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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그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라 – 2025년 10월 19일

여호수아 24장 14-28절, 사도행전 3장 22-26절, 요한복음서 15장 18-27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나의 삶을 인도하시는 이가 누구이신지를 늘 기억하여 불안과 두려움이 삶을 이끌어가지 못하게 하십시오. 성령님과 함께 평안을 누리시고, 그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이 나 자신을 위해 소유하고 축적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비움과 나눔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았습니다. 사실 성경의 말씀대로라면, 비우고 나누는 삶은 희생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우고 나눌 때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고,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비움과 나눔의 삶이 가능하지만, 믿음이 없어서 불안과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필연적으로 소유하고 축적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의지해야만 조금이나마 거짓된 평안일지라도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성도는 다른 삶의 방식이 가능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음을 고백하며, 움켜쥔 손을 펴 생명을 살리는 삶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로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세 본문은 서로 다른 시대, 다른 배경, 다른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공통된 물음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당신의 삶을 통해 무엇을 증명하고 입습니까?”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 정착의 마지막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여호수아 24:15)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군중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모세는 말하기를 ‘주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동족 가운데서 한 예언자를 세워 주실 것이다. 그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라.”(사도행전 3:22)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요한복음 15:26-27)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증언하는 삶.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또는 계속해서 살아내야 할 신앙의 길입니다.

먼저 함께 읽은 여호수아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약속의 땅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평안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느닷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오늘 택하라. 너희가 섬길 이가 누구냐?”

여호수아는 왜 이미 하나님을 믿는 백성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까?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여전히 다른 신들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떠나온 이집트 땅의 신, 정착한 곳의 가나안 땅의 신 등등. 풍요, 성공, 안전의 신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흔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말하고 있는 장소는 세겜입니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제단을 쌓았던 자리이자,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세웠던 자리, 결단의 자리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세겜의 자리에서 아브라함이 결단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결단하기를 바라며 질문합니다.

“그러면 이제 당신들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을 내버리고, 마음을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바치십시오.”(여호수아 24:23) 그리고 한 돌을 세워 “증거의 돌”이라 부르며, 그 결단이 말로만이 아닌 표징으로 남도록 했습니다(여호수아 24:27).

여호수아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신앙 선언이 아니라 삶의 결단입니다. ‘나의 집안’, 곧 ‘나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만 적용합니다. 마치 어떤 부분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에게도 “나는 누구를 섬기며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여호수아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오늘 섬긴 이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스스로 주인이 되어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는가. 매일 묻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삶의 첫걸음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결단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결단에서 비로소 신앙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온 집안이 하나님만 섬기시겠습니까?”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했다면, 이제 그 결단은 ‘누구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는 말하기를 ‘주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동족 가운데서 한 예언자를 세워 주실 것이다. 그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라.”(사도행전 3:22)

여기서 ‘무엇이든지 다 들어라.’라는 말은 삶을 건 순종을 뜻합니다. 베드로가 인용한 이 말도 단순한 권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율법과 상식, 체제를 넘어서는 급진적인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이 말씀은 당시 종교 기득권 세력, 교리 등 당시 체제를 흔드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겠다는 결단은 자기 기준, 상식, 경험, 체제의 울타리를 포기하겠다는 결단이자, 옳지 않은 것에 침묵하지 않고 저항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삶을 뒤흔들어도, 위험하게 하더라도 순종하겠다는 선택입니다.

베드로는 또한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언자들의 자손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의 자손입니다.”(사도행전 3:25)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악에서 돌아서게 하셔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 주시려고, 먼저 자기의 종을 일으켜 세우시고, 그를 여러분에게 보내셨습니다.”(사도행전 3:26)라는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즉, 순종은 복종이 아니라 삶의 돌이킴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삶을 돌이킬 때, 우리의 삶은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가 세상 가운데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제자들이 바로 이 말씀대로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다 들었고’, 그 말씀대로 살다가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로 ‘무엇이든지 다 듣는 삶’의 결과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든지 다 들으라.”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의 현실과 많이 부딪힙니다.

미워하지 말라 하시지만, 우리는 쉽게 미워합니다. 용서하라 하시지만, 우리는 이익을 계산합니다. 나누라 하시지만, 우리는 쌓아둡니다.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가라 하시지만, 우리는 넓은 길과 편안한 길을 찾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길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 길은 불편하고, 때로는 상식과 충돌하며, 나의 질서가 무너지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순종은 언제나 값이 따르는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무엇이든지 다 듣는다.”라는 결단은 단순히 경건하거나 도덕적인 결단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삶은 그 자체로 세상의 질서와 충돌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누군가는 그 말씀을 삶으로 증언했습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도 그 길을 걸은 이가 있습니다. 바로 전태일 열사입니다.

1970년 11월13일 스물두 살의 청년 재단사는 평화시장 앞에서 스스로를 불사르며 불의한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 열사의 일기를 보면,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 빈자는 부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읍니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말은 노동 현장의 구호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삶으로 증언한 청년이었습니다. 비인간적 체제, 불의한 체제,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싸움을 싸우며 인간의 존엄을 외친 전태일 열사의 삶은, 오늘날 성도가 어떤 삶을 살아내야 하는지 상기시킵니다.

전태일 열사는 당시의 사회 질서와 종교적 무관심, 그리고 ‘당연한 일’로 여겨지던 불의에 맞서다가 스스로의 생명을 던졌습니다.

세상이 보기에 그는 어리석고 미련했습니다. 하지만 전태일 열사의 삶은 “무엇이든지 다 듣는다.”라는 말씀의 실천이었습니다. 율법과 상식, 체제를 넘어 사랑과 정의의 길을 택한 그의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섬기고, 누구의 말을 듣고 있습니까?”

전태일 열사가 살았던 시대뿐 아니라, 오늘 우리 역시 같은 부름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다면, 우리 또한 세상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여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복음 15:18-19)

네, 성도의 삶은 필연적으로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의 역사 속에서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박해가 따랐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바울과 바나바는 욕을 먹고 돌에 맞았습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언제나 저항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은 세상을 거슬러 흐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단순히 인간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질서 전체를 의미합니다.

복음이 그 질서 안에 들어가면, 충돌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복음은 세상을 흔들어 놓지만,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짓 평화를 깨뜨려 참된 평화를 세웁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복음을 불편해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늘 미움을 받는 자리, 소수자의 자리, 낮은 자리, 불리한 자리입니다.

이러한 고난을 자처해야 하는 교회와 성도를 향해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위로하고 격려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요 15:26–27)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담대히 증언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성경의 말씀에서 보여주시고 또 행하셨듯이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미워해도, 세상이 맞서도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에 우리는 여전히 사랑할 수 있고, 여전히 용서할 수 있고, 여전히 정의를 실현할 수 있고, 복음의 증언자로 살 수 있습니다.

증언자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일상의 삶을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성도에게 붙여져야 할 호칭입니다.

교회가 교회답다면, 성도가 성도답게 살아간다면, 세상은 분명히 교회와 성도를 미워하고 맞설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를 미워하고 맞서는 세상과 싸울 힘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오늘 세 본문이 우리에게 한 가지 답을 제시합니다. “그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라.”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결단,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듣겠다는 결단,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겠다는 결단에서 세상과 맞설 힘이 옵니다.

매일의 일상에서 내 마음의 주인을 점검하십시오. 하나님보다 앞세운 우상이 있다면, 그것을 내려놓으십시오. 예수님의 불편한 말씀 앞에 멈춰 서십시오. 말씀이 나의 기준과 경험, 지식, 믿음을 무너뜨리더라도, “무엇이든지 다 듣겠습니다.”라고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이시고 따르십시오.

세상이 미워하더라도, 세상이 맞서더라도, 진리와 사랑을 증언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성도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