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남은 자 – 2026년 08월 16일
이사야서 4장 2-6절, 마태복음서 5장 13-16절, 빌립보서 2장 12-18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어느새 무더위는 지나가고 낮에는 아직 조금 덥지만, 선선한 아침과 저녁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더울 수가 있나!’하고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었던 여름이었지만, 결국엔 하나님의 창조 섭리대로 ‘이제야 살 것 같네.’ 싶은 가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가 겪어야 할 고난의 시기 또는 주어지는 과제의 시간은 끝이 날 것이고, 새로운 삶의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 속에 있습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이가 누구이신지를 깨달아 날마다 평안을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이방인들과 같이 세리와 같이 여기십시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긍휼한 마음으로 평화와 통일을 자신의 지식, 경험, 소유로 ‘이 일은 된다, 안된다.’라며 판단하고, 한계 짓는 이들을 향해 더 다가가서 이해하고, 사랑하여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부터도 판단하며 살아갈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성과와 즉각적인 결과물을 요구합니다. 심지어 때와 시기조차 우리의 통제 아래 두고, 효율과 능률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회입니다.
이런 세상의 속도에 익숙해져 살다 보니, 당장 결과가 보이지 않고 언제 열매를 맺을지 그 시기조차 알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 생명, 평화, 정의를 향한 여정은 참 답답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우리조차 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때로 낯설고, 불편하며, 지극히 비효율적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필연적으로 ‘판단하고, 효율과 성공, 결과를 내라고 외치는 이 사회의 흐름’을 거슬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눈앞에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세상의 잣대로는 한없이 비효율적으로 보여도, 여전히 우리 눈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우리와 함께 일하시며 자신의 생명, 평화, 정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제가 요즘 설교를 통해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반하는 거센 세상의 판단과 가치관의 물결을 거슬러 살아갈 수 있는 진짜 힘이 정체성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 때 비로소 우리는 곁눈질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 번째로 마주하는 이사야 4장의 본문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떠한 존재로 부르셨는지, 우리가 가진 정체성의 삶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4장의 배경은 희망을 선포하는 오늘 본문과 달리 참담합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 황폐해졌기 때문에 참담한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을 선포하던 당시 남유다의 상황은 오히려 외형적으로는 안정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종교 지도자들과 기득권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약자들의 권리를 짓밟는 구조적인 불의가 만연한 사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기만하는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교만과 불의를 참지 않으시겠다고 하셨고, 종교 지도자와 기득권자들, 백성들이 의지하던 모든 권력과 소유, 힘, 우상을 무너뜨리고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의지했던 견고하다고 여겼던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불에 타버린 잿더미만 남은 그 폐허 위에서 살게 되겠지만, 그 고난의 시기를 겪은 후 다시 회복하게 되리라고 선포하는 희망의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 이사야 4장 2절의 말씀입니다. “그 날이 오면, 주님께서 돋게 하신 싹이 아름다워지고 영화롭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 안에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는, 그 땅의 열매가 자랑거리가 되고 영광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주님께서 돋게 하신 싹’을 통해 남은 자들과 함께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다시 회복하게 할 주체가 되는 ‘주님께서 돋게 하신 싹’보다 더 주목해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살아남은 사람들’, ‘남은 자’들입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이 ‘살아남은 사람들’, ‘남은 자’는 어떤 사람들을 말합니까? 이들은 단순히 끔찍한 재앙 속에서 운 좋게 목숨을 건진 생존자들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이전의 이사야 1-3장의 본문을 확인해보면, 기득권자들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힘과 자본의 논리에 지배당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기득권층은 땅에 은과 금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화려함으로 치장하면서도, 그 이면에서는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들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하나님 대신 돈, 하나님 대신 힘, 하나님 대신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 하나님 대신 권력이라는 세상의 가치에 기꺼이 자신의 정체성을 내면화하고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말씀들에 반하는 가치들과 타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소유, 힘, 권력만이 정답이라고 외치는 세상의 가치관을 거슬러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효율과 성공을 찬양해도, 묵묵히 하나님 나라의 좁은 길을 고집한 저항하는 소수였습니다. 이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평화와 정의를 붙들게 될 사람들이 바로 남게 될 자들입니다.
남은 자들은 잿더미로 변해버린 온 이스라엘을 ‘주님께서 직접 돋게 하신 싹’과 함께 회복시킬 ‘거룩한 존재’입니다. 거부하고, 견디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처음부터 거룩한 존재들이었습니다. 다만, 끝까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거룩함을 지켜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하다.’라는 호칭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남은 자’는 누구입니까? 여전히 거룩함을 지켜내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거대한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 성과와 효율, 결과만이 사람의 가치를 증명한다고 믿는 이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오늘날의 시대에 저와 성도님들이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가 ‘남은 자’라 불릴 수 있겠습니까? ‘남은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남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태어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을 때 남은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직접 돋게 하신 싹’과 함께 이 세상의 정의, 평화, 생명을 회복시키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정의, 평화, 생명을 회복시켜야 할 남은 자라면, 도대체 무슨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세상 속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차가운 감옥에 갇힌 채, 핍박과 갈등으로 흔들리고 있는 빌립보 교회를 향해 편지를 씁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당시 빌립보는 단순한 헬라 도시가 아니라, 로마 황제가 퇴역 군인들을 살게 하기 위해 세운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이 도시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작은 로마’에 산다는 자부심을 가졌고, 황제 숭배와 로마의 법, 능력주의와 계급을 몹시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립보서 3:20)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황제를 주로 고백하는 빌립보 사회의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이러한 로마의 권력, 부, 지위와 같은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적 불이익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내부에도 있었습니다. 로마 사회 특유의 ‘명예욕’과 ‘계급적 우월감’이 교회 안으로까지 들어와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이 겪는 내외부의 고난을 언급하며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
‘제국의 가치관이나 교회 내의 알량한 기득권 다툼에 휩쓸리지 말고,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방식을 끝까지 고수하라. 내 목적과 욕망이 아니라 내 안에서 소원을 두고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순종하라.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라.’라고 말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아’ 성도로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계속해서 그 거룩함을 지켜내어 자신의 자랑거리가 되어 달라고,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나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어떤 주식이 오를 것이냐, 어떤 집이 가격이 오를 것이냐, 무엇을 해야 이익을 볼 것이냐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더욱 붙잡아야 할 것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은 성도는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성도는 자신의 거룩함을 지켜내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마태복음 본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우리가 뭔데요?” 당시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듣고 있었던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이런 질문이 가능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요, 우리는 권력이 없는데요. 우리는 지식이 없는데요. 우리는 매일 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인데요. 우리는 밀려난 사람들인데요. 우리는 저 종교 지도자들이 말하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인데요. 어떻게 우리가 소금이고, 빛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앞으로 너희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소금과 빛이 될 자격을 주겠다.”라고 조건부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자격을 두고 이야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호하게 선언하셨습니다. “너희들의 존재 자체가 소금이고, 빛이다.”
너희들이 언제까지 저 로마 제국이 가르치는 가치대로 너희들의 존재를 평가하고 판단하고 확인할 것이냐? 너희들이 언제까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판단하는 대로, 남이 너에게 붙인 거짓된 호칭과 정체성에 붙들려 살아가려고 하느냐?
“너희는 소금이고 빛이다!”
그렇기에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있고, 세상을 거슬러 살 수 있고, 정의와 평화,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하다! 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소금!, 내가 빛!’임을 깨달은 자는 자연스럽게 그 삶을 살아나가게 되어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이 세상의 가치관을 거스르며, 생명, 평화, 정의를 향해 살아가는 삶은 자연스럽습니다.
억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억지로 끌어올려 생명, 평화, 정의를 위해 살아가려 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한 상태일 뿐입니다. 또, 그런 상태에서는 오히려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최근 저는 미국에서 시작된 애미서리 영성 공동체를 한국에서도 만들어 가고 계신 ‘유진’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이분을 처음 뵙게 된 건, 7-8년 전 제가 앞서 말씀드린 세상의 가치관들에 지쳐 있을 때였습니다.
반복해서 한 가지 주제로 공동체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바로 “너는 빛이야.”라는 주제였습니다. 당신이 빛임을 깊이 자각하기만 하면, 깨닫기만 하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구렁텅이로 휩쓸려 내려가던 저를 끌어내 준 주제였습니다. “너는 빛이다.” 7-8년이 지났음에도 며칠 전에 만난 유진님은 동일한 이야기를 저에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빛의 존재임을 깨닫기만 하면 되는데”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때부터 억지로 무언가를 증명해서 나를 존재하게 하는 방식에서, 이미 나에게 주어진 속성을 자연스레 발현하는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4장 5절과 6절을 통해 남은 자에게 이런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는, 시온 산의 모든 지역과 거기에 모인 회중 위에, 낮에는 연기와 구름을 만드시고, 밤에는 타오르는 불길로 빛을 만드셔서, 예루살렘을 닫집처럼 덮어서 보호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그의 영광으로 덮으셔서, 한낮의 더위를 막는 그늘을 만드시고, 예루살렘으로 폭풍과 비를 피하는 피신처가 되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잣대와 제국의 논리를 거슬러 ‘내가 소금이고, 빛이다.’라는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 삶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이끄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끝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굳게 잡은 우리의 삶 위에 거룩한 닫집을 덮어 주실 것입니다.
억지로 힘을 주거나 무언가를 증명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내가 누구인가’를 깊이 자각하는 것뿐입니다. 그 정체성 안에 온전히 머무를 때,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께서 폭풍과 비를 막아내는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며, 우리의 삶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세상을 밝히는 착한 행실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주님의 말씀 앞에 서서, 내 안에 이미 심기어진 그 거룩한 빛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 빛을 안고 세상 속에서 넉넉히 승리하며, 날마다 참된 평안을 누리시는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