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안규식 목사] 첫째가 된 사람들이 꼴찌가 되고 – 2025년 7월 27일

창세기 18장 22-30절,  마태복음서 19장 23-30절

이 세계의 악과 고통,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참여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와 진리가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과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에게 가득하시길 빕니다. 연일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위도 문제지만 이전에 내렸던 극심한 호우로 인해 목숨을 잃은 분들, 집이 물에 잠기고 삶의 터전을 잃은 분들의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매우 안타깝게 합니다. 한국 뿐 아니라 필리핀에서도 일주일이 넘게 폭우가 계속된데 이어 태풍 코-메이로 인해 현재까지 25명이 사망했고, 무려 27만 8천명이 이재민이 되어 대피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아픔을 겪고 있는 곳은 팔레스타인입니다. 이스라엘의 연이은 폭격과 가자지구 봉쇄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기아 상황이 심각해져서 식량이 없어 굶어 죽는 아사자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지는 지난 21개월간 지속된 가자지구 전쟁 아사자 중 약 40퍼센트의 아사자가 최근 며칠 동안 발생했다고 합니다. 2023년 10월 7일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올해 7월 23일까지 총 111명의 가자지구 팔레스타인들이 굶어 죽었는데, 그 중 최근 며칠 동안 발생한 아사자가 43명이 된다고 보도했습니다.

폭염과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 더 나아가 기후비상사태 문제도 심각하지만 한국사회 안에서 발생하는 일들, 특히 우리의 이웃인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고통 역시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지난 25일 포항 야산에서 폭염 가운데 제초 작업을 한 네팔 국적의 40대 노동자가 온열질환으로 사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22일부터 폭염경보가 내려졌음에도 제초 작업이 진행되었고, 2시간 작업에 20분 휴식이라는 지침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또한 우리를 경악하게 한 일은 전남 나주의 한 벽돌공장에서 스리랑카 이주노동자를 화물에 묶어 지게차로 들어 올리며 학대하고 인권을 유린한 사건이었습니다. 뉴스와 동영상으로 퍼진 지게차 학대 영상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큰 분노를 불러 일으키고, 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참담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의 암울하고 고통스런 현실을 보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의 악과 고통스런 현실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의 불의한 현실과 고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또 이 세계에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기 위해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오늘 읽은 창세기 본문의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마태복음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좁혀진 거리, 하나님의 정의를 깨닫다 (창세기 1822-30)

오늘 읽은 창세기 본문의 내용은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흥정하는 듯한 대화로 유명합니다. 하나님은 소돔을 심판하러 그곳으로 가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 오는 저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거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한 일이 정말 나에게까지 들려 온 울부짖음과 같은 것인지를 알아보겠다.”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획이 단지 소돔과 고모라에 가서 그들의 죄를 확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러 간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요청합니다. “주님께서 의인을 기어이 악인과 함께 쓸어 버리시렵니까?”

이렇게 해서 소돔과 고모라를 사이에 둔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적 대화가 오고갑니다. 처음에는 의인 50명에서 시작합니다. “의인 쉰 명을 보고서도, 그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아브라함의 이 요청은 두 가지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과 함께 멸망당하는 것이 정당한지를 묻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약 그곳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들을 봐서라도 소돔과 고모라에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하나님의 자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요청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소돔 성에서 내가 의인 쉰 명만을 찾을 수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라도 그 성 전체를 용서하겠다.”

이제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는 의인 숫자를 두고 어떻게든 의인을 찾아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려는 아브라함의 노력과 아브라함의 요청에 맞추어 자신의 뜻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변화로 채워집니다. 처음에는 의인 50명에서 그 다음 45명, 그 다음 40명, 그 다음 30명, 그 다음 20명, 마지막으로 10명을 끝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사이에 둔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흥정같은 대화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 속에서는 몇 가지 특징이 눈에 들어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져갔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대화의 시작은 23절에서처럼 “아브라함이 주님께 가까이 가서 아뢰었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전에 2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고 합니다. 이 변화가 가키키는 바는 그대로 서 있는 존재였던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 가운데 사는 의인들의 구원을 위해 중보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가 점점 가까워지는 변화는 아브라함에 제시하는 의인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변화에서 나타납니다. 의인 50명에서 시작해서 10명에 이르기까지 그 숫자가 점점 줄어들면서 아브라함의 간구와 요청도 과감해집니다. 이렇게 줄어드는 의인 숫자의 변화는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의 폭이 점점 줄어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소돔과 고모라가 구원받을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커집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기준이 되는 의인 숫자가 줄어들수록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의지 역시 점점 크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의인 숫자를 줄이며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해 달라는 아브라함의 요청에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결심과 그 기준이 점점 바뀝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모두 진멸하겠다고 하셨지만 아브라함이 제시하는 의인 숫자가 줄어듦에 따라 하나님은 이를 수용하심으로써 그분의 자비하심이 더 크게 드러나고, 이로써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 가능성도 커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내용을 이해할 때,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가 두 도시의 구원을 두고 숫자 놀이하는 것처럼 표면적으로 이해한다거나 혹은 인간의 요청에 따라 불변의 하나님이 변할 수도 있다는 공허한 신학적 논쟁에 빠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대신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요청에 의해 그 생각을 바꾸시는 것만으로 이해하기 보다 과연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구원할 의인의 기준을 50명에서 10명으로 낮추면서 자신 역시 겸손히 낮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7절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을 “티끌이나 재밖에 안 되는 주제”로 표현하기도 하고, 30절, 31절, 32절에서는 “주님! 노하지 마시고”라 하면서 하나님께 자비와 환대를 요청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낮아짐은 멸망을 앞둔 이들, 고통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을 위한 낮아짐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낮아짐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더 크게 드러내고, 소돔과 고모라가 구원받을 가능성을 점점 높였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통찰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해 낮아질수록, 다시 말해 고난당하는 자들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둘수록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총이 드러나며, 이 세상은 그렇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더 합당하게 빚어져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고난을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불의에 분노하고 차라리 이들의 죄를 응징해 달라고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응징하는 정의가 아닌 회복하는 자비를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브라함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세상의 죄악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뜻을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우리는 불의한 세상과 고통의 경험 속에서 이를 회피하거나 무관심해집니다. 이 세계의 현실에 관심을 가질수록 더 상처받고 자신의 무능력으로 인해 절망합니다. 아브라함 역시 그러했습니다. 처음에는 의인 50명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50명의 의인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찾고자 하는 의인의 수가 점점 내려갈수록 아브라함은 낙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찾고자 하는 의인은 없었어도 그 과정 속에서 아브라함은 의인 50명이 아니라 의인 10명이 있더라도 그 성 전체를 용서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상의 불의함과 고통스런 현실을 외면하거나 무관심해질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의 구원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명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고통 자체를 즐기고 싶은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그 고난과 아픔이 사명(使命) 곧 하나님의 뜻으로 바뀔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난에는 반드시 사명이 있습니다. 고난 받는 자는 그 사명을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한국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 규정하고 고난의 역사를 지닌 한국이 감당할 사명이 있음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물질의 종 아닌 것이 우리에 의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권력이 정의 아닌 것, 종내 권력이 정의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 우리로 인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불의의 세력이 결코 인생을 멸망시키지 못하는 것이 우리로 인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사랑으로써 사탄을 이기고 고난당함으로 인류를 구한다는 말이 거짓 아님을 증거하여야 하고, 죄는 용서함으로만 없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천하 앞에 증거하여야 한다. 온 인류의 운명이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때로 고난 당하는 자의 고난이 아무 의미 없고, 강한 자들의 잔인함과 오만함에 대해 하나님조차 침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사실 오늘 읽은 창세기의 본문은 이와 같은 깊은 신학적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원전 587년 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포로가 된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물었던 질문입니다. 그 질문은 오늘 본문 25절에 나와있습니다. “그처럼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게 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닙니다. 의인을 악인과 똑같이 보시는 것도,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닌 줄 압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께서는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사와 우리 삶에 목적도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 바로 이 질문에 대해 유다인들이 발견한 계시적 대답이 바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였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결코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은 아브라함처럼 이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그 짐을 짊어진 사람들을 통해 이 세상을 향한 자신의 은총을 보이신다는 것,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 것처럼 이 세상 역시 그렇게 고난받는 자들과 이 세상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이 나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꼴찌만이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 (마태복음 1923-30)

다음으로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본문에는 재물이 많은 어떤 젊은이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 대화의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재물이 많았던 한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을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결국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이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놀람은 우리들의 놀람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가진 부자 청년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재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 청년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요청을 거절함으로써 그가 구한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자 청년과는 달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가진 재물이 많아서 이 세상의 피라미드 구조에서 가장 정점에 있는 첫째였던 부자 청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고, 반대로 가진 재물이 적어서 이 세계의 꼴찌였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가 된 사람들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들이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 본문을 읽을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와 구원은 단순하게 마음의 평화를 주거나 죽고 나서 평화롭게 천사들과 손잡고 노는 그런 환상 속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유나 평화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 머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본문에서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를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 안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구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나사렛 예수의 말씀과 삶을 따르는 자들이 지금 여기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랐던 자들은 구체적인 인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뚜렷하게 보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이 세계가 어떻게 회복되어야 할지를 보았고, 이 세계의 모습과 자신들이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매우 다르다는 것 심지어 서로 대립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폭력으로 평화를 약속하는 정치, 약자를 착취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기 자랑과 자기 만족의 문화, 위선적인 종교와 거짓된 우상숭배의 이데올로기가 민중의 아편이 된 시대 안에서 자신들은 이런 사회에서 혜택을 받는 첫째가 아닌 착취당하는 꼴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들 안에서 점점 구체화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꼴찌가 아닌 첫째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의 첫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꼴찌가 되고, 이 세계에서의 꼴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는, 그렇게 이 세계의 가치와 질서를 뒤집어 버리는 그런 전복적인 공동체로서 예수와 함께하는 자들에게 구체화되어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부자 청년은 꼴찌가 되어야 했고, 예수를 따랐던 가난한 자들은 첫째가 될 수 있었을까요? 왜 부자 청년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버림으로써 예수를 따르지 못했고, 예수의 제자들은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바지나 어머니나 자식이나 땅을” 버리고 예수를 쫓을 수 있었을까요?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예수를 쫓아 하나님 나라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중심으로 서로 교제했고, 성찬을 나누며 하나가 되었으며, 기도를 통해서 신앙적 생명이 충만했습니다. 여기서 오늘날 사유재산권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 이익을 추구함을 사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활동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독특하게 보이는 특징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초기 예수 공동체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고, 이를 위해 자기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평생 영생을 구하는 삶을 살다 예수님을 만나 영생을 구했지만 결국 가진 것을 버리지 못해 예수를 따르지 못했던 부자 청년이 할 수 없었던 일이 이들에게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한 가지 이유를 꼽자면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 예수를 따랐던 자들은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의 실패와 한계를 뼈져리게 알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와 지위 그리고 명예를 가진 첫째였던 부자 청년과 달리 이들은 이 세상에서 꼴찌 즉 실패자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편안하게 살 수 없는 자들,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자들, 그리고 결코 의로운 자가 될 수 없는 죄인들이 바로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 곧 이 세상의 꼴찌들이자 루저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실패가 철저할수록,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실패한 인생일수록 이들에게 분명해지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 이상 가능한 것이 없다는 불가능성에 대한 깨달음이었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결국 이 세상은 이미 한계 상황에 다다라서 전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없이는 희망이 없다는 파국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실패를 실패 그 자체로 직면할 수 있었고, 이 세상의 파국 그 자체를 직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해서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이 의인이 되지 못한 실패자이기에 서로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자이기에 자기 소유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를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 실패한 자들 곧 꼴찌들이었다는 사실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 이런 실패와 파국은 그리스도인들만 아는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죄악과 타락으로 깊이 물들어 도무지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이 세상에 대해 절망한 사람들 중 일부는 물질로 된 이 세계와 육체는 철저히 악한 것으로서 마음대로 망가뜨려도 된다는 허무주의적이고 퇴폐적인 마니교적 이원론에 빠져 극도의 육체적 도덕적 타락으로 자신의 몸과 세상을 망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과 이 세상의 파국을 직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면하고 포기한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동일하게 인간의 실패와 세계의 파국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파국과 실패를 외면하고 세상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포용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파국을 인정했기에 낭만적으로 다시 세상이 다시 좋아지리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 세계의 고통스런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매우 급진적인 삶을 가능케했습니다. 이런 이들의 삶의 자세는 베드로전서 4장 7절과 8절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더한 죄를 덮어 줍니다.”

만물의 마지막, 이 세상의 끝에서 이들은 뚜렷한 정신을 유지하고, 기도를 통해 자신 내면 안에 신성한 생명력을 키우고, 서로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아프게 한 이 세상을 용서했습니다. 이들이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었고, 이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구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아쉬울 것이 없는 꼴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고통스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참여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제 남은 질문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고난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첫째가 된 사람들이 꼴찌가 되고’입니다. 본문에 나온 전체 구절은 이러합니다. “첫째가 된 사람들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들이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의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고 참여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은 이 세계에서 꼴찌가 된 자들 곧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과 이 세계의 한계를 철저히 경험한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누구라도 고난에서 예외일 수 없고, 나 자신이 고난당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고난을 볼 때,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고난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 역시도 그런 고난을 겪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타자의 고난은 내가 받아야 할 고난을 우연히 대신 받을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가 된 자는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자는 첫째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서로의 자리가 바뀔 수 있는,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장소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고난으로부터 제외된 자도 아니고, 우리 역시 죄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린 파국에 이른 이 세계의 운명을 다같이 맞이할 것입니다. 단지 그 순서가 우리에게 아직 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계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무관심해서는 안됩니다. 나와 상관없는 일로 여겨서도 안됩니다. 이 세계의 고통은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이끄는 초청이며, 우리가 그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그 고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오히려 나에게 구원이 찾아올 것이고, 그만큼 이 세상에는 구원의 은총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