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이상중 목사] 돕는 사람 – 2026년 09월 20일

창세기 2장 18-25절, 마가복음서 10장 1-12절, 에베소서 5장 21-33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성도님들의 사랑과 기도 덕분에 휴가를 잘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가끔 일상을 떠나야 보이는 것이 있고, 정리되는 것이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잘 쉬었으니, 또 열심히 사역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지난주는 교단 총회 기간이었습니다. 총회를 앞두고 문자 하나를 받았습니다. 동성애 동성혼 반대 대책위원회로부터 온 문자였습니다. 이 문자에는 이런 성경 본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세기 1:27)

이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동성애 동성혼 반대 대책위원회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다른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이 부부가 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창세기 1:27이 과연 이런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구절인지는 살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자와 여자로 대표되고 있는 창조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야만 뒤에 살펴볼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가복음의 말씀과 바울이 말한 에베소서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2:18의 말씀입니다.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이 창세기 2장의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이라는 존재와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기를 원하셨는지, 인간 창조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남자에게 여자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 구절이 먼저 말하는 문제는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고립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고립도 외로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해결책이 ‘여자’라는 말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첫 의도는 한 인간 곁에 또 하나의 인간을 세우는 것. 그리고 그 둘이 서로에게 ‘돕는 사람으로, 알맞은 짝으로서’ 존재함에 있습니다. 말씀대로라면, 인간은 성 정체성과 상관없이 서로 마주 서서 힘이 되어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창세기 2장의 의도는 남자와 여자를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혼자 살아가는 인간을 함께 살아가는 인간으로 만드는 데에 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함께 살아가는 인간을 만들려고 하셨습니까? 창세기 2:15의 말씀을 보면,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라고 기록합니다.

인간은 그냥 에덴에서 편안하게 사는 존재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만드신 세상에 책임을 다하여 돌보고 지키는 존재로 세워졌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창조 세계를 맡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즉, ‘이 세계를 돌보고 지키는 일을 혼자 감당하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함께할 사람이 필요하다.’라는 의도의 말씀입니다.

전도서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세상에서 헛된 것을 또 보았다. 한 남자가 있다. 자식도 형제도 없이 혼자 산다. 그러나 그는 쉬지도 않고 일만 하며 산다. 그렇게 해서 모은 재산도 그의 눈에는 차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끔, “어찌하여 나는 즐기지도 못하고 사는가? 도대체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수고를 하는가?” 하고 말하니, 그의 수고도 헛되고, 부질없는 일이다.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뜻하겠는가?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도서 4:7-12)

하나님이 인간에게 동료를 주신 이유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부부가 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하나님이 맡기신 세계를 함께 살아내기 위해서 한 인간을 더 지으셨고, 동료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창세기 본문에 나온 ‘돕는 사람’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는 종종 ‘돕는 사람’이라는 말을 오해합니다. 누군가를 중심에 두고, 다른 누군가가 뒤에서 보조하거나 거드는 역할로 축소해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대체 적으로 남성이 중심이고 여성은 보조자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기록된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를 들여다보면 ‘돕는 사람’의 무게는 달라집니다. ‘돕는 사람’의 핵심 단어인 ‘에제르(Ezer)’는 단순한 보조자가 아닙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를 붙들어 주는 구원자와 같은 도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힘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알맞은 짝’으로 번역된 ‘케네그도(Kenegdo)’도 더해집니다. 이 단어는 ‘그의 앞에 마주 서 있는’ 혹은 ‘상응하는’이라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앞서 지시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 뒤를 따라가는 수직적인 구조가 아닌, 두 존재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눈을 맞추며 서 있는 모습의 의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서로에게 ‘에제르와 케네그도’, ‘돕는 사람으로 알맞은 짝으로’ 지어주셨다는 것은, 상호 의존과 연대를 위한 선언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이런 의도로 돕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21 그래서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가 잠든 사이에, 주 하나님이 그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그 자리는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나님이 남자에게서 뽑아 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남자에게로 데리고 오셨다.”

이 장면은 하나의 인간 앞에 또 하나의 독립된 인격의 인간을 세우시는 장면입니다. 아담이 잠들어 있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첫 인간은 두 번째 인간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렇기에 두 번째 인간은 첫 번째 인간의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보조자도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혼자 세상을 살아가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서로 마주 서서 힘이 되어 주고, 함께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를 돌보고 지키도록 한 인간 곁에 또 한 인간을 세우셨을 뿐입니다.

이 의도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세기 1:27)와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창세기 2:24)에서 오늘 우리가 읽어내야 할 진정한 의도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며, 남자를 돕는 보조자로서의 여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해야 할 의무를 주시기 위한 인간 대 인간으로서 살아야 함을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의도로 에베소서 5:21-33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그리고 어쩌면 오랫동안 오해해 온 본문입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은 “아내 된 이 여러분, 남편에게 하기를 주님께 하듯 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성도가 이 구절을 근거로 가정 내의 수직적인 질서를 정당화했습니다. 남편은 머리로서 지시하고, 아내는 그 아래에서 복종해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논리로 오랜 시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 말씀을 통해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가부장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22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21절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바울이 말하는 질서는 일방적인 굴복이 아닙니다. ‘서로 순종하는 것’, 즉 상호 복종입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며 의도하셨던 ‘돕는 사람, 알맞은 짝’, 즉 서로 마주 보며 힘이 되어 주는 동등한 관계의 신약적 표현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남편들에게 아주 무거운,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생각하면 매우 파격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남편 된 이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심 같이 하십시오.”(25절)

예수님이 신앙 공동체를 위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높은 곳에서 군림하며 지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권한을 내려놓고, 자신의 생명마저 내어주셨습니다. 이렇게 돕는 삶, 사랑의 삶, 섬김의 삶, 연대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신앙 공동체에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삶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철저한 실패요, 가장 무력한 모습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예수님의 헌신과 낮아짐이, 인간을 창조하시며 세우신 목적인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된다고 증언합니다.

오늘 남신도회 주일예배를 드리는 우리 남신도 성도님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혹은 힘과 부를 더 많이 소유했다는 이유로 타인을 차별하고 배제했던 모습에서, 타인을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그리고 때로는 가정과 교회 안에서도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의 위에 서려고 합니다. 더 많은 힘을 쥐고 지시하는 것이 능력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에베소서의 말씀은 우리를 다시 겸손하게 합니다. 누군가의 위에 서려는 마음을 버리고, 곁에 서서 동등한 ‘돕는 사람’이 되어 주라고 권면합니다.

나를 내어주어 상대를 살리는 사랑, 서로가 서로에게 순종하며 부족함을 채워주는 관계.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 때부터 계획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회복하신 참된 인간관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겸손한 연대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이 사회 속에서 여전히 차별받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이혼에 대해 말씀하신 장면은 또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어떤 의도로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 10장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묻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이런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릴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은 철저한 남성 중심 사회였습니다. 여성은 독립적인 경제권이나 사회적 지위가 없었습니다. 율법에 규정된 ‘이혼 증서’는 본래 버림받은 여성이 다른 사람과 재혼하여 생존할 수 있도록 돕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규정은 남성들이 자신의 변심이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합법적으로 아내를 내쫓는 면죄부처럼 악용되었습니다. 남성들은 율법이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정당화하고, 연약한 이들을 너무도 쉽게 삶의 울타리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율법적인 질문 이면에 숨겨진 ‘마음의 완악함’을 정확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논리를 깨기 위해 바로 오늘 우리가 처음에 나누었던 창세기 1장과 2장의 말씀을 가져오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가복음 10:6-9)

예수님이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신 이유는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는 결합이 유일한 정답이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의 폭력적인 율법주의를 고발하시기 위함이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무지함을 꼬집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지으시고 서로를 향해 ‘돕는 사람, 알맞은 짝’, 마주 보고 서서 서로를 살리는 동등한 생명의 동반자로 부르셨는데, 어찌하여 너희는 성경 말씀을 무기 삼아 사람을 차별하고, 함부로 내버리며, 그 거룩한 연대를 깨뜨리느냐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설교 서두에 말씀드렸던 동성애 동성혼 반대 대책위원회의 문자 메시지가 다시금 떠오르는 지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말씀과 율법을 앞세워 약자를 배제했듯, 오늘날에도 성경 구절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며 누군가를 향해 혐오와 배제의 선을 긋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차별, 혐오에 사용하는 무기가 아니라, 잃어버린 생명의 가치를 회복하고 연대하는 사랑의 언어로 읽어내라고 초대하십니다.

남신도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들은 단지 부부 관계에만 머무르는 말씀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에 관한 말씀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람을 너무나 쉽게 차별하고, 배제하고, 내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효용 가치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리는 노동자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이 땅에 왔지만, 철저히 도구로만 쓰이다 버려지는 이주민들, 그리고 사회적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림자 취급을 받는 수많은 소외된 이웃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때로는 자본주의의 논리로 사람을 억압하고, 차별하고, 내버리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번 제58회 남신도회 표어가 “성령과 말씀으로 가정을 세우고 섬기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빚진 자들이며, 함께 살아가도록 지어진 동등한 생명의 동반자입니다.

우리 남신도회가 먼저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고통받는 이웃들이 있는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돕는 사람’으로 마주 서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가 ‘돕는 사람’으로 마주 서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