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내가 그 안에 살겠다 – 2025년 12월 07일
스가랴서 2장 1-13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지난 목요일 저녁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제39회 한국교회 인권상 수상식에 참여하고 바깥으로 나왔는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광화문, 종로5가에서 펑펑 내리는 눈을 맞고 있는 그 순간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 눈으로 인해 바로 몇 분 뒤 제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말입니다.
광화문에서 집까지 13km 정도, 걸린 시간은 2시간 30분이었습니다. 차가 눈길에 미끄러워진 언덕을 오르지 못해 후진해서 언덕을 내려와 언덕이 없는 다른 길을 찾아 겨우 집에 도착했습니다.
삶이 계산대로 계획대로 진행되면 참 좋겠지만, 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런 예측할 수 없는 매일의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에게 일어난 그 일을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로 경험할 것인가’가 성도에게는 중요합니다.
40분이면 올 길을 2시간 30분이 걸렸다고 그 시간 동안 분노, 절망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제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은 아니구요.), 평안한 마음으로 그 상황과 나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평안하지 못하면 그 순간을 온전히 살지 못하게 되고, 그 순간 주어지는 성도의 유익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순간에조차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늘 평안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월요일 제가 공동대표로 있는 ‘기장 정의·평화 목회자 행동’이 주최한 한 모임에서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 김란희 총무님과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 노동자로 600일간 고공농성을 한 박정혜 수석부지회장님 그리고 동료 이지영 사무장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화요일에는 명동에서 고공농성 중인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 고진수 지부장님을 보며 부당 해고 철회를 위한 기도회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목요일에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 제39회 한국교회 인권상 수상식에 참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집단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로 구호품을 실은 배를 타고 떠났던 ‘해초’라는 활동명의 평화 활동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해초님이 탄 배는 이스라엘 군에 의해 나포되었고, 사흘 동안 구금당한 상태에 있다가, 추방당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해초님은 이 일이 아주 위험한 일이어서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기에 구호선단에 오를 결심을 하고 유서를 작성했습니다. 유서에는 “아무 시도도 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적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주중에 제가 만난 세 분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먼저 이들은 성문 밖 사람들, 보호장치가 없는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불의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분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많은 사람이 불의한 현장을 보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고, 불의에 저항하기 위해 연대하는 이들이 생겨난 점이었습니다.
이분들의 삶과 투쟁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지난 주일 정주현 목사님이 설교 마지막 에 소개해 주셨던 클레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나오는 문장이 생각났습니다.
“펄롱은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그 나날을, 수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감탄이 나오는 멋진 말임과 동시에, 우리를 숙연하게 만드는 문장입니다.
대림절은 막연히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화려한 트리나 사실은 의미도 잘 모르는 캐럴을 듣거나 부르는 낭만의 절기로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대림절은 어둠 속으로 빛이 ‘침투해 들어오는’ 시간이기에 성도는 어둠에 맞서는 ‘적극적인 기다림’의 태도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스가랴 선지자가 본 환상에서, 성도가 가져야 할 적극적인 기다림의 태도, 믿음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기원전 519년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막 돌아왔습니다.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예루살렘은 폐허였습니다. 특히 외세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성벽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이때 스가랴 선지자가 환상을 봅니다. 2절입니다. 한 사람이 손에 ‘측량줄’을 잡고 있습니다. 스가랴가 묻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그가 대답합니다. “예루살렘을 재서, 그 너비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려고 간다.”
이 사람은 지금 무엇을 재고 있습니까? 바로 옛 예루살렘의 크기입니다. 과거에 무너지기 전, 성벽이 있었던 딱 그만큼의 땅을 측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전과 똑같은 성벽을 다시 쌓아야겠다.”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이고 행동입니다.
그런데 4절에서 측량을 재려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천사를 맞으러 나온 천사가 측량을 막으며 스가랴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라고 시킵니다. “너는 저 젊은이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알려라. ‘예루살렘 안에 사람과 짐승이 많아져서, 예루살렘이 성벽으로 두를 수 없을 만큼 커질 것이다.’”
측량줄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재려고 했던 천사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더 정확히는 상상조차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일은 무모해 보이고, 불가능하게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측량하는 그 옛 성벽으로 두를 수 없을 만큼 커질 것이다.’라고 하시며 놀라운 비전을 보여주시지만, 우리는 언제나 현실과 조건, 상황을 보며 판단합니다. 믿음은 모험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모험하려 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형편이 이러니까 딱 요만큼만 하자.” “지금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니까 더 큰 꿈은 꿀 수 없어.” “저 거대한 기업과 권력에 맞서 싸우는 건 불가능해.”라고 사람들은 판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현실적인 판단’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비전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측량을 뛰어넘습니다. 우리는 “지금 상황으로는 이 정도다.”라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성벽이 필요 없을 만큼 내가 확장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확장된 도시, 성벽 없는 도시로 위험을 감수하고 나아오면, 하나님 자신이 불 성벽이 되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5절입니다. “바깥으로는 내가 예루살렘의 둘레를 불로 감싸 보호하는 불 성벽이 되고, 안으로는 내가 그 안에 살면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 나 주의 말이다.”
제가 지난주에 만난 해고 노동자분들과 해초님은 처음부터 어떤 거창한 비전을 품거나, 남다른 상상력이 있어서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벼랑 끝에서 해고당하고, 생존권을 위협받고, 더 이상 뒤로 물러설 땅이 없었기에, 선택할 수 있는 투쟁의 방식이 그것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선택이었습니다. 고공농성을 하고, 위험한 바다로 나가는 것. 그것은 승리의 확률을 계산하고 선택한 전략이 결코, 아닙니다.
“그저 인간답게 살고 싶다. 살인을 멈추라. 여기에 사람이 있다.”라고 외면하고 있거나, 듣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또는 기득권자들과 불의를 행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소리, 우리의 소리, 그들의 소리를 전하고 싶은 간절함에서 시작한 죽음을 각오한 그러나 살고자 하는 투쟁의 방식입니다. 자신을 지켜줄 아무런 보호막도, 성벽도 없이 맨몸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방식입니다.
다 무너져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 성벽이 되어주셨듯이, 오늘날 삶의 희망과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과 활동가들의 희생은 바로 ‘불 성벽’입니다.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버텨줌으로써, “아직 정의는 죽지 않았다”라는 사실이 증명됩니다. 그들이 온몸으로 불의를 막아내고 있음으로써, 우리 사회의 최소한의 양심과 인간과 노동의 존엄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이들로 인해 숨을 쉴 수 있게 된 이들, 정의를 이루는데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불 성벽이 아니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해고 노동자, 활동가는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그저 함께 살기 위해 벼랑 끝에 섰지만, 저는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이분들을, 절망에 빠진 세상을 지키는 뜨거운 불 성벽이 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포로 된 곳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이 불 성벽이 되어줄 테니 이제, 그만 포로 된 곳으로부터 뛰쳐나오라고 하십니다.
6절과 7절 말씀입니다. “어서 너희는 북쪽 땅에서 도망쳐 나오너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를 하늘 아래에서 사방으로 부는 바람처럼 흩어지게 하였지만, 이제는 어서 나오너라. 나 주의 말이다. 바빌론 도성에서 살고 있는 시온 백성아, 어서 빠져 나오너라!”
포로 된 신분이었으나 바빌론 도성에서의 삶은 이제 어느덧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익숙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익숙한 곳을 빠져나와 폐허가 된 곳, 성벽조차 없어서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빠져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전한 곳에서 나와야 합니다. 사실은 이 세상의 맘몬과 우상의 포로 된 자로 살아가면서, ‘이곳이 좋습니다.’라고 외치고 있지만 우리는 포로로 살아가는지조차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깨우쳐주고 계십니다. ‘바빌론 도성에서 살고 있는 시온 백성아, 어서 빠져 나오너라!, 이제 거기는 너희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그 거짓된 안전의 성벽에서 빠져나오라!” 성벽조차 없어서 위험해 보이는 곳, 폐허가 된 예루살렘, 바로 우리 이웃들이 떨고 있는 그 ‘광야’로 나오라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바빌론의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성벽 없는 그곳, 폐허 된 땅에 ‘불 성벽’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뛰쳐나온 이들에게는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만이 존재합니다. “바깥으로는 내가 예루살렘의 둘레를 불로 감싸 보호하는 불 성벽이 되고, 안으로는 내가 그 안에 살면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 나 주의 말이다.”
하지만 성벽 밖으로 나가는 일은 두렵습니다. 그때 주님은 8-9절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용기의 말씀을 주십니다.
“8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나에게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기시고, 너희를 약탈한 민족에게로 나를 보내시면서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손대는 자는 곧 주님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자다. 9 내가 손을 들어 그들을 치면, 그들은 저희가 부리던 종에게 노략질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안전한 바빌론을 떠나 세상의 벼랑 끝으로 갈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세상의 계산으로는 우리가 맨몸이지만, 실재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눈동자’ 속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건드리면 하나님은 당신의 눈이 찔린 것처럼 아파하시며 즉각 반응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에게 엄중한 경고이자 사명을 줍니다. 권력자, 자본가, 기득권자들이 함부로 짓밟고 있는 해고 노동자들, 폭격과 기아에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이 바로 ‘하나님의 눈동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들 곁에 설 때,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눈동자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두려움을 이기고 성벽 밖으로 나와 고난 가운데 있는 이웃의 손을 잡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0절과 11절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10 “도성 시온아, 기뻐하며 노래를 불러라. 내가 간다. 내가 네 안에 머무르면서 살겠다. 나 주의 말이다.” 11 그 날에, 많은 이방 백성들이 주님께 와서 그의 백성이 될 것이며,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르시면서, 너희와 함께 사실 것이다. 그 때에야 너희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안전한 담장을 넘어설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해초 님이 “아무 시도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며 위험한 바다로 나갔을 때, 수많은 사람이 깨어난 것처럼, 우리가 용기 내어 나선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날에, 많은 이방 백성이 주님께 나아온 것처럼, 우리가 나아가면 식어진 마음에 정의의 마음으로 타오르는 이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체를 지닌 모든 사람은 주님 앞에서 잠잠하여라. 주님께서 그 거룩한 거처에서 일어나셨다!”(13절)
하나님이 ‘일어나셨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익숙하고 안전한 자리, 성벽을 깨고 나와 부르짖을 때, 당신의 눈동자가 찔리는 아픔을 느끼신 하나님께서 거룩한 거처에서 일어나십니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세상의 모든 소음은 잠잠해집니다.
노동자들을 조롱하던 소리, 전쟁의 포성, 억압자들의 고함 소리는 침묵하게 되고, 오직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만이 온 땅을 덮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다리는 진정한 ‘대림’입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방관자의 기다림이 아닙니다. 안전한 성벽에서 나오셔서, 안전하지 않은 성벽이 없는 성벽 밖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의 불 성벽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적극적인 기다림’입니다.
우리가 움직인 그곳이 하나님이 거하실 바로 그 장소가 됩니다. 우리 자신이 누군가의 성벽이 되려 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그들의 성벽이 되어주십니다. 불의 성벽은 이렇게 안전한 바빌론의 성읍에서 나온 이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내가 그 안에 살겠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 주님이 함께하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이 대림절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