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육성한 목사] 하나님 앞에 작은 사람 – 2022년 6월 12일

예레미야서 14장 11-16절, 시편 131편, 사도행전 9장 15-19a절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00일을 넘어 곧 4개월에 접어듭니다. 전쟁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민간인만 2만 명 이상 숨졌고, 사망자 가운데는 어린이들도 수백 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군인 전사자는 3만 명을 넘은 것으로 조사 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전쟁의 진전이 보이지 않고, 공세가 잦아들면 협상 단계로 나아갈 것이라 조심스럽게 예측하지만, 하루하루 엄청난 고통과 두려움 속에 있을 이들을 생각할 때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멈추길 기도하게 됩니다. 전쟁으로 희생당하고,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하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막힌 담을 허무시고, 화해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우크라이나 땅에 임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번 전쟁으로 전 세계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러시아 원유 수출 제재와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의 파괴로 전 세계의 유가가 상승했고, 많은 국가가 경제난과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중동과 아프리카가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전쟁의 피해는 결국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 됩니다. 전쟁을 바라보며 당장 나의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아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전 세계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한 나라, 한 사람의 평화가 우리의 평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가슴 깊이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더욱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위해 힘써야 한다는 사명감 또한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얼마 전 한 종교지도자가 한 말이 세계의 많은 그리스도인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가 러시아의 침공을 옹호하는 발언을 해서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준 것입니다. 최근에는 러시아 정교회 TV 채널과 유튜브로 중계되는 강론에서 이 전쟁을 서방에 맞서 러시아 세계(루스키 미르)를 방어하려는 성스러운 투쟁이며, 적그리스도와의 싸움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도를 넘은 발언으로 많은 정교회 신부들과 주교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고, 키릴 주교와 관계를 끊는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 프란치스코 교황도 “푸틴의 복사(사제를 돕는 평신도) 노릇을 하며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지 말라”고 아주 강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3월 16일) 둘의 화상 대화에서도 전쟁의 합리적인 이유를 대는 키릴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우리는 국가가 임명한 성직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의 언어가 아닌 정치의 말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는 신의 성직자입니다.”

러시아의 침공을 옹호하는 키릴의 말과 전쟁을 반대하며 비판하는 말 중 어떤 것이 진정한 신앙의 언어일까요? 어떤 말에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리스도교의 가치가 담겨 있을까요? 누구의 말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까요?

[누구를 위한 예언인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의 말씀은 예레미야서입니다. 예레미야는 애통의 예언자로 불립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닥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서 슬퍼하고, 백성들이 회개하길 바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알기에 슬퍼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를 더 슬프게 한 것은 아무도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유다의 현실을 아무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면 그들은 저를 비웃기만 합니다. 말씀 듣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렘6:10)

하나님의 말씀을 유다 사회에 전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뭉친 왕과 성전 권력 때문입니다. 이들은 유다 땅 그 어디에도 평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향해 평화를 외쳤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바로 전 부분을 보면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거역한 유다 백성들에게 임할 재앙에 대해서 말합니다. 유다 땅에 극심한 가뭄이 들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안타까운 마음에 백성들 편에 서서 하나님을 설득해보려고도 했지만, 하나님은 단단히 화가 나셨고, 흔들림 없이 엄중하게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무섭게 타오른 하나님의 마음을 전했건만, 예루살렘의 성전 권력 옆에 붙어 있는 예언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근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께서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화를 주신다.”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목소리가 아니라, 거짓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들려오는 안전과 평화라는 예언에 심리적 안정감을 얻습니다. 칼과 기근과 염병에 대한 예언은 시끄러운 소음으로, 헛소리로 여깁니다. 거짓 예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습니다.

이스라엘의 출발은 파라오 밑에서의 노예 생활, 즉 억압으로부터의 탈출 경험으로 비롯되었기 때문에, 초기 이스라엘은 왕정을 거부하고 지파 체제로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그러나 강대국과 주변 도시국가를 보며 열등감을 느낀 이들은 다시 절대권력을 가진 왕이 중심이 되는 사회 체제를 선택합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평등보다는 개개인의 풍요를 추구하게 되었고, 풍요와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중앙권력에 의해서 억압과 착취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해방과 자유를 선물하시고, 세상과 다른 대안 문화를 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야웨 하나님이 이제 성전 안에서 거주하며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 정도로 전락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자신들의 풍요와 평화를 위한 수단이 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풍요만을 추구하고, 누군가를 억압하고 착취하며 부와 성장을 이루는 이 사회를 유지하는데 기여합니다. 자신들이 노예로 살았던 애굽의 모습을 닮아 간 것입니다.

오늘 거짓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으로 잘못된 사회 구조를 계속 유지하고자 합니다. 이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삶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고도 예레미야서 안에서는 평화를 선포하는 거짓 예언자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등장합니다. 이들은 이 사회 체제에 긴장감을 주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차단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하나님과 시작했던 그 때, 그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듭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는 세 가지가 없다고 합니다. 그 세 가지는 시계, 거울, 창문입니다. (가본 적이 없어서 확인하진 못했습니다) 시계를 보면 자신이 얼마나 도박에 집중했는지 알게 되니 시계를 없애서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창문을 없애서 밤이 되었는지, 낮이 되었는지 파악할 수 없도록 합니다. 밤새도록 도박을 하고 초췌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반성을 할 수도 없도록 거울도 없앱니다. 자신의 현재 모습을 확인하게 하는, 즉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성찰하고, 양심을 일깨울만한 요소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권력 잡은 사람들의 편에 서서 거짓 예언자들이 하는 예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풍요만을 추구하고, 정의를 잃고, 하나님도 잊은 이 상황이 괜찮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대한 성전, 하나님 숭배, 더불어 바알 숭배까지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합니다. 정말로 모두가 풍요롭기 위해서는 야웨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평등과 나눔을 말해야 하는데, 그러한 목소리를 차단합니다.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유와 해방을 누려야 하는데, 권력을 잡은 이들은 자신들의 부와 평안을 위해서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구원하신, 자유와 해방의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서서 그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지만, 하나님이 성전에만 거하시며 왕과 권력자들의 편에 있는 것처럼 만듭니다. 이것이 보편이고, 이것이 평안과 평화라고 끊임없이 선포합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작게 보게 만들고, 작게 여겨야 할 것을 크게 보게 만듭니다.

[크고 강한 것에 끌리다]

오늘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은 예언자들이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에게 거짓된 환상과 허황된 점괘를 꾸며내어 거짓말을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이들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의도가 다분히 악의적인 거짓말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길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이런 거짓 예언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5장 5절이 이 문제를 잘 드러냅니다. “이제 부유하고 유식한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이야기를 해보자. 그들이야말로 주님의 길과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한결같이 고삐 풀린 망아지들이다.” 예레미야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아는 이들이 저지르는 죄악에 대해서 더 가슴 아파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이들이, 주님의 길과 법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잘못된 길에 서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키릴과 같은 종교 지도자가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전혀 상반되는 목소리를 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세상이 커 보이고, 하나님이 작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작아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길과 가치가 우리의 삶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눔과 평등의 경제 질서가, 정의의 정치가, 세상을 변혁시키는 신앙이 작고 무력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길과 법도가 맞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막상 세상 속에서는 작게 느껴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차분히 놓고 돌아볼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을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목소리가 더 크게 느껴지고, 쏟아지는 수많은 광고가 우리 생각과 욕망을 지배하지는 않나요?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도 세상이 보여주는 크고 화려한 것을 꿈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크고 강한 것들 곁에서, 세상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작아지는 사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울의 회심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마스쿠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박해하는 사람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은 유대교 갱신 운동의 한 분파인 바리새파 사람이었으며,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이방지역에 거주하면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율법을 더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열성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를 믿고 따르는 이들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운동에 가담하는 이들을 박해한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출신 성분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율법에 열성적인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죄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들이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함께 하신다고 주장을 펼치니 열성파 유대인으로서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바울은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나가는 이들을 박해하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러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예수 운동에 가담하는 이들을 박해하러 가는 그 길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춰 바울은 바닥에 엎어집니다. 그리고 빛 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바울은 이 일로 인해 한동안 앞을 볼 수 없었고,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주님께서 부르신 아나니아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얼마가 지나 바울은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시력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갑니다.

바울이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경험한 이 일이 물리적으로, 객관적으로 어떤 사건이었는지 밝힌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자신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증언한다는 사실이고, 이 신비한 사건을 통해서 바울이 완전히 변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다마스쿠스의 사건을 바울의 회심/회개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개종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여전히 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핵심은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바울이 이제 박해하는 사람에서, 박해받는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서 있었던 자리는 철저하게 유대 기득권 세력의 자리였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승리한 이들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이 지금까지 누려왔던 자연스러운 질서와 이제 더 이상 어울리지 않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자신이 멸시하고, 박해하던 죄인들, 모든 권력을 박탈당한 이들과 함께 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누려왔던 권력, 그리고 더 나아가서 로마 제국의 질서와도 대결하며 세상을 진정으로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다고 전합니다. 바울의 눈을 가리던 비늘이 벗겨지자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크게 봐왔던 것 그 모든 것이 작게 보입니다. 선택받은 존재라는 우월함, 정통과 중심을 점유했다는 엘리트 의식, 철저한 율법주의자로서 의롭다고 여기는 삶, 유대 사회에서 인정을 받을 만한 존재라는 성공의식도 모두 다 보잘것없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작고, 대단하지 않고 하찮게 여겨 왔던 것이 크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과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을 이제 철저하게 돌아섭니다. 유대인이자 율법주의자로서 보여주었던 그 열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일에 그대로 쏟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작고, 세상 앞에는 큰 사람]

오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뒤 세상에서 크다고 여겨지는 그 모든 것 앞에 더 커졌습니다. 당당하게 서고 그것들을 작게 여깁니다. 그리고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하나님 앞에 한없이 작아집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죄인으로 여겨지던 이들, 자신이 권력을 부리던 바로 그들의 편이 되어 자신도 작은 자로 섭니다.

2018년 9월에 ‘당회와 신도회와의 만남’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사랑교회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기대와 계획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다들 기억하시나요?(생명사랑교회 카페에 들어가시면 그때의 사진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시간이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생명사랑교회에 온 지 2년이 안 되었을 시점이었는데, 교회의 방향과 계획을 세우는데 전교인이 참여한다는 것이 놀랍고 새로웠습니다. 민주적인 의사결정 방식과 평신도 중심의 사역이라는 우리 교회의 가치가 멋지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당시 나누었던 이야기 중 몇 가지가 아직도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교회의 3대 목표, ‘작으나 건강한 교회’, ‘평신도 중심의 사역’, ‘선교사명에 충실한 교회’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적고 나누는 순서 중에 한 교우분이 나누어 주셨던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 첫 번째 목표 ‘작으나 건강한 교회’에서 ‘작으나’가 작다는 것을 부정적인 의미로 여기는 표현일 수가 있으니 ‘작고 건강한 교회’로 고치자는 얘기였습니다. ‘작고’라고 표현했을 때, 작은 교회로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자 지향임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참 좋은 생각이었습니다. 교회가 작은 것이 당연하고, 올바른 존재 방식이라고 생각한다면 ‘작으나’라는 표현은 유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작으나 건강한 교회’라는 우리 생명사랑교회 첫 번째 목표를 오늘 본문과 연결 지어서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하나님 앞에는 작지만, 세상 앞에는 큰(건강한) 존재로서 서자는 의미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존재가 커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앞에 우리가 커져서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짓 예언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리의 목소리가 커져서는 안 됩니다. 오늘 예레미야가 그러했듯이, 변화된 바울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작아져서 그분의 말씀과 그 뜻에 순종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세상 앞에 크고 당당한 존재, 즉 건강한 존재로 서야 합니다. 썩어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바람을 저버리는 우리 사회에서 올바른 존재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풍요가 유일한 가치가 되는 세상 앞에, 불의 앞에, 하나님을 교회에 가두고 자신들의 안위만을 바라는 교회들 앞에서 더 당당하고 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크게 여기는 돈, 명예, 힘, 그리고 이것들이 우리 삶을 지탱한다는 신념을 가볍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 사회가 가볍게 여기는 생명, 정의, 평화, 사랑의 가치를 오히려 정말 크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그릇에 담아야 할 것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의 시인은 이제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다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큰 것을 소유하려고 하거나, 사람의 눈에 놀라운 일들을 이루려고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오히려 고요함과 평온을 누립니다.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듯이 시인의 영혼은 편안하고 또 충만합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으로 터득한 이 지혜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앞에서 커지기 위해서는 세상이 보여주는 큰 것을 쫓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말하는 큰 가치, 더 많은 행복을 준다는 것들을 따라갈 때, 우리는 세상 앞에 한없이 작아지기만 할 뿐입니다. 우리 내면은 더 공허해질 뿐입니다. 결코 가질 수 없는 더 큰 것만 바랄 뿐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세상이 말하는 작은 것에 주목합시다. 세상이 작게 여기는 가치들을 크게 여깁시다. 나눔의 참 기쁨을 아는 사람에게는 나만의 풍요는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한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이들은 남을 짓밟고 올라가는 높은 곳은 부럽지 않습니다. 진실한 사랑으로 서로를 위하고 섬기는 믿음의 자매와 형제를 얻은 이들에게 세상에서 성공한 이들과의 인맥은 부럽지 않습니다. 우리 그렇게 작은 것에 주목합시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선물 앞에 작아집시다. 겸손합시다. 우리는 그때에야 비로소 세상 앞에 정말로 커질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우리 함께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세상 앞에서 한없이 커지는 존재가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우리가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세상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축복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옵소서.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더라도 언제나 주님의 음성, 주님이 보여주시는 큰 것에 주목하게 하옵소서. 나의 헛된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크고 화려한 것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크게 여기시는 것들을 따라 사라 살아가며, 세상 앞에서 크고 당당한 존재로 서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작아질 때, 주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는 세상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습니다. 우리 그렇게 작으나 건강한 존재로 섭시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하나님 앞에 작아지고, 세상 앞에 커지기로 결단하는 생명사랑 교우들과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 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