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 2025년 12월 28일
호세아서 11장 1-11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내가 원하는 것을 갖게 되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등의 나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무엇을 통해 얻어지는 평안은 잠깐일 뿐이고, 일시적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오히려 평안을 준다고 생각했던 것들, 기쁨이 되었던 것들이 고통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선이 외부가 아니라 내면으로 향할 때, 그래서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온전한 평안을 깨닫게 되면, 성도는 불완전한 평안, 일시적인 평안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온전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평안을, 날마다 또 어디서나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2025년의 마지막 주일인 송년 주일입니다. 송년 주일은 하나님이 주신 한 해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를 돌아보며 결산하는 시간입니다.
성도님들은 올 한 해 어떤 은혜가 있으셨습니까? 신앙생활 하면서 어떤 감사의 고백을 하셨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셨습니까? 성도다운 삶을 사셨습니까? 책망하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한 해를 돌아보실 수 있도록 질문드렸습니다.
이상중 목사의 한 해는 ‘부족함’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담임목사로서 말씀은 전했지만, 과연 그 말씀대로 살았는가를 생각하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 해를 결산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저 잘했죠?”라고 묻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도님들과 매일 묵상하는 ‘오늘의 예배’ 본문 중 느헤미야를 보면,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하는 모든 일을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느헤미야 5:19), “하나님, 내가 한 일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성전을 보살핀 일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정성껏 한 이 일을 잊지 마십시오.”(느헤미야 13:14),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국의 재건을 위해 총독으로서의 봉급도 받지 않고, 자신의 식탁에서 150여 명이나 되는 일꾼들과 식사를 나누고, 죽음을 불사하고 온 삶을 다 바쳐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을 보살피고,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한 느헤미야 정도는 되어야 부족함이 아니라 “저, 잘했죠?”라고 하나님께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기에 한 해를 돌아보면 하나님께 부끄러움과 죄송스러움이 먼저 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런 부족하고 때로는 어리석은 우리일지라도 은혜를 주셨고, 인내해 주셨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온 부족한 믿음의 삶에도 불구하고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라는 고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만, 하나님의 불길처럼 치솟는 당신의 자녀를 향한 애정 때문에,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내하시며 올 한 해 부족한 우리를 감싸안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성도, 그 감사에 응답하기 위해 2026년에는 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 위해 오늘 우리의 부족함은 무엇이고, 이 부족함을 어떻게 채워야 하겠습니까? 오늘 함께 읽은 호세아 본문과 읽지는 않았지만, 고린도전서 1:26-31의 본문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호세아 본문의 1-4절입니다. “1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2 그러나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짐승을 잡아서 바알 우상들에게 희생제물로 바치며, 온갖 신상들에게 향을 피워서 바쳤지만, 3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4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 처음에는 부모의 손을 꼭 잡습니다. 하지만 조금 익숙해지면 아이는 부모의 손을 뿌리치기 시작합니다. “내가 할 거야!”, “나 혼자 갈 수 있어!”라며 고집을 피우죠. 그러다 결국 넘어지면 서럽게 울며 부모를 찾습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쓰곤 합니다. ‘지가, 지 혼자서 큰 줄 알아.’ 한 번쯤은 써 보신 표현이지 않습니까?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딱 그렇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아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하지만 오늘날 우리 자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린아이’라 부르시며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단지 미성숙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돌봄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뜻합니다.
하지만 돌봄을 받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또는 오늘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 OOO은 나에게서 멀리 떠났다.”
호세아가 활동했던 북이스라엘은 당시 주변 제국인 이집트나 앗시리아의 번영이 하나님보다 더 안전해 보여 그들을 의지했고, 그들의 문화와 삶,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따랐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공격을 막기 위해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다가도, 한편으로는 이집트와 몰래 손을 잡고 반란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인간적인 계산을 통해 이 강대국 저 강대국 사이를 오갔습니다.
오늘 우리라고 다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뜻과 욕망대로 살고자 하지 않습니까? 내 삶에 유익이 될 것 같으면, 하나님이나 말씀, 신앙을 뒤로하고 그 유익을 쫓아서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진정한 삶인지를 계속해서 알려주시고자 어린아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무엇이 따라야 할 진정한 가치인지를 알려주시고자, 참 생명의 삶을 알려주시고자 이스라엘 백성과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지만 오늘의 기록처럼,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멀리 떠나, 제국의 가치, 세상의 가치를 우선순위로 삼아 우상을 숭배하고, 그들의 문화 따르기를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5 이스라엘은 이집트 땅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마치, ‘그래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대로 한번 살아봐.’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해 보입니다. ‘노예의 삶’ 이들이 결국 받아 들어야 할 삶은 노예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예의 삶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경험하게 되는 삶이기도 합니다. 돈의 노예, 인정의 노예, 학벌의 노예, 권력의 노예, 욕망과 성공, 패배주의에 노예 등. 참 생명의 삶이 아닌 다른 가치를 향해, 스스로가 노예로 종속시키는 삶을 향해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7 내 백성이 끝끝내 나를 배반하고, 바알을 불러 호소하지만, 그가 그들을 일으켜 세우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나를 구원해 주리라 생각하며 매달리지만, 그 가치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 가치들은 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절망과 좌절만을 줍니다.
그런데 이제 이 뒤의 구절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인내하고 사랑하며 애지중지 키웠으나, 배신한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버려두어도 되시련만,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8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9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토록 크고도 놀랍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는 애정 때문에, 우리가 부족하지만, 우리가 실패했지만, 다시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 자신이 기꺼이 노예 생활로 돌아갔고, 노예 생활 하기를 자처했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려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오늘 우리 역시도 이렇게 겸손하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참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말씀을 읽다보면 이런 의문이 듭니다. 하나님은 차라리 똑똑하고, 강한 이들을 선택하셔서 자녀로 삼으셨다면 이런 고초를 겪지 않아도 되시지 않았을까요? 똑똑하고, 강한 이들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증명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요? 왜 늘 갈대와 같은 이들, 하나님을 등지고 가는 어리석고 약하고 보잘 것 없는 백성을 선택하셨습니까?
고린도전서 1:28-29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하고 똑똑한 자들을 택하셨다면, 끝까지 ‘내 능력‘을 자랑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비천하고 약한 자들을 택하신 목적은 명확합니다. 삶의 결과물이 내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자신들의 뜻대로 살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잘나지 않은 백성이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믿지 않으며 잘났던 이들을 밀어내고 잘난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잘난 삶과 인생이 참 생명의 삶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 삶이 우리가 쫓아야 할 삶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0-31)
세상의 가치를 좇아 그것을 취해 자랑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자랑하는 삶을 사는 성도는 어떻습니까?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 더 이상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삶, 오직 주님 안에서만 자랑하는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해방감을 줍니다.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멀리 떠나간 삶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좇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에 행복을 주고, 생명을 주고, 평안을 주리라 믿으며 헛된 것을 좇아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계속해서 부르십니다. 그런 거짓된 인생이 아니라 참 생명의 삶, 해방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었습니다. 우리 안에 깊이 뿌리박힌 세상의 가치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불타는 애정, 포기하지 않으시는 인내와 사랑이 있으시기에, 성도는 결국 참 생명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나를 증명하려 애썼던 고단한 삶을 내려놓고,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