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이상중 목사] 감사의 삶 – 2025년 11월 2일

시편 112편 1-10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나의 앞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나의 뒤에서 나를 밀어주시고, 나의 옆에서 나와 함께 걸어주시고, 나의 안에서 나와 함께 호흡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오늘 우리의 교회와 신앙생활에서 개혁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사무엘상 8장 말씀을 통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체제, 제도, 군대를 의지하기 위해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왕을 요구했던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에서도 발견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았습니다.

이 시대의 왕은 돈, 성공, 명성, 인정, 숫자의 논리 등으로 변형되어 우리를 지배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왕이 없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았음에 있었듯이, 오늘 우리의 문제 역시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왕으로 삼음에 있습니다.

무질서해 보여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섬겼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안전하고 평안할 수 있었듯이 이제 우리도 헛된 우상, 왕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따르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유목사회였고, 농경사회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기 그리고 신대륙인 미국으로 건너가 농사를 지으며 열매를 거두었던 청교도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더 이상 농사를 지어 수확의 기쁨과 감사를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보다 근원적으로 이 세상에서 맺히고 열리는 모든 열매와 결실이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주어진 것임을 다시금 깨닫고 감사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의 왼편에 있는 플래카드에 기록된 말씀인 시편 67:7 “이 땅이 오곡백과를 냈으니,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추수감사주일은 농사를 지어 수확한 결실만이 아니라 우리 삶에 허락된 모든 결실이 하나님이 허락하셨기에 있을 수 있었고, 나에게 허락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주님, 마땅히 드려야 할 삶의 열매를 드립니다.”라고 감사하며 겸손하게 고백할 뿐입니다.

다함께 이렇게 고백하겠습니다. “내 삶에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감사는 나 혼자만의 누림이나 고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혼자 누리는 감사는 하나님이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감사는 언제나 나눔으로 완성되고, 함께 누림으로 온전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온전한 감사의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어떻게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12편이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분문을 통해 ‘감사를 입술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냅시다.’라거나 ‘삶에서 감사의 제목을 찾는 성도가 됩시다.’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더 높은 차원에서 이미 우리 생명사랑 성도님들이 ‘감사하는 성도’의 삶을 살고 계신다는 전제로 ‘감사를 완성하는 성도’, ‘온전한 감사를 드리는 성도’의 삶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복을 누리는 성도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순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먼저 복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라고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복을 누린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3절에 ‘부귀와 영화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의로움은 영원토록 칭찬받을 것이다.’

부귀영화와 의로움이 대체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요? 복을 받아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지만, 그 부귀와 영화에 다른 목적이 있음을 말씀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냥 부귀와 영화를 주셨으면 혼자 잘 누리고, 기뻐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귀와 영화는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의로움’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로움’을 위해 즉, 타인을 위해 또는 피조물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주어진 부귀와 영화입니다.

복을 받아 누리는 사람을 더 구체적으로 정직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은혜롭고, 긍휼이 많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다시 표현했습니다.

5절 이하에서는 은혜롭고, 긍휼이 많고, 의로운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말합니다.

“은혜를 베풀면서 남에게 꾸어주는 사람은 모든 일이 잘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는 사람이다.”(5절) 여기서 끝나면 좋은데 6절에서 “그런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기록합니다.

6절을 통해 우리는 5절과 같이 사는 사람에게 ‘흔들리는 일이 발생하겠구나.’하고 추측해 볼 수 있게 됩니다. 흔들리는 일이 발생하지만, 다만 영원히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는 사람은 흔들리는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악한 사람, 죄를 지은 사람, 이익을 좇는 사람은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는 사람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늘 자신에게 유리하게 무언가가 진행되기를 바라지, 공평하게 진행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어 7절에서 “그는 나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주님을 믿으므로 그의 마음이 굳건하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은혜를 베풀면서 남에게 꾸어주는 사람,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는 사람은 좋은 소식을 듣기도 하겠지만, 반드시 나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8절 “그의 마음은 확고하여 두려움이 없으니, 마침내 그는 그의 대적이 망하는 것을 볼 것이다.” 아하, 이 정도 되면 은혜를 베풀면서 남에게 꾸어주는 사람,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집니다.

대적들이 나를 계속해서 흔들고, 나쁜 소식을 말하고, 두려워할 만한 일들을 만들어 내는데 뭐하러 ‘은혜를 베풀면서 남에게 꾸어주는 사람,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겠습니까? 부귀와 영화가 복처럼 여겨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용기를 내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나누어주니, 그의 의로움은 영원히 기억되고, 그는 영광을 받으며 높아질 것이다.”(9절) 그뿐만 아니라 듣는 이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악인은 이것을 보고 화가 나서, 이를 갈다가 사라질 것이다. 악인의 욕망은 헛되이 꺾일 것이다.”(10절)라고 전합니다.

말씀 처음에 감사는 나눌 때 완성이 되고, 온전해질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타인에게로 피조물에게로 흘러갈 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감사가 될 수 있습니다. 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누구와 나누어야 합니까?

우리가 가진 부귀와 영화, 우리가 누리는 평안과 행복은 바로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긍휼의 열매입니다(4절). 우리가 받은 이 복의 물줄기가 멈추지 않고 흘러가야 할 곳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모든 이들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는 한 장의 사진을 나누고자 합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성령교회(Heiliggeistkirche) 강단에 걸려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는 표지판의 메시지입니다.

그 표지판은 이렇게 환영의 메시지를 선언합니다. “WELCOME ALL SIZES (모든 크기), ALL COLOURS (모든 인종), ALL CULTURES (모든 문화), ALL BELIEFS (모든 신념), ALL TYPES (모든 유형) ALL PEOPLE (모든 사람).”

이 표지판은 교회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감사와 나눔이 나를 아는 사람,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 나의 편인 사람에게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신앙적 도전입니다.

ALL PEOPLE을 환영하는 것은, 우리의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차별 없이 창조하시고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마음을 닮겠다는 결단입니다.

시편 112편의 ‘복 있는 사람’이 은혜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사람(4절)이듯, 우리의 감사는 마땅히 세상이 외면하고, 때로는 편견으로 밀어내는 ‘모든 유형’의 사람에게까지 미쳐야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에게 나누고(9절), 공평하게 일하며(5절),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환대하는 삶은, 세상의 논리에서는 낭비, 손해, 그리고 ‘나쁜 소문(7절)’을 들을 일입니다.

“왜 교회가 돈을 저렇게 써야 하는가?”, “왜 공평하게 해서 손해를 자초하는가?” 바로 이처럼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실패처럼 보이는 순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이기고 기도에서 나아가 행동으로 나눌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시편 112:6: “그런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받은 복을 움켜쥐지 않고 흩어 나누는 역설적인 순종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모든 흔들림으로부터 영원히 굳건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부귀와 영화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로움은 영원토록 칭찬받을 것’입니다(3, 9절).

오늘 추수감사주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날을 넘어, 시편 112편이 제시하는 ‘감사와 복을 완성하는 성도의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는 날입니다.

헛된 우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모신 우리의 삶의 열매를, 자비와 긍휼로 세상에 흩어 나누고 모든 사람을 환대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축복을 누리는 성도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