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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희 목사] 주님의 시선과 우리의 응답 – 2025년 5월 4일

열왕기상 3장 5-10절, 요한복음서 4장 31-38절

[솔로몬 이야기]

오늘 우리가 이야기 나눌 말씀은 ‘솔로몬이야기’예요.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라고도 불려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지혜는 뭔가요?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솔로몬이 왜 지혜의 왕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한번 살펴봐요.

솔로몬은 자신의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기브온 산당에 자주 갔습니다. 여느 때처럼 그곳에 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밤에 솔로몬의 꿈에 하나님께서 찾아왔습니다. 그러고는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니, 나에게 말해 보렴.” 여러분이 솔로몬이었다면 뭘 구했을 것 같나요? 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는 게 있니?”라고 여쭤보신다면, 뭐라고 대답할 건가요?

솔로몬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직 왕으로서 잘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여기, 이 많은 백성을 누가 다스리고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 지혜로운(듣는) 마음을 주셔서 제가 백성들을 잘 재판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게, 알아차릴 수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은 이 솔로몬의 대답이 무척 마음에 드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솔로몬의 이 청을 들어줄 뿐만 아니라, 구하지 않은 부귀영화도 함께 주셨어요.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마음, 선한 것을 선택하는 마음에 기뻐하셨던 거죠.

솔로몬은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왕이었어요. 왕으로서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오래 살거나, 부자가 되는 거, 내 원수를 무찌를 수 있는 강한 힘이 아니라 이렇게 많은 하나님의 사람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거, 그럴 때 내게 부족한 게 뭐지?에서 시작됐다는 거예요.

[듣는 마음과 분별할 수 있는 능력]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에는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되어있는데, 좀 더 본뜻을 잘 이해하려면 ‘듣는 마음’이라고 보는 게 더 좋아요.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거, 사람들을 재판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잘 듣는 것에서 시작되는 거죠. 누군가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엉뚱한 답을 내놓기 십상이죠. 잘 듣는 것, 귀 기울여 듣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을 넘어서, 마음을 다해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는 태도예요. 그래서 그 말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거죠. 자세히 보고, 누군가의 눈물 속에 있는 아픔까지 볼 수 있는 능력이에요.

그리고 이 듣는 마음은 잘 고르는 마음도 함께 있어야 해요. 솔로몬은 듣고서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는 능력도 함께 구했거든요. 그랬을 때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준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지혜는 잘 듣고, 선한 것을 고를 줄 아는 능력이에요.

[나와 너 사이에서]

우리에게 언제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나요? 목사님이 생각하기에 사람 관계, 친구 관계가 가장 어려운 거 같아요. 그래서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 가장 긴장이 되기도 하죠. 우리에게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것, 그리고 내 선택들, 말과 행동이 선한 것인지 고민해 보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이것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마음이기 때문이에요. 더 친해지고, 신뢰를 쌓고, 이해심이 넓어지는 과정이거든요. 그 마음을 잃지 않고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솔로몬은 이 처음의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지 못했거든요. 처음에는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어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땅을 차지하기도 했고, 먹을 것도 부족함이 없었어요. 그의 지혜는 뛰어나서 곳곳에서 그 지혜를 배우기 위해 솔로몬을 찾아오기도 했어요. 그런데 점점 솔로몬을 듣는 마음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사람들의 아픈 소리도 듣지 못했어요. 결국 하나님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고, 이 나라는 갈라져 버렸어요.

오늘 솔로몬의 이야기를 잘 기억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들으려는 마음, 올바르고 선한 것을 고를 줄 아는 능력, 다른 사람의 눈물에서 아픈 마음을 볼 줄 아는 눈을 갖는 사람으로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지켜내는 사람으로 자라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지혜를 허락해 주세요. 내 마음과 귀를 열어 나에게 다가오는 생명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도 허락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아이들에게 요구되는 당연한 것들?]

열왕기상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혹시 어린이 청소년들을 향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셨는지요? 우리 아이들에게만 이런 마음을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아이들이 배우는 위치에 있다는 생각에 우리도 모르게 많은 걸 요구합니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하고, 배움에 게을리해서는 안 되고, 넓은 이해심도 요구합니다. 물론, 이때의 많은 경험이 이들의 자산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든 의문은 우리들은 언젠가부터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경청하는 모습보다는 나랑 맞지 않으니까 속 편하게 관계를 끊거나 적당히 유지하는 정도, 아이들에게는 싫어하는 것도 할 줄 아는 힘을 키워야 해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만큼 힘을 들이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서 듣는 마음, 분별하는 능력은 우리가 더 열심히 배워야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일은 어린이날입니다. 어린이 관련 기사를 찾다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는데요, 지난 2일 시민단체들이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앞에서 “노키즈존은 차별이다”라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저리가라는 그 시절 그 때의 풍습은 여전히 형식만 바뀐 채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경향신문의 한 연재 기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보호자의 과잉보호도 문제지만 어린이가 만드는 소란을 이해할 사회적 여유도 줄어든 게 사실이다. 종종 무책임한 보육 방식이 갈등을 키우지만, 과연 그에 대한 최선의 대응이 ‘노키즈’라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선행학습이 대세라지만 차별과 선별까지 선행할 필요는 없다. 약자 앞에 ‘노’를 붙이는 게 얼마나 망측한지 모르는 것이 어른이라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경향신문, 약자 앞에, 어른 편의 위해 외치는 ‘노’는 NO!, 정유라)

[주님의 시선 – 사회적 관습과 통념 너머에]

요한복음서 4장의 시작은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곳에서 예수님과 한 여인의 대화로 시작이 됩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한낮에 우물을 길으러 옵니다. 이 여인에게는 사연이 있습니다. 이미 남편을 다섯이나 가졌고, 지금 남편도 남편이라 보기 힘든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손가락질받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을 길으러 오지 않는 시간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며 여인에게 말을 걸죠. 더군다나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는 당시 관습도 무시하십니다.

당시 사회의 관습과 통념에 사로잡혀 익숙하게 살아가던 그 여인에게 다른 시선을 보여주십니다. 여인의 마음속 깊숙이 익숙해져서 깨닫지 못한 그 갈증을 예수님은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익숙한 것 너머를 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틀 안에 갇혀 보지 못하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주님의 시선은 또한 제자들이 보는 것 너머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추수의 때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거둘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주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아직 때가 아니라 말합니다. 이방 땅이고, 사마리아 사람이기 때문에 추수는 나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이 기회이고, 지금이 복음이 임할 때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시선은 익숙한 관념과 통념을 넘어섭니다. 시간의 기준, 사람 간의 경계, ‘저들이 자격이 있는가?’라는 우리의 생각까지도 넘어섭니다. 그 시선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저 익은 곡식을 보라는 말을 듣지 못하고 고개를 들지 않고 숙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주님의 시선에 응답하지 않는 우리는 여전히 나중을 외치며 무기력하게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틴 루터 킹의 편지]

1963년, 미국의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시절.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버밍햄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이끌다가 체포됩니다. 그는 그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는 텍사스에 사는 한 백인 형제로부터 막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유색 인종들이 결국에는 평등한 권리를 얻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당신은 너무 성급하게 종교적인 조급함을 가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교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의 이천 년이 걸렸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 땅에 실현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법입니다.’”

“시간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시간은 파괴적으로 사용될 수 있고 생산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사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은 선량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 비해서 시간을 훨씬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사악한 사람들의 증오에 찬 언행뿐만 아니라, 선량한 사람들의 겁에 질린 침묵에 대해서도 회개해야 합니다. 인류의 진보는 필연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다 보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진보는 기꺼이 신의 협조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이 없다면 시간은 사회를 정체시키는 세력의 동맹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하는 데는 적절한 시기가 따로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간을 창조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약속을 실현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국가정책을 인종 불평등의 모래밭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단단한 바위 위로 끌어 올려야 할 때입니다.” (클레이본 카슨 엮음, <마틴 루터 킹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바다출판사, p 251-252)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거둔다.]

우리의 역사는 수많은 변곡점마다 ‘지금’을 외쳤던 자들의 목소리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용기와 희생으로 조금씩 진일보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익숙함과 사회적 관습과 통념을 넘어 ‘왜’라는 질문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때로는 시대의 조롱을 감수하면서도, 때로는 고독하게 침묵 속에서 질문을 키워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메아리처럼 울려 퍼져 다음 세대의 대답이 되었고, 사회를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에게 더 강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말이 옳다. 수고는 남들이 하였는데, 너희는 그들의 수고의 결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대의 틈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다가 비판을 받고, 소외를 겪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누군가의 희생, 죽음으로 이 세상을 바꿔야 합니까?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주님의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늘 경계 너머, 질문하는 자들, 소외된 자들, 그리고 그 틈에서 진리를 찾는 자들을 향해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아라. 이미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었다.” “지금이다.” 그리고 다시 희망의 씨를 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주님의 시선을 따라 우리도 지금을 살아가게 하소서. 익숙한 관습에 안주하지 않고, 들을 귀와 분별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누군가의 희생 위에만 기대는 자들이 아니라, 오늘을 책임지는 믿음의 사람들로 서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