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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김란희 총무] 우리는 누군가의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 2025년 4월 13일

누가복음서 10장 25-37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자, 4.19혁명기념주일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희생과 1960년 시민들의 희생으로 당시 시대의 불의함이 폭로되고, 인간의 어두운 면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과 과거 시민들의 희생으로 과거보다는 좀 더 정의로운 세상과 빛으로 향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한, 성도로서 민주시민으로서 계속해서 정의로운 세상과 빛에 속한 세상을 이루어 가야 하는 바통을 이어받아 살고 있기도 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현상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후퇴한다는 것을 우리는 삶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현재에 안주하며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불의와 어두움을 발견하고 저항하는 삶을 살아내는 성도로, 민주시민으로 살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주 ‘서로 사랑하라.’를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는 삶’은 하나님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들의 삶을 보호하고 책임져야 하는 법 정신’에서 출발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과 잘 어울려서 평안하게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웃, 소외된 이웃, 사회적 약자를 찾아 그들의 삶을 책임지고 보호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이후 제자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요한1서 3:16-18)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듯, 우리의 윗세대가 그랬듯 나의 삶을 희생하여 이웃을 돕는 정의로운 삶, 빛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종려주일이자 419혁명기념주일인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 말씀을 통해, 각자의 삶에서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 또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할지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제목이 붙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먼저 율법 교사는 이미 자신이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할지 시험하기 위해 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고, 기록된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되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율법 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라는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 했으면 참 좋았으련만, 율법 교사는 자기를 더 옳게 보이고 싶어서 한 가지 질문을 더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율법 교사는 갖고 있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에 기록된 ‘네 이웃’에는 정해진 범위가 있음을 율법 교사는 예수님에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정해진 범위의 이웃을 자신은 사랑하고 있노라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이 모든 걸 간파한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통해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에게만 주는 사랑이 아니라 극한의 어려움에 있는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시간, 물질의 희생 등 말이나 이론이 아니라 자기 소유와 삶을 사용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바로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네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랑하는 삶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또 거짓되었는지를 폭로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네가 원수라고 여기고, 혐오하는 사마리아인도 바로 네 이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북이스라엘이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게 정복 당하면서 이방인의 피가 섞인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이들은 스가랴와 느헤미야 본문을 보면, 성전과 예루살렘의 재건을 반대했었고, 그리심산에 자기네 예배처를 따로 건축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사마리아인들은 제사와 예배가 부정한 자들, 사회적으로는 밀려난 자들, 신앙적으로는 이단자들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사마리아인들은 이웃이 될 수 없는 존재이고, 그들의 이웃이 되기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강도 만난 어떤 사람을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도왔다고 말씀하신 이후에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율법 교사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추가적으로 더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시 앞서 하신 말씀을 되풀이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이웃과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본문에 앞선 6:32-3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도로 받을 생각으로 남에게 꾸어 주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죄인들에게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나를 좋게 대하는 사람이 이웃이 아닙니다. 나에게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이 이웃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이웃의 범위는 계속해서 확장되어야 합니다. 또한 삶의 보호와 회복이라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사랑의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군가의 이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김란희 총무님이 나오셔서 ‘현장 증언’을 해주시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군가의 이웃으로 살고 있는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고, 또 이웃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