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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끝까지 견디는 사람 – 2026년 08월 23일

다니엘서 6장 13-23절, 마태복음서 10장 16-23절, 사도행전 6장 8-15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소유, 능력, 지식, 건강, 지위, 힘 등이 우리를 평안하게 할 것 같지만 사실은 오히려 이런 것들이 불안과 두려움을 더 키웁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집착하며 헛된 평안을 바라는 삶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향해 ‘거룩하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켜 살아남았기 때문에 거룩해진 것이 아닙니다. 본래 거룩한 존재인 자신들의 거룩함을 끝까지 지켜냈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호칭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남은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래 적 힘이 이미 그의 안에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존재이기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본래 빛이기에 빛의 역할을 할 수 있고, 본래 소금이기에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이렇게나 대단합니다.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이 ‘남은 자’가 될 수 있는 거룩한 존재임을 알았다면, 이번 주 말씀은 거룩한 존재인 우리에게 이 세상 속에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되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실 제목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불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끝까지 견디라니?’ 그렇지 않습니까? 견뎌야 하는 무언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요청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무엇으로부터 견뎌야 했습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무엇으로부터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 세 본문을 통해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마태복음 10장 1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며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파송의 현장을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사회의 현실은 말 그대로 ‘이리 떼’의 소굴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로마의 평화’를 자랑했지만, 그 평화는 식민지 백성들의 피와 착취, 폭력 위에 세워진 특정인들에게만 해당하는 평화였습니다. 로마는 제국의 질서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거나 반기를 드는 자들을 십자가 처형이라는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공개 처형했습니다.

황제를 신격화하며 통치하는 제국의 시스템 속에서, “예수가 주님이시다.”라고 선포하는 복음은 로마 제국의 근간을 흔드는 불온한 사상으로 여겨졌습니다. 제자들은 언제든 국가 권력이라는 거대한 이리에게 물어뜯길 수 있는 반역자로 몰릴 위험이 있었습니다.

또한 가장 안전해야 할 성전과 종교 지도자들마저 권력과 결탁하여,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자들을 소외시키고 억압했으며,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이용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독점 시장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돈 자루나 무기 하나 없이, 무방비 상태인 제자들을 이 거대하고 폭력적인 구조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리 떼’의 실체를 보여주십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그들의 회당에서 매질을 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나가서, 그들과 이방 사람 앞에서 증언할 것이다.”(17-18절)

“형제가 형제를 죽음에 넘겨주고, 아버지가 자식을 또한 그렇게 하고, 자식이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서 부모를 죽일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을 것이다.”(21-22a절)

법정과 회당이라는 가장 공적이고 종교적인 권력, 심지어 가족이라는 가장 친밀한 관계마저도 ‘이리 떼’로 돌변하여 제자들을 물어뜯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경고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가치, 상식, 그들이 정의롭다고 만들어 놓은 법마저도 거슬러 살아가는 제자들은 필연적으로 세상의 불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이 ‘이리 떼’처럼 여겨지십니까? 우리를 물어뜯으려는 ‘이리 떼’로 느껴질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더 이상 이리 떼로 여기지 않습니다. 세상이 정의롭고 선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이미 ‘이리 떼’의 시스템에 편승하여 안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상은 나와 우리를 핍박하고 고난에 빠뜨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 공동체는 이 세상의 폭력과 거짓과 불의를 더 공고히 함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이리 떼’는 심지어 흉악한 범죄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부당하게 일터를 잃고 거리에 나앉은 노동자들을 향해 “법대로 하라”며 외면하는 합법적인 시스템, 열악한 환경에서 착취당하는 이주 노동자들을 경제 논리와 효율성으로 치부해버리는 기득권자들. 이것이 바로 이빨을 숨긴 ‘현대판 이리 떼’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차별과 혐오가 옳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의 삶은 달라져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와 교회 공동체를, 성도를 불편하게 여기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가 ‘이리 떼’와 같은 세상으로 들어갈 때, 세상이 우리를 불편하게 여기려면 성도가 갖추어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 하반 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이리보다 더 덩치가 크고 사나운 맹수’가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힘에는 힘으로, 권력에는 권력으로 맞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양’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리보다 더 강하게 억압해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양처럼 이 세상 속에 존재함으로 견디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리를 잡아먹을 수 있는 무언가가 되라고 하시지 않고, 이리에게 언제라도 잡아 먹힐 수 있는 양으로 존재하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예수님이 직접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더 강한 존재가 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게 좋은 것이고, 선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양도 우리가 생각하는 양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리 떼’ 같은 세상에서 어떤 양이 되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순진하라”

뱀과 같이 슬기로운 것은 무엇이고, 비둘기 같이 순진한 것은 무엇입니까? 뱀의 슬기는 지금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한 현실적인 분별력을 의미하고, 비둘기의 순진함은 부당한 현실 앞에서도 악의에 물들지 않고 지켜야 할 믿음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진하게 산다고 해서, 이런 태도로 견디며 살아간다고 해서 항상 결과가 ‘개인에게’ 긍정적이거나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다니엘서 6장 7절의 말씀입니다. “이 나라 정승들과 대신들과 지방장관들과 고문관들과 총독들이 모두 의논한 바가 있습니다. 임금님이 법을 한 가지 만드셔서, 금령으로 내려 주시도록 요청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법은, 앞으로 삼십 일 동안에, 임금님 말고,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간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자 굴에 집어 넣기로 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시기한 기득권 세력들이 합법적인 법령을 가장하여 옭아매려 합니다. 30일만 창문을 닫고 피하면 될 일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융통성’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10절에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다니엘은, 왕이 금령 문서에 도장을 찍은 것을 알고도,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 다락방은 예루살렘 쪽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 그는 늘 하듯이, 하루에 세 번씩 그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다.”

결국 이러한 태도의 결과로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23절의 기록에서 보듯 다니엘은 안전했습니다. “그가 자기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에게서는 아무런 상처도 찾아볼 수 없었다.”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살아남아 다리우스왕뿐 아니라, 온 나라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어떻습니까? 사도행전 6장에 등장하는 스데반 역시 이리 떼와 같은 무리에게 둘러싸였습니다.

“그 때에 구레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으로 구성된, 이른바 리버디노 회당에 소속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몇이 들고일어나서,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다.”(9절)

스데반 역시 위협에 잠시 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지하여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다만, 스데반은 억울한 모함 속에서도 분노하지 않고 천사의 얼굴을 유지했습니다. 스데반도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결말은 어땠습니까? 스데반은 성 밖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인 결말은 다릅니다. 다니엘은 살았고, 스데반은 죽었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처럼 살아남아 성공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결말’만을 원할지 모르겠습니다. 내 삶의 결과가 긍정적이고 아름답기를 바라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어땠습니까? 삶의 결과는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나의 결말이 사자 굴에서의 생존이든, 돌무더기 앞에서의 죽음이든, 그 결과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마태복음 16:24-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마태복음 10장 2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성도는 ‘끝까지 견디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리 떼가 득실거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이웃들의 곁에 서서, 세상의 상식과 가치관이 우리를 껄끄럽고 불편하게 여기도록 우리의 삶을 던져야 합니다.

그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더 사나운 맹수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뜻대로 상황이 풀리고 긍정적인 결말만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욕망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통제할 수 없는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오늘 하루 나에게 주어진 믿음의 자리를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끝까지 견딘다는 것은 이를 꽉 물고 고통을 참아내는 비참함이 아닙니다. 어떤 위협과 두려움 속에서도 다니엘처럼 “늘 하듯이” 나의 영적인 일상과 감사를 빼앗기지 않는 평안으로 견딜 수 있습니다. 또한, 나를 향해 날아오는 불의한 세상의 돌팔매 앞에서도, 그들의 혐오와 분노에 동화되지 않고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로 견딜 수 있습니다.

“세상을 견디는 성도의 능력은 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떤 위협 앞에서도 빼앗기지 않는 ‘일상의 감사’와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는 ‘천사의 얼굴’로, 끝까지 양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비록 맹수의 발톱은 없지만, 뱀의 슬기와 비둘기의 순진함으로 무장한 양처럼 세상 속에 당당히 서십시오. 끝까지 견디는 성도님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장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흔들림 없이 이 믿음의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