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육성한 전도사] 빚진 자로 살아가기 – 2020년 9월 27일 한가위감사주일

신명기 32장 26-29절, 시편 84편 1-4절, 누가복음서 7장 40-50절

[코로나 19와 한가위]

시원한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니 마스크와 함께 여름을 보내느라 지쳐있던 몸과 마음이 조금은 위로를 받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오늘은 예배가 끝난 후에 잠시 산책하러 나가셔서 몸과 마음을 열고 가을바람도 맞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주님의 생기, 성령의 기운도 함께 느껴보시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면 민족 대명절인 추석이고, 오늘은 추석을 앞두고 드리는 한가위 감사 주일입니다. “늘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처럼 추석은 언제나 우리에게 넉넉함과 충만함을 선물하는 명절입니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 19로 인해 생각지 못했던 한가위 풍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코로나 19 확산을 우려하면서 사람이 몰리는 시기를 피해서 미리 추모원과 친지를 방문하고 있고, 올해는 특별히 제사를 지내지 않기도 하면서 ‘비대면 추석’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각 지역 단위에서 내 거는 현수막들도 눈길을 끕니다. 이번 추석에는 지역을 이동하며 부모님을 뵈러 가는 것을 자제하라는 의미를 담은 현수막들입니다. “불효자는 ‘옵’니다.” 불효자들이나 고향을 찾아간다는 뜻입니다. “찾아뵙지 않는 것이 효”, “아범아! 추석에 코로나 몰고 오지 말고 용돈만 보내라.” “아들아, 딸아! 코로나 극복 후에 우리 만나자.” 위트있는 현수막에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명절에 가족들이 함께 모일 수 없다는 사실에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코로나 19는 특히 노인계층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에 이번 추석에는 되도록 이동을 자제하고, 가족 모임을 최소화하는 것이 옳은 일인 듯합니다.

이런 비대면 문화가 방역에는 큰 도움이 되고, 노인계층 안전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 소외계층의 외로움을 가중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 영국에서 창문에 외로움을 호소하는 문구를 붙여 놓은 한 노인의 이야기가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35년간 함께한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극심한 외로움을 겪던 윌리엄스라는 노인은 대화 상대를 찾으려고 지역 신문에 광고를 내고, 연락처가 담긴 명함을 만들어 거리에서 나눠주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고, 절박한 심정으로 자택 창문에 글을 써 붙입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저는 사랑스러운 아내이자 소울 메이트인 조를 잃었습니다. 친구나 다른 가족이 없어서 대화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루 24시간 지속하는 적막이 견딜 수 없는 고문과도 같습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나요?” 이 사연이 알려진 후 윌리엄스를 돕고 싶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수많은 사람이 연락을 했고, 그를 모임과 행사에 초청하는 등 다양한 연대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 가운데 우리 주변에 외로움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은 없는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번 명절은 이전과는 다르게 소박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타자를 향한 넉넉한 마음만큼은 이전보다 더 풍성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의 닫힌 마음들]

그러나 우리 한국 사회의 현실은 타자를 향해 넉넉한 마음을 보여주기는 다소 역부족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최근 증가하고 있는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그리고 분노 조절에 실패하고 벌어지는 크고 작은 폭력들은 코로나 19 그리고 ‘코로나 레드’가 가져온 영향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기존에 우리 사회에 만연했고, 잠재되어 있던 불평과 불만, 절망과 분노의 감정들이 표출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코로나 19는 이렇게 우리 사회의 숨겨져 있던 민낯을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늘 한가위처럼 넉넉하고, 부드럽고, 충만했으면 하는 우리 사회의 마음들이 지금은 닫혀있고, 굳어있는 듯합니다.

교회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한국교회 주요 교단들이 총회를 하는 기간입니다. 사실 매년 총회를 할 때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헌의안과 논의 결과들이 쏟아져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번 주요 교단 총회에서 교계와 사회가 주목하는 사안 중 하나는 ‘전광훈 목사(사랑제일교회)에 대한 이단 규정’입니다. 시민사회조차도 당연히 목사도 아니고,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지만, 대부분의 교단이 이 사안은 1년간 더 연구해보겠다는 아주 신중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한편 자신들이 장자교단이라고 말하는 한 교단은 이번에도 ‘여성 안수 허락’ 헌의안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며 논의도 조차하지 않는 일도 있었습니다. 시민사회도 교회가 아니라고, 목사가 아니라는 사람에게는 배려와 존중, 신중을 다하면서, 여성 안수라는 상식적인 요구를 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무례한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며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담한 마음만 듭니다.

이처럼 타자를 향해 넉넉하지 못하고, 분노와 폭력, 불신, 차별과 배제, 혐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 그리고 우리 한국 교회 가운데서 우리가 지금의 풍조를 따르고, 닮지 않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면 우리에게 무엇이,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우리는 모두 빚진 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에서는 바리새파 사람 시몬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의 해석자이자 가르치는 선생이었고, 회당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과 가장 많은 갈등과 논쟁을 일으키는 이들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도 자신들처럼 율법에 대해서 풀이하고, 회당을 중심으로 많은 사역을 펼치고, 또 민중들의 지지를 받으니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경계하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에 등장하는 시몬도 예수님에게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집주인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나 당시 명성이 있는 사람을 식사자리에 초대해서 말씀을 듣곤 했는데, 시몬은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을 초청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나누며 어떤 말씀을 들을 수 있을지 기대를 품고 있던 시몬의 기분을 망치는 일이 일어납니다. 동네에 죄인으로 소문난 한 여자가 집으로 들어와 자신이 초대한 손님의 몸에 손을 댄 것입니다. 그 여인은 단순히 몸에 손을 댄 것을 넘어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가져온 귀한 향유를 바릅니다. 시몬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혼자 말합니다.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 여자는 죄인인데!”

1세기에 남성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여성과 교제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동네에서 죄인으로 소문난 여인이 자신에게 손을 대도 가만히 있는 예수님을 보며 기본적인 율법 조차 모르는 그는 결코 예언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불만과 불신이 시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을 때, 예수님은 시몬에게 오백 데나리온과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들의 비유를 들려주시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는 거지?” 예수님은 시몬이 그 여인에게서 무엇을 보길 바라셨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시몬이 보길 바라셨던 것은 바로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한 장본인이지만 예수님을 맞이하며 씻을 물도 드리지 않았고, 손님을 맞는 기본적인 인사인 입맞춤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은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님께 큰 빚을 졌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하나님의 크신 자비로 용서받았다는 깨닫고 그 기쁨과 감격을 몸으로 표현합니다.

오늘 시몬을 향한 예수님의 비판은 단순히 시몬이 이 여인을 죄인 취급했거나 언행이 경솔했다는데, 예수님을 홀대했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마음이 굳어져, 자신은 하나님께 특별히 빚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즉 감사를 잃어버린 시몬의 마음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빚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조금은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이 순간 누군가의 땀과 수고의 손길이 있기 때문이고, 자연의 내어줌이 있기 때문이고, 그 너머에 하나님의 창조와 돌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타자에게, 하나님께 빚지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 우리는 자신보다 부족한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거나 정죄하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거나 사랑을 베풀 수 없게 됩니다. 감사를 잃고, 모두 자신이 스스로 이룬 것이라며 교만하게 됩니다. 자신의 신념과 욕망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즉 자신을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신명기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역사 속에서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게 멸망할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자기들이 왜 패배를 당하였는지를 깨달을 지혜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들의 종말이 어떻게 될지, 깨닫기만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이스라엘 백성이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오늘 함께 읽은 신명기 32장 본문의 앞 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해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야곱을 찾으셨고, 짐승의 울음소리만 들려오는 황야에서 그를 만나, 감싸 주고, 보호하고, 당신의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새끼들 위에서 퍼덕이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주님께서만 홀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 다른 신은 옆에 있지도 않았다. (신32:10-12)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배가 부르고, 넉넉해지자 하나님을 업신여기기 시작합니다.(신32:15) 하나님의 돌보심, 은혜를 망각했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금송아지를 세우고, 바알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에 진노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셨지만, 그들을 완전히 멸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제는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모세의 노래가 들려주듯이 자신들이 하나님께 빚진 자라는, 은혜 입은 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

예수님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분이었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마6:26)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물과 축복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렇게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식하면서 살았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빠”로 받아드릴 수 있었고, 그런 아빠를 신뢰했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불평불만, 절망, 분노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가 받은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다 보면 우리의 마음은 한결 부드러워지고, 이전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길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이 시몬과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을 염두에 두고 하신 오백 데나리온과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사람들의 비유가 실제로 시몬은 적게 은혜를 받았고, 여인은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떤 객관적인 수치가 아니라, 각자가 발견한 은혜의 크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몇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인가요? 한번 차분히 여러분이 받은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지 말고, 온전히 여러분의 삶에서 받고 느낀 그 은혜를 세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두운 시대에 참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려면 바로 감사하는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진 그 모든 것을 살피며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매일 감사 기도를 할 정도로 감사할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잘 돌이켜 보면 나의 건강, 생각, 마음, 내가 만나는 사람, 친구, 가족, 나를 만든 경험, 세월, 사건들까지 모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이것을 달라, 저것을 달라 조르는 기도를 주로 해왔습니다. 우리는 이제 욕심 많은 어린이의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돌아보고 그것에 감사할 줄 안다면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감사하며 이제는 하나님의 바람이 무엇인지 묻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첫걸음을 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비판한 것처럼, 여러분이 세상의 악에 침묵하고, 불의한 현실이지만 만족하고 안주하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세상의 고통에 눈을 감는 행위가 아닙니다. 감사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바로 보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에 우리는 오히려 세상의 고통을 더욱 선명하게 보게 됩니다. 우리가 연민과 자비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할, 넒은 품으로 품어야할 이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감사를 일으키는 예배]

그러나 우리가 일상 속에서, 그리고 고통과 악이 가득한 잘못된 세상을 살아가며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고, 키우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며 닫혀버린 마음을 열고, 감사를 느낄 수 있는 시간과 공간, 사건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우리가 매주 드리는,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드리고 있는 이 예배가 바로 그러한 시간이자, 공간이자,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지만, 바로 이 예배는 세상의 가치와 질서에 갇혀 있는 우리를 깨뜨리는 강력한 의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세상의 문화와 지향을 버리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단단하게 하지만, 반대로 세상에 길든 나를 깨뜨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듣는 설교가 자신의 신념을 강화하거나, 욕망을 부추기거나, 이념을 공고히 하는 기능을 한다면, 우리에게 감사의 마음보다 이기심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그것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예배는 결코 우리를 하나님의 넓은 품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 성장시킬 수 없으며, 그것은 결코 참 예배와 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면에서 우리의 예배 가운데 설교가 전부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교는 개신교 예배 전통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긴 하지만 설교가 예배의 전부는 아닙니다. 설교는 한 인간의 생각과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말씀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거나, 우리를 변화시키고, 일깨우기에 부족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설교가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고, 내 신념을 강화하고, 이념으로 우리의 생각을 가두기도합니다.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설교를 잘 듣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설교가 우리 예배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능하다면 찬양을 부르고, 함께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과 침묵을 하고, 예물을 드리고, 하늘의 축복을 나누는 모든 순서에도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예배의 모든 시간에 마음을 열고 참여하며, 성령의 활동에 주목한다면 특정한 순서가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그 모든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과 은혜를 더 풍성히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우리를 더욱 감사하는 존재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시편은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에서 경험하는 기쁨을 표현하는 시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 즉 하나님과 교제하는 공간이자,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오늘 시인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품을 노래하며 그곳에는 참새도 제집을 짓고, 제비도 새끼를 칠 보금자리를 얻는다고 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간에서 경험한 것은 지극히 작은 존재도 수용하고, 돌보는 하나님의 넓고 따뜻한 품이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넓은 품을 경험해야 하고, 예배는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예배를 통해 넓고 자비하신 하나님을 품을 닮아가야 합니다.

[빚진 자로 살아가기]

지난 9일 독일 베를린에서 “난민을 더 수용하라”는 시위가 열려 세계 시민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지난 2015년 대규모 난민 사태 이후 지금까지 180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던 독일에서 난민을 더 수용하라는 시위가 일어난 까닭은 최근 발생한 그리스 모리아 난민캠프 화재 때문이었습니다. 만 2천 명이나 되는 난민이 화재로 인해 오갈 곳이 없어지고, 그리스 정부가 보호자가 없는 어린이와 10대 청소년들은 본토로 이송할 계획이라고 밝히자 독일 40여 개 도시에서 우리가 난민을 더 수용하자는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독일의 180여 개의 지방자치단체는 “우리에게 빈자리가 있다”며 난민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독일 시민들이 보여준 이 모습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어야 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넓은 품을 내어주어 타자를 수용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자세.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감사와 예배로 빚어가야 하는 모습이자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조금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시는 손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을 이끌어 온 그 은총의 손길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는 감사를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삶에 대한 감사에서 그냥 멈추지는 마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세상을 바로 보십시오. 그리고 이제야 보이는 세상의 고통과 슬픔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우리가 받은 사랑과 자비와 연민의 마음을 보여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빚진 자로서의 삶이자, 세상을 바꿀 참 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주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보게 하소서. 주님 우리의 입술을 열어주셔서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찬양하게 하소서.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여서서 모든 존재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게 하소서. 그리고 이제 움켜쥔 우리의 손을 여셔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뻗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