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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너희가 회당과 통치자와 권력자 앞에 끌려갈 때 – 2026년 05월 31일

민수기 11장 24-29절, 사도행전 2장 43-47절, 누가복음서 12장 8-12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고,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이 이미 우리 안에 주어졌음을 깨닫고, 주어진 이 평안을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성령강림주일에 성령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신분, 성적 정체성, 나이, 인종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함께 하셔서 안내하시는 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집트, 로마 등의 제국이 자랑하고 숭배하는 힘과 권력, 돈과 자본, 약육강식, 승자독식, 각자도생의 사회가 아닌 다른 세상과 삶을 향한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령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충동하시고, 인도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갈지 말지의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자신이 가진 소유를 포기할 수 없어서 예수님이 내민 손을 잡을 수 없었던 부자 젊은이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에 반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출발선에 설 수 있었던 제자들처럼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후 첫째주일입니다. 오늘 읽은 세 본문을 통해 지난주에 이어 성령을 받은 성도, 공동체가 어떤 삶을 지향했는지, 그래서 오늘 우리는 어떤 삶을 지향할 수 있는지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민수기 11장의 본문은 광야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해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줄까?”

백성들로 인해 괴로운 모세도 하나님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을 이렇게도 괴롭게 하십니까?”, “저 혼자서는 도저히 이 모든 백성을 짊어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 무겁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돕기 위해 70명을 장로로 세워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려가 거기에서 너와 말하겠다. 그리고 너에게 내려 준 영을 그들에게도 나누어 주어서, 백성 돌보는 짐을, 그들이 너와 함께 지게 하겠다. 그러면 너 혼자서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늘 본문은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70명의 장로에게도 영이 내렸고, 그 순간 장로들이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엘닷과 메닷이라는 두 사람이 장막으로 가지 않고 진영 안에 남아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영이 임해서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달려와서 모세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엘닷과 메닷이 진 안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여호수아가 말합니다. “어른께서는 이 일을 말리셔야 합니다.”

장막이 아닌 다른 곳 즉, 승인되지 않고, 허락되지 않은 곳, 통제되지 않은 곳에서 예언하고 있는데, 이 일은 잘못된 일이기에 막아야 한다고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여호수아의 말은 충성스러워 보이고, 모세의 권위를 지키려는 말처럼 보입니다. 질서를 지키려는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네가 나를 두고 질투하느냐?(너는 지금 나를 생각하여 질투하고 있느냐?) 나는 오히려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 모두에게 그의 영을 주셔서, 그들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여호수아의 걱정과는 달리 모세는 예언을 독점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통제하거나, 제한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세는 “하나님 백성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모세의 이 발언은 굉장히 혁명적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여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발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한 권력자가 중심에 서고, 나머지는 침묵해야 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특정한 사람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머지는 그저 복종만 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영이 모든 백성에게 임하고,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듣고, 말하고, 증언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이것은 당시 제국, 강대국들의 질서와 완전히 다른 길입니다. 이집트의 질서는 바로 한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제국의 질서는 황제와 권력자와 군대와 관료를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말하고, 약한 사람은 침묵해야 했습니다. 높은 사람이 명령하고, 낮은 사람은 복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말 한 “그들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선언은 다른 삶의 길에 대한 제안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특정한 누군가 또는 기득권자의 소유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남성만의 것도 아니고, 목회자만의 것도 아니고, 중심부에 있는 사람만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우리는 교회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마녀사냥이라고 부르는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중세 말에서 근대 초기에 걸쳐 유럽 사회 안에서 나타났던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많은 경우 여성의 말과 지식과 몸과 영성이 의심받았습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와 교회 질서 안에서 승인받지 않은 여성의 지혜는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제도 안에서 승인받지 않은 영성, 남성 사제 중심의 질서가 통제하지 못하는 목소리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교회와 사회는 모세처럼 말하지 않고 자주 여호수아처럼 말했습니다. “저들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 “저들은 승인받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말은 위험합니다.”, “저들의 영성은 의심스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구의 입술을 통해 말씀하실지 우리가 어떻게 미리 정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인간의 권력은 자꾸 성령을 통제하려 합니다. 누가 말할 수 있는지 정하려 하고, 누가 침묵해야 하는지 결정하려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영을 가두지 말아라.”, “내 권위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을 막지 말아라.”, “나는 오히려 모든 백성이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9:38-40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저는 세 본문 중에서 민수기 말씀을 한 주간 특별히 더 묵상했습니다. ‘여호수아의 말이 아닌 모세처럼 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이루려고 하셨던 나라는 독점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아닙니다. 성령 받은 공동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함부로 지우지 않아야 합니다. 성령 받은 공동체는 중심부 바깥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민수기 11장이 보여주는 공동체는 당시 이집트, 제국 등과는 다른 공동체입니다. 한 사람만 말하고 모두가 침묵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모두에게 임하여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증언하는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른 삶으로 이끌어 가려 했습니다. 모세와 함께 한 이 영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평등하고 정의로운 공동체를 위해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행전 2장은 어떻습니까? 성령이 임하자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성령에 의해 생겨난 공동체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44-47절)

당시 로마 제국의 질서는 철저하게 힘과 지위와 소유를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누가 더 높은가,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 누가 더 강한 후원자를 가지고 있는가, 누가 더 큰 명예를 얻는가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약한 사람은 쉽게 밀려났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보호받기 어려웠습니다. 노예와 여성과 이방인은 온전한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다른 방식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지냈습니다.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었습니다. 함께 모였습니다. 함께 떡을 뗐습니다.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 질서 안에서 매우 낯선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혁명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이 당연하게 여기는 원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네 것을 지켜라.”, “더 많이 가져라.”, “네 가족만 챙겨라.”, “남의 필요까지 책임질 필요 없다.”, “약한 사람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나 성령 받은 공동체는 다르게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굶주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외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필요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 소유는 완전히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성령은 이들의 마음만 바꾸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이들의 소유, 소비에 대한 관념도 바꾸셨습니다. 식탁을 바꾸셨습니다. 관계를 바꾸셨습니다. 시간의 사용을 바꾸셨습니다. 삶의 구조를 바꾸셨습니다.

그렇기에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보았을 때,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내가 전에는 보지 못하던 사람을 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고통을 나의 문제로 느끼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내 것이라고 움켜쥐었던 것을 하나님의 뜻 앞에서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자기중심성에서 꺼내십니다. 힘과 권력과 이기주의를 따라가지 않게 합니다.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꺼내십니다. 약육강식의 질서에서 꺼내십니다. 그리고 사랑과 돌봄이 기본이 되는 공동체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공동체는 세상에 불편한 질문이 됩니다.

“정말 돈이 전부입니까?”, “정말 성공한 사람이 더 가치 있는 사람입니까?”, “정말 약한 사람은 밀려나도 괜찮습니까?”, “정말 내 것만 지키며 사는 것이 지혜입니까?” 성령 받은 공동체는 이 질문을 삶으로 던지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누가복음 12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이 누가복음 본문에서 나왔습니다. 특별히 11절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너희가 회당과 통치자와 권력자 앞에 끌려갈 때에, ‘어떻게 대답하고, 무엇을 대답할까’, 또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염려하지 말아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당과 통치자와 권력자 앞에 끌려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말아라. 성령께서 너희가 해야 할 말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 받은 삶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세상과 아무 갈등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그저 마음 편하게 개인적인 종교 생활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기 때문에, 때로 이 세상 질서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회당과 통치자와 권력자 앞에 끌려갈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당은 종교 권력의 자리입니다. 통치자와 권력자는 정치 권력의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종교와 정치의 공식적인 힘 앞에 서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실제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민수기, 사도행전에서 모세와 초대 교회 공동체가 보여주었듯 세상의 질서와 다른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도, 돈도, 힘도, 종교 권력도 최종 권위가 아니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세상 질서에 무조건 반항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순응하기 때문에, 불의한 세상 질서에 순응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도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에 무조건 삐딱하게 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갈등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세상과 다른 자리에 서게 됩니다.

돈이 하나님처럼 대접받는 곳에서, 우리는 돈이 주인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고,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누르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한 자의 울부짖음을 들으신다고 말해야 하고, 성공한 사람만 가치 있다고 말하는 곳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해야 하기에 다른 자리에 서게 됩니다. 침묵하라고 요구받는 자리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말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를 충동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향해 우리를 움직이게 하십니다. 그냥 지나치려던 사람을 보게 하십니다. 외면하려던 고통 앞에 멈추게 하십니다. 말하지 않으려던 자리에서 말하게 하십니다. 두려워 숨으려던 자리에서 증언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2장의 말씀은 성령 받은 삶이 얼마나 구체적인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의 질서에 너무 자연스럽게 순응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물어야 합니다.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합니까?

지난 금요일에 저는 우리 교회의 네 분 목사님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질문 앞에 오래 머물게 되었습니다. “왜 교회에 다니세요?”

조금 다르게 말하면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꼭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속해 있어야 할까요? 혼자 하나님을 믿으면 안 될까요? 꼭 교회라는 곳에 함께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두고 다섯 명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긴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우리 마음에 남은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공동체가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이 말은 교회가 완벽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가 늘 세상보다 낫다는 뜻도 아닙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 세상에 아주 낯선 공동체이며 여전히 특별합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삶은 분명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독점하지 않는 삶으로 이끄십니다.성령은 우리를 나누는 삶으로 이끄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침묵하지 않는 삶으로 이끄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다른 삶’으로 이끄십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삶에 목말라 있습니까? 더 많이 가지는 삶입니까?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삶입니까? 더 인정받는 삶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삶입니까?

성령은 오늘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은 오늘도 우리 공동체 가운데 일하십니다. 성령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상 질서가 전부인 것처럼 살지 말아라. 너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그러니 다르게 살아라. 함께 살아라. 나누며 살아라. 두려움 앞에서도 진실을 말하며 살아라.”

교회는 이 다른 삶을 함께 배우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이런 공동체가 어디 있는가를 보여주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아직 부족합니다. 때로 실패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계속 이끄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평등으로, 하나님 나라의 나눔으로, 하나님 나라의 증언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 교회가 오늘 말씀과 같은 다른 삶을 함께 배우고 살아내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생명사랑교회 공동체를 통해 이 세상 한복판에 하나님 나라의 평등과 생명과 사랑과 평화가 드러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