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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자리가 없다. – 2026년 06월 28일

욥기서 28장 12-28절, 사도행전 17장 23-27절, 요한복음서 8장 31-38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매 주일 저는 성도님들의 평안을 묻습니다. 평안하지 못할 때, 성도는 성도다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이 성도님들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깨울 수 있기를 희망하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다시 상기할 때 성도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우고 쌓으려 합니다. 더 많은 지식을 채우고, 더 많은 경험을 쌓고, 더 많은 소유와 힘을 축적하면 내 삶이 안전해지고 평안하고 행복하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우리의 머리와 손에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와 자원이 있는데, 왜 우리의 삶은 흔들리고 세상은 여전히 불안합니까? 왜 전쟁은 그칠 날이 없고, 부의 불균형은 더 심해지며, 기후 위기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세 본문은 그 이유를 아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사람에게 지식은 있으나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전적 의미와는 별개로 성경은 이 지식과 지혜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오늘 본문들과 더불어 이야기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인 예수님의 말씀,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자리가 없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당시 유대인들 안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이 말씀은 지혜가 너의 안에 있을 자리가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지혜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에게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 안에 지식과 욕망이 꽉 차 있어서, 정작 나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 지혜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너무 배가 부르면 어떻게 됩니까? 그다음에 아무리 맛있는 것을 가져다주어도 맛있음을 느끼지 못하거나, 더 먹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배불러 있는 상태, 이미 포화 상태에서는 모든 감각이 무뎌져서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 세 본문의 말씀을 따라, 우리 내면의 공간이 지식과 욕망으로 가득한 상태는 아닌지, 이미 배가 부른 상태는 아닌지 들여다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욥기 28장의 앞부분을 보면, 사람이 땅속 깊은 곳에 파고들어 광물을 캐내는 장면을 설명합니다. 사람은 캄캄한 땅속 어둠을 뚫고 들어갑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알지 못하는 길, 날렵한 짐승의 눈도 미치지 못하는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기어이 감추어진 금과 은, 철과 동을 캐낸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사람의 능력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보이지 않는 바다의 깊은 곳을 탐사하고, 우주로 위성을 쏘아 올리기도 합니다.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어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하고,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며, 없던 땅도 만들고, 가상이든 현실이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 내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무지하거나 무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탐구하고, 알아내고, 경험을 축적하여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존재입니다. 놀라운 존재입니다. 지식, 경험, 욕망이 이러한 삶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욥기는 사람의 이 위대한 성취를 한참 동안 나열한 뒤에,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에서 얻으며, 슬기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지혜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지혜의 참 가치를 알지 못한다.”

지식도, 지혜도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식도, 지혜도 사람이 얼마든지 얻을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욥기의 말씀은 지식은 사람에게서 발견될 수 있지만, 지혜는 결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어둠 속에서 금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은을 제련할 수 있습니다. 수만 가지의 정보와 기술을 캐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사람의 힘으로 캐낼 수 없다고 욥기는 선언합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정금으로도 지혜의 값을 치를 수 없고, 산호와 수정, 에티오피아의 토파즈로도 지혜와 바꿀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혜가 아주 값비싼 물건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혜는 돈으로 살 수 없고, 인간의 기술로 발명해 낼 수 없으며, 세상의 지식이 산처럼 쌓인다고 해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식과 지혜를 자주 혼동합니다. 지식은 어떤 기술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효과적인지 알려줍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 기술이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를 묻게 합니다.

지식은 내 자산을 늘리고 성공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 성공을 향해 달리는 동안 내가 사람으로서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없는지를 묻게 합니다.

지식은 사람의 겉모습과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 사람의 깊은 아픔과 눈물을 함부로 분석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곁에 머물러 있으라고 합니다.

지식은 개인적인 앎의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깨닫게 하고 그 깨달은 말씀을 살아내도록 이끕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배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식을 쌓지 말자! 이런 말씀이 아닙니다. 저 역시 지식을 쌓아 성경을 분석하고,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많이 배우는 일, 더 많은 정보를 쌓는 일, 더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는 일이 우리를 저절로 지혜롭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어땠습니까? 욥의 친구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정통 신학의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자녀와 재산과 건강을 모두 잃고 잿더미에 앉아 통곡하는 욥을 향해, 욥의 친구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의 잣대를 들이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은 네 안에 숨겨진 죄가 있기 때문이다. 네가 무언가 잘못했으니 하나님이 치시는 것이 아니냐.”

친구들의 말은 교리적으로는 옳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말에 지혜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삶의 신비를, 자신들이 쌓아 올린 지식의 틀 안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옳지 못하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요즘,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성격 검사 심리 검사가 그렇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 유형에 가두어 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로는 위험한 시도가 되고, 사람을 단편적이고 납작하게 바라보게 하거나 편견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시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과 겸손을 잃은 지식, 사람을 이해하기보다 규정하려는 지식은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아픔을 보며 “왜 저런 일을 당했을까? 기도가 부족했나? 믿음이 없어서 그런가?”라고 쉽게 내뱉는 판단들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견뎌왔는지, 그 상실의 눈물 뒤에 어떤 사연이 얽혀 있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의 첫걸음은 “내가 다 안다.”라는 마음, “내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라는 교만을 내려놓을 때 디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 28장은 마침내 선언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요, 악을 멀리하는 것이 슬기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두려움에 떨며 엎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내가 내 삶의 주관자가 아니며,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고백하는 겸손입니다. 이 자기 비움의 자리에서 비로소 지혜의 삶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 안을 스스로 비워내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사도행전 17장의 아테네라는 도시가 보여줍니다.

바울이 발을 디딘 아테네는 욥기에서 말하는 ‘인간의 지식’이 정점에 달한 도시였습니다. 아고라 광장에서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 스토아와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이 모여 세계와 우주, 행복과 윤리에 대해 끝없이 논쟁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세상의 모든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지식의 심장부였던 아테네에서 바울이 목격한 것은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습니다. 도시 구석 구석마다 사람의 손으로 깎아 만든 우상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식과 기술로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실상은 우리가 만든 자본, 경쟁, 효율성이라는 거대한 우상에 짓눌려 살아갑니다. 내 이익과 기득권을 지켜줄 것이라 믿는 수많은 현대판 우상이 우리 내면을 채우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교만하고 꽉 막힌 지식의 도시 한복판에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은 좁은 신전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며, 친히 우리 삶의 경계 속으로 다가오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여기서 ‘더듬어 찾다’로 번역된 헬라어 ‘프셀라파오(ψηλαφάω)’는 아주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벽을 짚고 사물을 만지며 길을 찾는 동작을 뜻합니다.

이성이 눈부시게 빛나던 아테네 지식인들을 향해, 바울은 “당신들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고 자부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교만을 버리고,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이미 가까이 와 계신 하나님을 조심스레 더듬어 찾아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 이르는 여정입니다. “주님, 저는 볼 수 없습니다. 내 지식과 경험으로는 이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라며 내 안의 확신을 비워내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주님의 손을 잡기 위해 조심스럽게 더듬어 찾는 ‘프셀라파오’의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모든 답을 아는 척하는 강한 자를 칭찬하지만, 지혜는 자신이 사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주님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 열립니다. 그렇게 내 힘을 빼고 빈 공간을 마련할 때, 하나님은 이미 우리 가까이 와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요한복음 8장은, 이렇게 더듬어 찾아야 할 지혜가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발끈합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한 번도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혈통’과 ‘종교적 특권’이라는 자부심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오늘 설교의 제목이 된 말씀을 던지십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리가 없다”로 번역된 헬라어 ‘코레이(χωρεῖ)’는 ‘나아갈 공간을 얻다, 전진하다, 영향을 미치다.’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들리기는 했지만, 그들 마음속에 이미 자신들이 쌓아 올린 지식, 욕망, 편견, 전통이 꽉 들어차 있어서, 말씀이 한 걸음도 그들 안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튕겨 나가버렸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주님의 말씀이 자유롭게 거닐며 나아갈 공간, 자리가 있습니까? 아니면 스스로가 이 모든 공간과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지라, 억눌린 자를 자유케 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 말씀이 내 삶 깊숙이 들어오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나의 경제적 이익’, ‘내가 누리는 사회적 기득권’, ‘나와 다른 사람을 향한 혐오와 편견’에 부딪혀 한 걸음도 들어오지 못하고 튕겨 나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식은 한계를 설정하지만, 지혜는 한계를 넘어섭니다. 지식은 판단하지만, 지혜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지식은 내가 중심이지만, 지혜는 하나님이 중심이 됩니다.

내 말씀이 너희 속에 있을 자리가 없다는 예수님의 탄식은, 이천 년 전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말씀 안에 ‘머물러야(메노, μένω)’ 한다고 하셨습니다. 머무르다의 헬라어 ‘메노’는 단순히 잠깐 방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의 짐을 풀고 그곳에 거주하며 끝까지 버텨내는 태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머물게 하려면, 필연적으로 내 안에 있던 악하고 이기적인 것들을 치워내어 빈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욥기가 말하는 “악을 멀리하는 슬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의 일상을 조용히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 우리의 영혼을 배부르게 채우려 애쓰고 계십니까?

내가 다 안다는 교만, 내 뜻대로 삶을 통제하려는 지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안을 가득 채운 세상의 우상들과 이기적인 욕망을 과감히 비워내어, 주님의 말씀이 거하실 넉넉한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할지라도, 손을 뻗어 주님을 더듬어 찾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비워진 우리의 내면에 생명의 말씀이 깊이 머물러, 우리 공동체가 세상의 찢기고 상한 이웃들을 품어내는 넓고 따뜻한 자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오늘 우리가 나눈 이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1b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2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주십니다.”

바울은 지식을 조금 더 쌓으면 언젠가 사랑에 이르게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식이 사랑에서, 지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내가 안다고 여기는 만큼, 나는 타인보다 높아지고, 타인의 말과 아픔을 듣지 않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지식의 꼭대기에 놓인 마지막 계단이 아닙니다. 지혜는 내가 쌓아 올린 앎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 앞에서 “나는 모릅니다”라고 고백하고, 이웃의 고통 앞에서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곁에 머무는 삶입니다.

사람과 사랑. 거의 같은 단어의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미음과 이응의 차이만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에 머물게 하지만, 지혜는 사람이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가 더 많은 말과 더 많은 지식을 자랑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들어와 머물 수 있도록 자신을 비우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