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너! 어리석은 사람아! – 2025년 10월 12일 
누가복음서 12장13-21절, 신명기 26장1-11절, 고린도후서 9장6-15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긴 추석 연휴를 보냈습니다. 연휴 기간 평안하셨습니까? 우리의 말과 태도를 통해 연휴 동안 함께 하는 이들에게 사랑과 이해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시간이 되셨습니까?
성도의 일상이 전도지 역할을 합니다. 어떤 특별하다고 여기는 이벤트가 이루어져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지만 구별된 일상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갑니다. 성도라는 이름에 맞는 거룩한 삶,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누리는 평안한 삶을 일상에서 누리고 드러내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어제는 목회운영위원회와 미래구상위원회가 함께 모여 일일수련회를 진행했습니다. 수련회의 첫 시간에 우리가 많이 들어왔던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는 말씀이 있는 시편 46편의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며 위원들께 ‘나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성도인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인가?’,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 힘과 능력, 나의 계획과 경험을 믿는 것은 아닌가?’라는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시라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는 시편의 말씀은, 듣기에는 은혜롭고 좋지만, 지난 주일 믿음의 반대말은 불안과 두려움이라고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성도는 불안과 두려움이 동력이 되어 결코 가만히 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사실 실천하기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 시편의 말씀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니, 인간적인 노력을 그만두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성도만이 할 수 있는 선택과 사실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불안하고 두려울수록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성도님들에게도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나라의 위기 앞에서, 개인사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손을 놓고 있는 이들을 사람들은 “뭐라도 해야지, 너 지금 뭐하는거야!”라고 말하며, “너! 어리석은 사람아!”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위기 앞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손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 지혜로운 성도입니다.
손을 놓는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권면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노력을 적극적으로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묻지 않는 이들, 불안과 두려움이 동기가 되어 사는 이들을 향해 “너! 어리석은 사람아!”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신명기, 고린도후서의 세 본문은 한 가지 분명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자신의 기쁨을 위한 소유를 위해 사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 나눔을 위해 사는가?” 더 근원적으로는 일일수련회 시간에 성도님들에게 드렸던 질문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신뢰하는 사람인가?”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여유가 생길 텐데.”, “조금만 더 벌면 그때부터 나누고 섬기겠다.” 하지만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조금만 더”는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본문에서 이런 채워질 수 없는 공허함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아무리 풍년이 들어도, 아무리 창고를 크게 지어도, 많은 것을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영혼을 부르시면 모든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 될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이름 붙여진 성도에게 주신 축복은 ‘소유와 쌓아둠’에 있지 않고, ‘나눔, 흘려보냄’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얼마나 소유했는가, 쌓아두었는가.’로 평가받는 인생이 아니라, ‘얼마나 나누었는가, 흘려보냈는가.’로 기억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신명기 26장의 본문은 하나님이 유산으로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수확의 때에 하나님께 드려야 할 열매의 예식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첫 열매를 제단 앞에 놓고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과 고역에 시달리는 것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것을 보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내게 주신 땅의 첫 열매를 내가 여기에 가져 왔습니다.”(5b-10a절)
이처럼 ‘첫 열매를 드린다.’라는 행위는 단순한 헌금이 아니라, “이 땅도, 이 열매도, 내 손의 노동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그것을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 놓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레위 사람과, 당신들 가운데서 사는 외국 사람과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과 당신들의 집안에 주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십시오.”(10b-11절)
첫 열매의 예식, 이 감사의 예식은 ‘레위 사람, 외국 사람, 고아와 과부 등 사회적 약자들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나누는 잔치’로 완성됩니다. 예배, 감사는 나 혼자 하나님께 드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나누고, 흘려보낼 때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와 감사가 됩니다.
우리의 헌금, 우리의 감사, 우리의 봉사는 교회 안을 넘어 교회 밖에서 고난받는 이들, 사회적 약자들, 소수자들과 연대하고 나눌때 완성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해 한다고 하는 모든 일이 자기만족에 머물고 말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반드시 이웃과 함께 나누는 잔치로 완성되었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이 전통을 이어받아, 나눔을 ‘은혜의 순환’으로 확장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가르침이 바로 고린도후서에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요점은 이러합니다. 적게 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6절)
여기서 ‘심는다.’라는 말씀은 어려움을 당한 교회에 보내지는 헌금, 즉 선교, 나눔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단순히 “많이 내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7절)라고 권면합니다.
이 구절은 헌금의 규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도가 살아내야 할 나눔, 흘려보냄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나눔은 ‘의무’가 아니라 말씀처럼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흘려보내는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가 있는 성도만이 가능한 적극적인 신앙의 행위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쁨으로 소유를 나눌 때, 선한 순환이 이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심는 사람에게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공급하여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씨를 마련하여 주시고, 그것을 여러 갑절로 늘려 주시고, 여러분의 의의 열매를 증가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일에 부요하게 하시므로, 여러분이 후하게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헌금을 전달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비우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비우면 풍족히 채우셔서 더 나눌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사도 바울은 권면합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소유가 아니라 나눔, 비움, 흘려보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기쁨으로 소유하고, 쌓아두는 손을 멈추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도가 소유하는 삶이 아니라 나누고 흘려보내는 삶을 살 때, 그 결과는 단지 물질적 도움을 넘어, 도움을 받는 이들이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돌리게 된다고 말합니다. 즉, 나눔은 은혜가 은혜를 낳는 순환을 만듭니다.
우리가 ‘기쁘게 나누는 사람’이 될 때,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돈이 많아야 나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누가복음의 본문에서 예수님께 찾아온 한 사람이 형과의 유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15절)
이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부자는 풍년이 들자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18-19절)
사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어리석은 부자가 아닙니다. 현명한 행동입니다. 저장할 곳이 부족하면 썩어 없어집니다. 그러니 더 크게 짓고, 있는 것만큼 풍요를 즐기며 누리는 게 맞습니다. 왜 어리석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부자가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부자는 단지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이 내일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입니다. 그의 어리석음은 ‘소유의 문제’보다 ‘신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불안을 쌓기로, 창고를 넓히기로 대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절)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소명은 “부유한 삶”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자신의 거룩한 지향으로 삼는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그렇기에 성도에게 주어진 ‘넉넉함’은 시험일 수도 있습니다. 많이 가진 자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그것으로 누구를 살렸느냐?”, “너의 풍요는 누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느냐?”
오늘 세 본문은 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예배와 감사는 나눔으로, 나 자신의 소유를 비움으로 완성된다. 나눔은 믿음의 행위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의 자연스러운 선택입니다.
신명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나누는 삶을 사십시오. 바울의 권면처럼,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나누는 삶을 사십시오.” 예수님의 비유처럼, “쌓고 소유하는 삶이 아니라 나누고 흘려보내는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나누고, 흐를 때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고여 있는 물은 썩지만, 흘러가는 물은 생명을 살립니다. 성도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내는 강이 될 때, 그 강은 자신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땅까지도 적시는 생명의 강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손이 움켜쥐는 손이 아니라 펼치는 손, 나누는 손, 축복의 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손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도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 생명을 살리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