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한문덕 목사] 저항하는 그리스도인 – 2023년 7월 2일

다니엘서 6장 19-28절

[다니엘서 소개]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막상 성서를 펴보면 거기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성서에는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주와 인간의 역사를 이끄신 하나님의 사역이 담겨 있는데,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뜻,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높은 이상은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특히 자신의 형상으로 지은 인간들 모두가 생기 있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서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부당하게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 맞서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를 지켜내는 이들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성서 전체에 흐르는 커다란 수맥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을 거역하는 악과 죽임의 세력에 맞서는 강력한 저항정신입니다. 특히 구약성서는 저항의 사례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이집트 제국의 폭정에 맞서 싸운 모세, 폭군으로 변한 사울 왕에게 저항한 다윗과 요나단, 가나안 하솔 왕 야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한 드보라,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한 엘리야, 예기치 않은 고난과 재앙에 맞서 투쟁하는 욥, 바벨론과 메대 제국의 동화정책에 맞선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들이 그러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니엘서를 함께 읽었습니다. 다니엘서는 조금 특이한 책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다니엘서는 성문서에 포함되는데, 그리스도교 성서에서는 예언서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서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과 연관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포로로 잡혀간 유다 청년들이 제국의 왕에게 가장 인정받는 자리에 오르는 성공담이 있고, 또 알 듯 모를 듯한 환상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가 수요사경회에서 23주에 걸쳐 요한계시록을 샅샅이 살펴보았는데,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문학적 성격을 가장 짙게 띤 책이 바로 다니엘서입니다.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페르시아 시대까지 살았습니다. 다니엘서는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 믿는 백성들을 억압하는 낯선 땅, 낯선 나라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인해 엄청난 시련을 겪던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탄의 지배에 맞서 저항할 수 있는 힘과 용기, 참된 신앙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요한계시록이 쓰인 것처럼, 다니엘서 또한 이방 땅에 끌려가 굴욕적인 삶을 살게 된 유대 청년들의 현실을 통해 위기의 순간에 신앙인은 어떤 자세를 보여 주어야 하는지를 말해 주려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영웅적 믿음]

  다니엘서 1장을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으로 쳐 들어와서 두 가지를 가져갑니다. 첫째는 성전 기물들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도구들을 들고 가서 자기들의 신전에 넣어둡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들이 믿는 신인 야훼가 무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바벨론 신 밑에 있는 것처럼 만들어 유대 백성의 신앙을 약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유대 왕과 귀족의 자손들 중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 탁월하여 전도유망한 청소년/청년들을 데려갑니다. 그들을 왕궁에 두고 다양한 혜택을 주면서 문화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신들에게 동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바벨론에 충성하는 신하로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엘과 아사랴는 남의 땅에서 끌려가서 이제 벨드사살과 아벳느고, 사드락과 메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약 3년에 걸친 바벨론 제국의 학문과 이념을 주입식으로 교육받게 됩니다. 유대 청년들은 남의 땅에 와서도 여전히 야훼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바벨론 제국이 베푸는 호의와 혜택 속에서 민족과 신앙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제국의 일부로 편입되어 버리고 말까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비록 이름이 바벨론식으로 바뀌고, 바벨론의 학문과 지식을 배우게 되지만, 그들이 제공하는 밥상은 물리칩니다. 책상은 허락하고, 밥상은 물리쳤다는 것이 상징하는 바는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 청년들이 제국적 생활 방식에 따르거나, 육체적 탐욕에 취하지 않았고, 맑은 정신을 유지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공부를 열심히 한 덕에 이들의 학식은 날로 늘어나서 바벨론 제국의 어떤 청년들보다도 뛰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역시 이들은 느부갓네살이 세워 놓은 금신상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하지 않습니다. 그 일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고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 화덕에 던져졌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숨을 건질 뿐만 아니라, 몸에 어떤 상처도 없이 풀려나게 됩니다.

  이후 세월이 흘러 메대 사람 다리우스가 바벨론 왕 벨사살을 죽이고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이때 다니엘은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는 다리우스의 금령을 어기고 야훼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사자굴에 던져지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도우셔서 어떤 상함도 없이 무사히 나오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 본문은 바로 이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니엘서가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그 어떤 위기와 환란 속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키는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불의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정의가 승리하고, 모든 것은 옳은 길로 귀결되리라는 믿음이 다니엘서에 깊이 녹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런 삶의 태도를 통해 자기 상황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과 달리 일관되게 의를 실천하고 실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전 제국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모범이 되고 존경의 대상이 된 것처럼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래야 한다고 다니엘서는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저항하는 그리스도인과 권력에 순응한 그리스도인]

  지난 한국의 100여 년의 현대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들, 역사를 바꾸고 이 땅의 정기를 드높인 현장 한가운데에는 다니엘과 그의 세 명의 친구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 우리 모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가 있습니다. 35년간의 일제 식민지의 굴욕, 외세의 농간과 이념 갈등으로 인해 일어난 한국전쟁, 독재 정권에 맞서서 일어난 4.19 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및 1987년 유월 민중항쟁입니다.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읽지 못하고, 주체적 근대화에 뒤늦은 조선은 1910년 일본제국주의에 병합되고 맙니다. 칼을 찬 순사들로 상징되는 무단통치 10년을 보낸 우리 민족은 민족자결주의라는 세계적 분위기와 더불어 분연히 들고 일어났는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3.1 독립 만세운동입니다. 이때 체포된 사람들 중 그리스도인이 제일 많았고 특히 여성 피검자는 총 471명 중 309명이나 되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3.1운동을 통해 시대와 민족의 아픔을 짊어지는 저항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3.1운동을 촉발시킨 33인의 민족대표 구성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교인이 16명이나 되었고,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는 선교사들이 각 지역에 세웠던 ‘미션 스테이션’(선교 기지)이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미션 스테이션은 선교-의료-교육의 삼각선교가 이뤄지는 선교사들의 활동 공간이었는데, 이곳을 통해 근대문화가 유입되었고, 장이 열리던 곳에 주로 세워졌던 미션 스테이션은 조선 민중들에게 삼일운동의 소식을 알리기가 가장 용이했던 곳이 됩니다. 동시에 당시에 여성의 해방공간으로 작동했던 전도부인들의 활약이 시위확산을 더욱 불붙게 했습니다.

  개신교가 들어온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나라를 빼앗긴 이 땅의 교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사를 자신들의 이야기로 읽게 됩니다. 그래서 내면의 신앙 양심이 역사를 변혁하는 힘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일본제국의 총칼 앞에서 무릎 꿇고 변절하기 전 민족의식으로 고취되어 있던 젊은 양주삼 목사는 1908년 2월 26일자 공립신보에 “경고, 아 한국 예수 교회 형제 자매”라는 글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대한 이천만 동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실 이가 예수교요, 우리 인민의 자유를 회복할 자가 예수교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것같이 우리 대한 민족을 원수의 수중에서 구원하여 줄 이가 예수교다.” 식민지 시절에는 성탄절 연극에서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를 다루고, 에스더를 소재로 하는 일들이 빈번했습니다.

  교육과 선교가 병행되면서 새로운 깨우침을 얻은 다수의 교인들이 주체적 민족의식을 갖게 되면서, 조선시대 면면히 흐르는 선비 정신이 일반 대중들로 확산되고, 인을 이루기 위해서는 몸을 아끼지 않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유교 정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 해방 정신이 만나 상승효과를 일으켰습니다. 3.1 운동을 주도하고 민족독립에 투신했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대체적으로 유학(儒學)에 밝은 양반 출신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일제시대 내내 계속되었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정치적 횡포에 맞서 종교적 자유를 지키기 위한 일련의 훈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의 폭력에 맞서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하나의 선구적인 모델을 형성하도록 도왔습니다. 물론 이때 자발적으로 신사참배에 나선 사람도 있고, 친일파가 되어 일본이 벌인 전쟁을 지지하고 군수 자원을 보낸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습니다만 끝까지 신사참배에 반대한 이들의 모습은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을 때, 한국 개신교는 크게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마치 순수함을 보존했던 처음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그 순수함을 잃고 변질된 것처럼 한국 개신교도 친개신교적 정권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유익을 찾으려고 합니다. 오랜 핍박 속에 있었던 한국 개신교인들은 이승만 장로가 대통령이 되자 그를 적극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려는 기회주의자였고,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해체시키고 친일파도 얼마든지 등용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은 빨갱이(左翼)이라는 딱지를 붙여 살상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1945년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우리의 역사를 차분히 공부해 보면, 지금의 우리나라의 많은 잘못된 제도와 습성이 거의 모두 해방 전후부터 한국 전쟁 때까지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친 개신교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자신의 친일 행적을 숨기고, 민간인을 학살한 전력을 감추며 개신교로 대거 유입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값싼 은혜와 회개하고 용서하는 장치들이 천인공노할 모든 죄인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면죄부를 받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개신교인이 된 사람들은 이승만 정권의 유지를 위해 부정선거에도 협력합니다.

  친일에서 친미로 갈아타고 이승만 정권에 아부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는 이들이 반공을 내세우며 한국 전쟁 이후 계속 권력을 유지해 갔습니다. 이 사이에 독립군 후손들은 가난을 면치 못했고, 정부에 대한 비판은 전부 빨갱이로 몰리며 한국 개신교는 이렇게 정치권력에 기대어 성장하였습니다.

  이런 어두운 시절을 보내고 개신교가 다시 이 사회에 의미 있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바로 박정희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울 때입니다. 박정희는 여러 번의 부정선거와 개헌을 통해 종신 독재를 꿈꾸었습니다. 1972년 유신 체제가 수립되었을 때 모든 권력은 박정희 1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연장되었고, 중임제한 조항은 삭제되었고,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할 권한도 가지고, 국회의원의 3분 1을 임명할 수도 있었습니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권은 사라졌고, 국정감사권도 없어졌습니다. 대법원장과 일반 법관의 임명도 대통령의 권한이었기에 대통령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삼권분립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양성우, ‘겨울공화국’에서)대는 유신 체제에 균열을 내었던 것이 바로 또 그리스도교였습니다. 여기에 우리 교단,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역할은 이루다 말할 수 없는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단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불의가 있을 경우에는 어느 편, 어느 누구의 소행이든 간에 우리는 이를 묵과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땅에 의를 세우는 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군부독재에 맞서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시점은 장공 김재준 목사가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되고부터입니다.

  우리나라는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 눈부신 경제발전을 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인권이 유린 되고, 사회적 약자들은 없는 사람 취급당했습니다. 특히 일본군 성노예제도의 희생자들과 정부가 지원한 기생관광에 동원되는 성노동자 여성들, 원폭피해자들의 인권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이 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리고 이들의 인권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선 것은 바로 한국교회여성연합입니다. 후에는 한국 여신학자협의회도 많은 역할을 합니다.

  박정희 시대가 지나고 이어서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 시절,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두 부류로 나뉘어집니다. 첫 번째 부류는 이승만 정권 시절 권력의 맛을 보고 계속해서 정권에 아부하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국가 조찬기도회에 참석하면서 권력에 빌붙고 자본주의적 욕망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교회 성장에만 힘쓰며, 복 받기를 바라던 이들입니다. 다른 한편에는 민족의 원죄인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통일 운동에 나서고, 독재 정권 아래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을 위해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들과 여성들,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위해 나선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이러한 지형도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편에 서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십니까?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어느 편에 서야 할까요? 무엇이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의 언어와 주장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생명과 평화, 정의와 사랑,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이 사회의 약자들, 억울한 이들의 곁에서 그들과 함께하며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할까요? 아니면 은혜와 축복, 평안과 성장을 추구하면서 부와 권력을 누리고 기득권에 편입하는 길로 가야 할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원수를 사랑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이를 위해서도 기도하는 길을 가야 할까요? 아니면 신앙의 이름으로 동포를 적으로 만들고, 이웃 종교들을 무시하고, 남들을 배제하고, 혐오 발언을 쏟아내며 차별하는 길을 가야 할까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 참된 진리와 올바른 신앙의 길은 분명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풀무불에 던져졌고, 굶주린 사자의 우리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진수성찬을 물리쳤습니다. 그들은 제국과 문명의 학식과 지식을 배워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합니다.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를 영어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저항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생명 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에 저항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십자가를 져야 할까요?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게을러지는 자신의 안이함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익숙한 것에 머무르며 안주하려는 나태함과도 맞서 싸워야 합니다. 넉넉하게 품어내지 못하고 아주 작은 일에도 쉽게 흥분하고 마는 우리의 밴댕이 소갈딱지만도 못한 좁은 마음에도 저항해야 합니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분열하는 잘못된 습관도 고쳐야 합니다. 사회의 구조적 불의에 맞서 싸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분노에 가득 차 있고, 그 분노가 시도 때도 없이 분출하여 삶의 태도가 너무나 공격적인 것은 아닌지도 성찰해야 합니다.

  동시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적인 것을 무시하고 사적 이익을 위해 제멋대로 하는 인간들, 법 위에 서서 법을 주무르면서 국민 대다수에게 해를 입히는 인간들과도 맞서 싸워야 합니다. 스스로 찾아보고 점검하지 않고 남들이 하는 말이 거짓말인지도 모르면서 믿어버리는 어리석음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사탄의 세력은 제한 없는 권력과 폭력의 남용, 남을 업신여김, 돈이 주는 환상, 온갖 속임수를 통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일본이 후쿠시마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겠다는 것도 단순하게 보면 결국 그것을 안전하게 보관할 때 발생하는 비용을 아끼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돈을 아끼려고 모든 생명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호 하는 우리나라의 현 정부, 정부의 눈치를 보는 언론과 법조계, 권력을 잡기 위해 진실을 가리는 모든 정치인, 기득권의 카르텔 속에서 일반 서민을 농락하는 이들에 맞서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선포해야 합니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이 짙었을 때에도 계명성은 동쪽으로부터 밝아 오듯이, 우리 주변에 소망하나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것같이 보일 때에 바로 우리가 밝아 오는 한줄기 빛이어야 합니다.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권력을 쥔 자는 스스로 도취 되어 자신의 영화가 계속될 것으로 착각하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손안에 들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우리는 늘 개혁하는 개혁교회 전통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저항하는 프로테스탄트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에서 늘 도전하고 모험하고 저항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안주하려는 마음, 게을러지는 마음, 돈에 넘어가려는 유혹과 맞서 싸우십시오. 정부의 어리석은 정책에 목소리를 높이고,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면서 남을 못살게 구는 인간들과 맞서 싸우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싸움은 혈기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 분의 길과 진리를 따라 싸우는 것입니다. 모든 사탄과의 싸움에서 일주일도 승리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공의와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엄혹한 시절에도 굳건히 주님을 믿는 신앙을 지켜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결단하는 이들을 주님께서 보호하시고, 털끝 하나 사탄에 세력에 넘어가지 않도록 돌보시는 것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해 주셔서, 우리 또한 불의에 맞서 싸우는 주님의 군사가 되게 하여 주소서. 먼저는 내 게으름과 안일함, 나태함과 용기 없음을 이겨내게 하여 주소서. 주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려 세상 풍조와 인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게 하여 주소서. 모든 생명체를 못살게 구는 죄악에 세력이 넘실거릴 때 우리를 보내 주시고, 우리가 용기를 지니고 나아가게 하여 주소서. ‘예’ 할 것과 ‘아니오’ 할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며, 주님께서 먼저 지신 그 십자가를 본받아 우리 모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좁은 길을 따르게 하여 주소서.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생명을 살리고 사랑을 넘치게 하는 일에 앞장서게 하소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은혜의 주님, 이 시간 정성을 모아 귀한 예물을 드립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저희 삶에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니 넘치는 감사를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으로부터 온 충만함과 감격으로 저희도 주님께 기쁨으로 드리게 하여 주소서. 저희가 세상의 헛된 욕망과 욕심을 버리고 주님 주신 것에 주목하며 늘 만족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가질 때 보다 이웃과 나눌 때 더 큰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안의 감사와 기쁨으로 더욱 신실한 믿음직한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물질뿐만 아니라 삶으로 드리는 저희의 예물도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게 하여 주소서.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고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순결함을 지켜냅시다. 죄와 죽음의 세력과 맞서 싸우고, 사탄의 유혹 앞에서 말씀으로 승리합시다.

* 축도

  지금은 산 자에게 사랑을, 죽은 이에게는 평화를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사귐, 애틋한 위로가 사랑과 지혜의 영, 거룩한 영의 가르침에 따라 불의에 맞서 저항하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생명사랑 교우들 위에, 함께 예배하고 선교하는 전국의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