가하지는 않을지, 내 진심을 알아주지 않고 섣불리 판단하지는 않을지 고민하고 염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화려한 말들로 솔직함을 감추기도 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를 향해 날 선 말들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타인에게 받아들여진 경험이 없기에 우리는 자꾸만 나를 감추고 다른 것으로 채우고 꾸미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만남과 대화는 달라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만남이어야 합니다. 나의 이야기만 하기 바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를 깊이 들어주는 대화여야 합니다. 상대의 이야기 속에서 그 사람의 아픔과 어둠을 발견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경청하는 그런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대화 모임에서 약속을 정할 때 가장 먼저 제안하는 것들입니다.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온전히 귀 기울이기’, 그리고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기’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다른 사람 이야기에 온전히 경청하지 못합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도 수많은 판단이 올라옵니다. 자신이 가진 신념과 기준으로 사람을 재단하려고 합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자 하는 욕망이 끊임없이 올라옵니다.

우리는 이런 자신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는 이의 이야기를 온전히 경청하고, 판단과 비난의 마음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들어보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듣는 훈련임과 동시에 나의 욕망을 흘려보내는 훈련입니다. 누군가를 통제하려는 욕망, 위에 군림하려는 욕망, 증명하고 싶은 욕망, 누군가를 바꾸고자 하는 욕망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을 흘려보내고 타인을 대할 때,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할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우리 내면의 넓어진 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대화는 이렇게 자신을 비워내고 타인을 수용할 품을 넓혀가는 훈련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신뢰의 토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말씀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는 순례길에서 부르는 노래였지만 이 시편은 하나님 백성의 인생 전체 여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인생의 여정을 인도하는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에 대한 온전한 신뢰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확신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를 할 수 있는 용기도, 인생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용기도 얻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께서 걸음을 지키시고, 졸지도 않고 지켜봐 주시고, 보호하는 그늘이 되어 주시니 시인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영원히 주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신뢰가 그의 삶을 지탱합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워내고, 내려놓기 위해서는 든든한 신뢰의 토대가 필요합니다. 그 신뢰에 토대는 오로지 하나님뿐입니다. 오늘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를 구원하는 진정한 도움은 오로지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영원까지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를 온전히 맡기고 내어드릴 수 있을 때, 우리를 채우고 있는 헛된 욕망을 비워낼 용기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워냄으로 넓어진 그 품을 세상을 향해 내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림절을 시작하는 오늘, 우리 다시 새로움을 받아드릴 준비를 합시다. 우리 안에는 주님이 오시길 바라는 간절한 갈망이 있습니다. 헛된 욕망을 비워내고 내 안의 진정한 갈망을 발견합시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분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수용할 준비를 합시다. 나를 비워내고 한없는 하늘의 사랑으로 내 안을 채웁시다. 타자를 향해 내 삶의 안 자리를 내어주는 삶을 기쁨으로 만들어갑시다. 우리가 대림절을 그렇게 소중한 하루하루로 보내고 주님이 오실 그날을 맞이했을 때, 지난날의 두려움과 아픔, 모든 어둠을 밝히시는 주님의 빛이 우리 안에 가득 차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어둠을 밝히시는 주님, 당신을 기다립니다. 저희에게 오시옵소서. 대림절 동안 우리 안을 가득 채운 욕망의 덩어리들을 비워내게 하소서. 그 안을 오로지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소서. 내 안에 마련한 그 품을 세상을 향해 열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리기 두려워할 때 주님의 따뜻한 품으로 품어 주시고 저희가 온전히 주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의 도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에 여러분을 온전히 맡기고, 세상이 우리에게 심은 욕망, 두려움, 이기심 그 모든 것을 비워내십시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의 품을 세상을 향해 내어주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자신을 비우고, 세상을 향해 품을 내어주고자 하는 생명사랑교우들 위에, 어둠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모든 이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