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내가 주님을 높이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 2025년 05월 11일
이사야서 25장 1-9절, 시편 23장 1-6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우리 삶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한 주간에도 또는 하루만 해도 많은 일이 일어났고, 경험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일들은 안타깝게도 우리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없습니다.
선택적으로 ‘이 일은 내가 경험하고, 저 일은 내가 경험하지 않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그 일이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일어날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다만 일어난 일을 어떻게 경험할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늘 경험하던 대로 불안과 두려움으로 일어난 일들을 경험할 수도 있고, 아니면 믿음의 태도로 일어난 일들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삶을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기억해 낼 때 성도는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일어난 일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의 태도를 잃지 않는다면, 성도는 삶을 흔들고 불안하고 또 두렵게 하는 일들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감사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한 주간 어떤 삶을 살다가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그렇지, 일어난 일들을 어떻게 경험할지는 나의 몫이지. 하나님과 함께 이 일들을 경험해야지.’라고 고백하며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내가 주님을 높이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더 진하게 우리의 삶과 일상이 주님을 위해 살아가며,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게 되기를 또한 소망합니다.
오늘 이사야 25장 본문 첫 구절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주님,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주님을 높이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라는 벅찬 고백을 합니다.
이사야의 ‘나의 하나님!’, 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멀리 계셔서 가까이 올 수 없거나 어떤 일이 벌어지든 지켜만 보시는 또는 계시는지 계시지 않는지 알 수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직접적인 관계 맺음으로 인한 고백입니다.
교회공동체는 이사야의 고백처럼,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나와 우리와 직접적인 연결이 되어 경험된 하나님 그래서 ‘나의,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임 이후 3/5 정도의 가정을 심방 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성도님들이 ‘우리 목사님’이라고 표현하실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목사님은 성도님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바로 그분입니다.
이상중 목사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성도님들께 ‘우리 목사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의 이름 앞에 ‘나의, 우리의’가 따라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은, 나와 타인 또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긍정적인 경험이 쌓이는 시간입니다.
이런 경험이 쌓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쌓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성을 들여 자꾸 만나야 합니다.
이사야는 “주님께서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고, 예전에 세우신 계획대로 신실하고 진실하게 이루셨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세우셨는지를 알아야 가능한 고백이고, 자신이 알고 있는 말씀으로 일어난 사건을 해석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고백이며, 이렇게 해석된 사건이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 지어질 때 가능한 고백입니다.
주시고 기록된 말씀에 대한 이사야의 끊임없는 묵상, 기도, 깨달음, 실천의 삶이 있었기에 이런 고백이 가능합니다. 세우신 계획을 모르면, 어떻게 그 사건이 하나님이 이루신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말씀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 해석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이루신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이사야의 정성과 노력, 하나님을 묵상하는 이사야의 노력이 긍정적인 상호작용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이사야는 일어난 사건들을 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주님을 높이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고, 예전에 세우신 계획대로 신실하고 진실하게 이루셨습니다.”(1절)
그리고 오늘 마지막 9절에서도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바로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바로 이분이 주님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한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으니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나와 하나님, 우리와 하나님이라는 관계 속에서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그들도 ‘바로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라 이사야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하나님이 나와 관계를 맺고 계시는구나. 그러니 주님을 의지하고, 나의 그리고 우리의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자.’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1절과 9절의 고백 사이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는지 또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이 어떻게 관계를 맺으셨는지에 관한 기록입니다.
“성읍들을 돌무더기로 만드셨고, 견고한 성읍들을 폐허로 만드셨습니다.”(2절), 흉악한 자들의 기세는 성벽을 뒤흔드는 폭풍과 같고, 사막의 열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방 사람의 함성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4b-5a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 한가운데서 함께하시며, 대적들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운이 좋아서, 누군가에 의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들을 바로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라고 이사야는 고백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왜 이런 해석 능력이 사라졌습니까? 일어난 일들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선택을 왜 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에게 왜 은혜가 사라졌습니까? 하나님과 접촉하는 시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꼭 예배당에 나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는 삶의 시간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접촉하지 않는데 어떻게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오늘 이사야 본문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이들, 부를 수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4절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요새이시며, 곤경에 빠진 불쌍한 사람들의 요새이시며, 폭풍우를 피할 피난처이시며, 뙤약볕을 막는 그늘이십니다.”
어떤 이들입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이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이들,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가복음 2:17)
‘나의 주님’이라고 불렀던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 너무나 잘 알았던 바리새파, 율법학자 등 당시 종교 지도자들, 기득권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소외된 이들, 차별받는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 삶이 회복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사야 본문도 정확하게 ‘주님,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이들이 누구인가? 가난한 사람들, 곤경에 빠진 불쌍한 사람들 바로 그들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접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시편 23편은 어떻습니까? 너무나 잘 알려진 이 시편을 ‘읽으며’ 많은 성도가 감동합니다. 이 시편의 고백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편을 읽는 성도 가운데 시편 기자가 고백하는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성도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시편 23편의 배경은 광야입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사람이든 가축이든 살아가는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들이 부족하고 또 불편한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먹을 양식, 마실 물, 햇빛을 피할 그늘뿐만 아니라 광야를 지나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도 알려주지 않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즉, 시편 23편은 삶의 절대적인 고난 가운데 경험하게 된 또는 경험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이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첫 구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이사야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듯, 시편 23편의 시인 역시 ‘주님은 나의 목자’라 고백합니다.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이 경험할 수 있는 시편 23편의 고백이 아닙니다.
특히나 이 시의 제목에 ‘다윗의 시’라고 적혀 있다면 더욱이나 그렇습니다. 왕이 되기 전 다윗이 사울로부터 당한 시련은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때로는 미친 사람으로 연기를 해가면서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왜 부족한 것이 없습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나에게 이렇게 하신 하나님이시니, 앞으로도 나에게 이렇게 하십니다.’라는 믿음으로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전적인 의존의 상태입니다. 다른 곳을 바라볼 여유는 없습니다. 그저 목자의 막대기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먹고, 마시고, 쉬고, 걷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이 되고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을 충성되게 따르는 부하의 아내를 강간하고, 부하는 최전방에 내보내 죽였습니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시편23:4)라는 고백 그대로 ‘죽음의 그늘 속에 있는 이들’이 시편 23편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에는 너무 많이 소유하고, 너무 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소유와 편함을 얻고자 달려온 신앙생활이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사야의 고백, 시편 시인의 고백은 배부르고 편안한 이들이 한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이 한 고백이 아닙니다. 지식으로 한 고백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억압된 상황,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한 뒤 한 고백입니다. 간절하게 찾고, 간절하게 알고, 간절하게 말씀을 살아내면서 만나 관계를 맺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삶에서 소유와 편함을 덜어내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간절함 가운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삶의 예배를 통해 성도는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을 높이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