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국가와 종교 – 2020년 4월 5일 종려주일

출애굽기 201-7, 시편 845-12, 로마서 131-7

[두 행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환호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요한 12:12-13).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선포하는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외치지만(요한 12:13)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 일행의 행색은 초라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이라는 시골 마을 출신인데다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대부분 농민층이고,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의 먼 거리를 온 터라 예수 일행은 지치고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넉넉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간신히 새끼 나귀를 빌려 탔지만 그 모양은 볼품없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한편 서쪽으로부터 이두매와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는 로마 총독 빌라도가 제국의 기병대와 보병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옵니다. 이들의 행렬은 제국의 권력을 과시합니다. 유대교의 성전과 그 뜰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하던 로마군을 지원하기 위해 가이사랴 해변으로부터 제국의 군단이 몰려 옵니다. 유대교의 중요한 절기들에는 언제나 소요가 일어날 위험이 있었기에 로마 제국은 질서 유지를 위하여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파병했습니다. 도심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을 때, 엄청난 전투경찰들이 도로에 가득한 것처럼 말이지요.

제국 군대의 위용은 예수님 일행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새끼나귀가 아니라 멋들어진 군마들과, 말에 타고 있는 기병들, 가죽 갑옷과 투구들, 병기와 깃발들, 깃대 위에 조각된 황금 독수리, 행군하는 군화 소리들과 울리는 말고삐의 방울들, 북을 울리며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로마제국의 군대는 당시 로마의 세력이 어떠한가를 여실하게 보여 줍니다.

한쪽에는 세상의 지배자인 로마 황제의 군대가, 다른 한쪽에는 갈릴리 나사렛 청년이 서 있습니다. 둘 다 세상을 다스리려 하고, 둘 다 자신의 나라가 인류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준다고 말합니다.

코로나 19가 심각해지면서 국가와 방역당국은 사회적 거리 두기 강조와 자발적 위생 수칙을 지킬 것을 권고하면서 모든 종교단체들에게도 모임과 활동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부득이하게 모이더라도 입장 시 발열체크와 마스크 착용, 손 소독제 비치, 2m 이상 거리 유지, 단체식사 제공 금지, 방역 책임자 배치 등 7개의 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행정지도와 행정명령을 발동하고, 구상권도 청구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국가의 방책을 잘 준수하는 교회도 있지만, 이것을 국가에 의한 종교탄압으로 보고 신앙의 자유를 말살하기 위한 것이라며 강력하게 저항하는 곳도 있습니다.

참된 종교는 언제나 세상의 잘못된 권력과 불의에 맞서 왔습니다. 게으른 일상의 나태함에 맞서서 하나님 나라가 제공하는 이상과 초월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받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모두 이 땅에 발을 딛고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국가와 종교가 생긴 이래 이 둘의 관계는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며, 때로는 반목하고 때로는 전쟁을 치르며 박해와 순교가 일어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국가와 종교]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국가와 종교의 관계가 어때야 하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공관복음서에는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를 가지고 바리새파와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과 논쟁하는 장면이 모두 나옵니다. 예수님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 드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을 근거로 어떤 사람들은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하고, 국가와 종교는 서로가 서로에게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폅니다.

한편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의 바울의 말씀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합법화했고, 교회는 국가 권위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치적인 일에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각각의 주장에 따른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각 주장이 모두 성경의 바른 의미를 알고 말한 것인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그것을 자기 입맛에 따라 적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군부 독재정권 시절 그 앞에서 올바른 소리 하나 하지 못하고, 국가조찬기도회에 나가 독재자를 위한 기도나 해 주면서 로마서의 말씀을 인용하던 사람들이 국가가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에는 불응하며 종교탄압을 운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이 말하는 가치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을 추구하면서, 이 세상에만 매몰되는 삶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하늘의 천사가 아니기에 실정법을 지켜야 하고, 세상의 규칙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올바른 지혜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황제의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것은 무엇인가?]

마가복음 12장에는 세금 납부를 강요하는 헤롯당원들과 세금 납부에 저항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함께 몰려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은 예수를 올가미에 걸려들게 하기 위해 질문을 합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은 어떤 대답을 하든지 올가미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멋진 대답을 합니다. 이 대답이 질문을 한 이들과 거기에 있던 청중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질문한 사람들의 관심은 황제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것을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위대한 점입니다. 한 방향만 생각하는 이들에게 다른 생각을 해 보도록 열어 준 것입니다. 월계관을 쓴 로마 황제 카이사르의 초상과 이름이 새겨진 동전이 황제의 것이라면, 과연 하나님의 것은 무엇일까요?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이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당원과 바리새파가 묻지도 않은 하나님의 소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냄으로서, 속임수에 걸려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를 다시 성찰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로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초유의 사태를 맞아 우리가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과연 예배의 참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쪽에선 교회에 모여야만 참된 예배이기에 예배를 못 드리게 하는 것은 종교탄압이라고 말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감염원의 진원지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되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과연 예배는 무엇이며, 왜 예배가 필요하며, 예배의 형식은 과연 어때야 하는가?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지난 일주일의 삶을 돌아보며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의 성찬을 통하여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고 힘을 얻어서 다시 그리스도의 제자로 거듭나게 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거듭나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다시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예배를 한다면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피어나는 삶이 되고, 또 그렇게 살려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온라인 예배는 어떤가요? 신앙과 삶을 점검하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재현하는 것이 어렵던가요? 함께 모여 예배하던 것이 익숙했기에 지금의 방식이 매우 낯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이런 방식을 통해서도 우리 개개인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예배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다만 함께 모이지 못하기 때문에 교인들끼리 교제하기 어렵고, 공동체성은 많이 약화될 수 있고, 몸으로 하는 훈련들 또한 효과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학교가 온라인 개학을 통해서 집에서 영상으로 수업을 하는데, 실제로 학교에서 몸으로 체험하고, 옆에서 선생님이 교정해 주는 것보다는 효과가 적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이렇게 약화되는 부분들을 어떻게 채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당분간 모임을 자제하므로, 그 시간에 그리스도교 2000년 전통에서 내려오는 침묵기도를 깊이 배울 수 있습니다. 전화나 SNS를 통해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나야 한다면 꼼꼼하게 예방 수칙을 지키면서 가볍게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느냐 마느냐의 문제보다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듯이, 예배의 시간과 공간과 형식보다는 실제 내용을 어떻게 채워 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공식 모임은 없어도 혼자서 시간을 내어 얼마든지 기도하실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영상들을 보면서 가족과 신앙적 대화를 나눈다면 그동안 회사와 다른 일로 바빠서 챙기지 못했던 새로운 친밀함들이 생겨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바치고,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다는 이 말을 문자적으로 단순하게 이해하여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둘 다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따로 떼어 낼 수 없습니다. 정교분리의 본 뜻은 부당한 정치권력이 개인의 종교의 자유를 탄압하면 안 된다는 것이고, 또 종교가 정치권력에 기대어 자신들의 이권을 얻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고 신앙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도 아닙니다. 감염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가 종교탄압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온라인 예배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코로나 19로 일상의 삶이 방해받는 것처럼 공동체를 느끼는 예배가 되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면서 적응하되, 예배의 본질인 신앙을 점검하고 새롭게 하는 것만큼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예배가 삶이고, 삶 그 자체가 예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믿는 신앙의 진리는 우리들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치에도 영향을 줍니다. 종교인의 정치 참여가 가능한 나라도 많이 있습니다. 다만 부당한 방법으로 특정 종교가 정부와 야합을 한다든지, 국가가 부당한 방법으로 종교를 탄압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교분리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악한 세력이 국가라면 마땅히 싸울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19의 방역대책은 종교탄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오늘 구약의 말씀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십계명의 1계명부터 3계명까지의 말씀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 밑에서 종살이 하던 사람들을 불러내어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면서 내리신 법령입니다. 법령의 첫 번째 시작은 바로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해방의 하나님, 자유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국가와 종교 사이에서 누가 옳은 지를 선택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국가든 종교든 한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생활을 침해하고, 정당한 삶의 의지를 가로막는다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을 두고 어떤 모양도 만들지 말라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든 종교든 우리들의 삶의 족쇄가 될 수 있습니다. 주일성수는 매우 당연한 것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사람을 질식시키는 딱딱한 교리가 될 수 있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드리는 헌금은 매우 좋은 것이지만, 헌금의 강요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돈을 갈취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무엇인가를 잘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3계명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언제든지 불러도 좋고, 또 불러야 할 이름이지만, 그 이름이 남용되고 오용된다면 그것은 신성 모독이 됩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부르고,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고 남의 틀림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또한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야기 할 때 정말 신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했을까요? 바울도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소환하여 자기주장을 폈던 것일까요?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

정말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그래서 모든 이들은 권세에 복종해야 할까요? 바울의 이 말은 만고불변의 법칙일까요? 아니면 시대의 특정한 상황에서 한 말일까요?

그렇습니다. 이 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이 말을 만고불변의 법칙처럼 생각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기 위해선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쓴 목적과 당시의 시대적 배경, 그리고 로마에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에 복종하라는 이 말이 만고불변의 진리라면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리가 없습니다. 로마의 말을 잘 들었을 테니까요! 양심을 지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권세이든지 불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로막을 때 저항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당시 로마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사는 거대 도시였습니다. 권력자들은 이들을 마음대로 부려먹고 착취해서 자신의 부를 누렸습니다. 로마에 와서 새로운 인생을 펴보고자 한 이들은 이런 정치 환경에 매우 큰 실망을 하고 좌절을 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반항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클라우디스 황제 때에 소요를 일으켰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문제 집단으로 낙인찍히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공개적으로 처벌도 당했습니다. 그래서 분노를 지닌 다수의 대중들은 종종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상대로 분풀이를 했고, 로마의 귀족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또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민들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분노가 커지고 그것으로 인한 무분별한 폭력행위들이 생겨나는 것을 당시 황제 네로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또 귀족과 각을 세우고 있던 네로는 귀족들의 힘도 견제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네로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함부로 폭력을 행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즉 네로 초기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혜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네로의 모습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제국의 황제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편 바울은 로마에 편지를 쓰면서 로마 교회가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이라 불리는 두 파로 나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약자였고, 이방인 계열의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많았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보다 훨씬 자유롭고 과격했습니다. 이들은 로마에 세금 내는 것에 반대하여 조세 거부 운동을 벌였고, 이들의 과격한 행동은 자칫하면 로마 제국의 군사적 진압을 불러 올 수도 있었습니다. 즉 바울은 매우 특수한 로마의 상황에서 두 파로 갈라져 있던 로마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더 큰 폭력 때문에 로마교회가 망하고 마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네로가 유대인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용인하지 않았고, 이것이 유대교의 소종파로 자라나고 있던 교회가 사회의 핍박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목숨을 내어 놓고 순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 가족과 나라를 위해서 개인의 한 목숨을 바친 수많은 조상들이 있었고 그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존재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때로 지혜롭게 처신하여 모두가 멸살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도 지도자의 임무입니다.

한편 로마서 전체의 맥락을 살피면 바울은 예수님의 원수 사랑의 계명을 일깨우면서, 로마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를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 또한 막고자 했고,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통해 평화를 만들던 로마와 달리 폭력이 아닌 방식으로 평화를 만드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보여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국가를 이끄는 종교인들의 양심과 삶]

지금 코로나 19로 정말 많은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교회 뿐만이 아닙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했고, 2008년 금융위기보다 심각한 사태가 도래할 수 있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주일성수와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의 근원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더 많은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이 더 많은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방식의 예배를 고민해야 하고, 온라인 예배의 부족한 부분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헤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국가는 하나님의 통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이 나라가 더욱 높고 숭고한 가치를 지켜내도록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국가보다 못한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바라는 것은 올바른 정신과 높은 가치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려면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더 의연해야 합니다. 해외의 마트에서 휴지 하나 더 사려고 머리카락을 붙들고 서로 싸울 때, 마스크를 양보하던 우리 시민의식이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럴 때 훨씬 더 도덕적이고 의연한 자세로 지내며 남들을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목회운영위원회 회의에서 의논하겠지만 더 힘든 이들을 위한 헌금을 하려고 합니다. 돈이 많다고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의지입니다. 강요도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한 길입니다. 릴레이 금식기도를 통해서는 코로나 19로 힘들어 하는 북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국가를 넘어서 인류애를 가지고 지금 모든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국가에 맞서 대결할 때가 아니라, 훨씬 더 넓은 틀에서 국가를 이끌어야 합니다. 곧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는데, 좋은 기회입니다. 잘하는 사람 뽑아주고, 잘 못한 사람을 떨어뜨리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정치할 사람을 잘 선택하도록 평소에 눈여겨보시고, 정책도 꼼꼼히 따지고, 꼭 투표에 참석하시길 빕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까지 더 나은 국가를 만드는 데 우리 모두 함께 합시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견디는 힘과 지혜를 주십시오. 세계에 몰아닥친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게 하여 주십시오.

한 나라의 시민으로 이 나라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가도록 애쓰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종교가 자신의 기득권을 챙기는 모습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으로 변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삶에서 참된 예배가 드려지게 하시고, 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홀로 영광 받으소서.

전 세계가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 환란의 시기를 견디게 하시고, 준비 없이 들이닥친 미래를 지금 이 순간 잘 다듬고 매만지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소서.

고통 받고 있는 전국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님의 크신 위로와 은총을 부어 주소서. 환란이 단련된 인격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며, 참된 신앙을 회복하는 동력이 되게 하여 주소서.

함께 모이지 못하여도, 홀로 골방을 찾아 숨어서 보시는 하나님과 깊이 소통하게 하시고, 내면의 풍성함을 되찾게 하여 주소서. 변화하는 세상에서 우리 생명사랑 가족들이 함께 일구어갈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소서.

한 겨울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듯이,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능력으로 코로나 19가 빨리 안정되고, 위축된 우리 삶에도 봄날이 찾아오게 하소서. 죽음의 그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우리와 늘 함께 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꿈꾸십시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뤄지도록 매일매일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십시오.

* 축도

그리스도의 온기가 여러분들을 치유하고, 그리스도의 눈이 여러분들을 응시하며,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에게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만들어가는 생명사랑 교우들 위에, 코로나 19로 신음하는 이 땅의 백성들 위에, 방역현장에서 수고하고 애쓰는 모든 이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