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너희의 예배를 부정(不正)한다. – 2025년 7월 20일
아모스서 5장 18-24절, 요한계시록 2장 8-11절, 마가복음서 13장 1-2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지난 수요예배 때 성도님들께 말씀드렸지만, 성도가 평안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향한 발걸음을 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삶의 상황에 흔들리고 불안하고 두렵고 걱정에 사로잡힌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불안하지 않고, 두렵지 않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의 문제이지만, 이 문제에 붙들려 있을 때 하나님이 아닌 ‘나’만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성에 머문 채 예배를 드릴 때,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한 행사’로 전락합니다. 오늘 이야기 나눌 아모스 선지자의 외침은 바로 그런 왜곡된 예배를 향한 하나님의 거절 선언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지금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성찰하고, 다시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불안과 두려움, 근심이 아니라 우리 안에 주어진 평안을 다시 선택하여 믿음의 삶을 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의 비유로 ‘제자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종은 비록 고단한 삶을 살지만 그래도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가능한 일들에 순종하지만, 제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건 쉬운데, 이건 얼마든지 할 수 있겠는데?’라고 생각되는 일이 맡겨진 것 같다면 그 일은 맡겨진 일이 아닐 수 있고, 마음이 괴롭고, 저항하게 되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쳐서 엎드려야만 하는 일이 보인다면 그 일이야말로 맡겨진 일일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에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 일을 깨닫고, 행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예수님의 말씀은 야고보서의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보서 2:26)라는 말씀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히브리서 11:1의 말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성도는 행함으로 아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이 될 수 있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나는 나이가 들어 이제 그만 쉬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때, 베드로도 인용했던 요엘서의 말씀,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요엘 2:28)를 기억하십시오. 노인들에게도 꿈을 꾸게 하셔서 다가올 날을 준비하는 행함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나는 할 만큼 했다.’라는 생각이 들 때, 바울이 말했던,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립보서 3:13-14)를 기억하십시오. 누구보다 할 만큼 한 사람이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일을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성도는 멈추지 않고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등불이 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말씀이 바로 이런 “행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들으며 행함의 중요성을 다시 되새기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너희는 망한다!” 오늘 아모스 말씀의 첫 시작입니다. “너희는 망한다!” 이 선포를 듣는 청중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의 날이 오기를 바라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날’은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하나님이 물리쳐 주시고, 이스라엘에 다시 영광의 날을 가져다줄 날이 바로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이들은 믿음 없는 이들이거나 형편없는 이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없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라면 ‘주님의 날’을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데 기다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오늘 아모스를 통해 선포를 듣는 대상은 ‘신실한 믿음을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백성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은 ‘왜 주님의 날을 사모하느냐?’라고 반문합니다. ‘주님의 날’은 너희들에게 희망과 기쁨, 축제의 날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그 날은 어둡고 빛이라고는 없다. 사자를 피하여 도망가다가 곰을 만나거나, 집 안으로 들어가서 벽에 손을 대었다가, 뱀에게 물리는 것과 같다. 주님의 날은 어둡고 빛이라고는 없다. 캄캄해서, 한 줄기 불빛도 없다.”(18b-20)라고 하십니다.
사자를 피해 도망갔는데 곰을 만나고, 사자를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벽에 손을 대었다가 뱀에게 물리는 형국입니다. ‘주님의 날’의 수혜자가 되어야 할 이들이 사실은 ‘주님의 날’의 심판 대상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들은 믿음 없는 이들이 아닙니다. 예배를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이들입니다. 21-23절의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절기 행사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준비해서 드립니다.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성회로 모입니다. 번제물, 곡식제물도 철저하게 드립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위한 제사인 화목제도 드립니다.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악기를 사용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기쁘지 않다고 말씀하시고, 제물을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고, 찬양 소리를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까? 무엇 하나 정성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들의 예배를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를 부정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오늘 마가복음의 본문 말씀입니다. “1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선조들이 정성을 다해 지은 성전, 화려한 성전, 성전을 짓기 위해 준비한 다윗 때로부터 역사가 묻어 있는 성전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과 같은 성전을 보시며 어떻게 표현하십니까? 제자들은 굉장한 돌, 굉장한 건물이라 했지만 ‘이 큰 건물’이라고만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성전은 공중화장실이나, 사람이 살지 않는, 마치 아무 의미 없는 낡은 건물처럼, 그저 돌덩이로 쌓아올린 건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을 부정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아모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구절의 순서를 바꾸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가문아, 사십 년을 광야에서 사는 동안에, 너희가 나에게 희생제물과 곡식제물을 바친 일이 있느냐?”(25절),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24절), “이제는 너희가 왕으로 떠받드는 식굿의 신상들과 너희의 별 신 기윤의 신상들을 너희가 짊어지고 갈 것이다. 그것들은 너희가 만들어서 섬긴 우상들이다.”(26절)
우리가 읽지 않은 마가복음 13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그 때에는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마가복음 13:14)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정성을 다한 예배를 부정하시는 까닭,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자랑스러운 성전을 부정하시는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거나, 성전을 부실하게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들의 삶에 공의가 물처럼 흐르지 않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지 않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섬김과 동시에 우상도 숭배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제국의 문화, 로마 제국의 문화의 잘못된 가치들과 타협했기 때문입니다.
지킬 건 지키면서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이들에게 아모스 선지자는 선포합니다. “너희는 망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 무너질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고통과 불편을 감수하지 않는 믿음은 세상의 안락함과 타협한 믿음입니다. 아무리 정성스럽게 예배를 준비하고, 예배당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한다고 할지라도 성도의 삶에 또 공동체의 삶에 공의와 정의가 흐르게 하는 행함이 없으면 그 어떤 예배도 그 어떤 성전도 하나님은 부정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말씀처럼 성도와 교회는 절대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도의 삶과 교회 안에는 타협하지 않아야 할 많은 가치가 이미 들어와 있기도 합니다.
사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리고 안타까운 사실은 정의와 공의의 삶을 흐르게 하지 못하니, 오히려 하나님과 예수님이 부정한 예배와 성전 짓기에 집중하는 경향이 한국 교회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라도 면책을 얻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때의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가 칭찬을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런 로마 제국의 가치, 물질 숭배의 가치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타협하지 않았기에 이들은 환난과 궁핍 속에 있었습니다. 타협하면 환난을 겪지 않고, 궁핍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
조금만 타협하면, 다 그렇게 바꾸라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타협하면 편해질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산다고 누가 존경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비방을 당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 건물을 짓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그 공동체와 그 건물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감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정의와 공의를 이루는 삶이 목적입니다. 세상의 그릇된 가치에 맞서며, 올바른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을 통해 우리도 타협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용기를 얻습니다. 끝까지 견딜 수 있다는 위로를 얻습니다. 그들이 해냈다면 오늘 우리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모스 선지자의 통렬한 외침과, 예수님의 예언, 그리고 서머나 교회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연결된 예배, 정의와 공의가 흐르는 예배, 하나님만을 섬기는 예배입니다.
우리의 삶에 정의가 흐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예배는 아무리 아름답고 정결하게 준비되었어도 하나님께 부정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공의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견고한 건물을 지어도 예수님의 눈에는 무너질 건물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나은 건물, 더 많은 사람, 더 세련된 시스템보다, 더 깊은 순종, 더 정직한 신앙, 더 하나님 나라다운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정의가 너의 삶에 흐르고 있느냐?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고 있느냐?” 그리고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세상과 타협하지 맙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불편을 감수합시다. 행함 없는 믿음에 안주하지 맙시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오늘도 말씀대로 살기를 결단합시다. 그 길이 좁고 험하더라도, 끝까지 충성하면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
그 면류관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진실하게 살아내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산 제물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