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이상중 목사]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 2025년 9월 21일

시편 119:97-104, 갈라디아서 3:1-14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그 평안을 주님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어진 이 완전한 평안을 선택하고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우리 교단이 정한 남신도회 주일입니다. 우리 교단은 1965년 남신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며 평신도, 특히 남신도의 사역을 공식화했습니다. 그리고 민주화의 열망과 함께 도시 산업선교 등 평신도 참여가 확대되던 흐름 속에서, 1973년 총회는 남신도회 주일을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남신도회 주일은 단순히 예배 순서를 남신도들이 맡는 날이 아닙니다. 가정, 일터, 교회, 그리고 세상 속에서 자신의 역할,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고 다짐하고 결단하는 주일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는 남신도들이 믿음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사실은 더 정확히 말하면 ‘믿음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승리하고, 승진하고, 소유하고, 과시하고, 인정받는 일들을 강요당하기도 하고, 스스로 내면화해서 이런 가치들이 최고라고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가치를 받아들인다는 게 어렵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가치는 이런 성과주의, 능력주의, 인정주의, 효율주의와는 완전 반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런 주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패배자’라고 낙인을 찍습니다. 이런 낙인이 두려운 남성에게 성경의 말씀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무가치하고, 한가하고, 비현실적이기만 합니다.

그러니 목사가 되어서도 패거리를 만들고 패거리의 힘을 과시하고 그 힘을 사용하지 못해 어쩔 줄 모르는 상태로 살아가는 게 바로 남성입니다. 저를 포함한 이런 이들이 ‘성도라는 정체성, 믿음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오늘 갈라디아서 본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책망으로 시작합니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어리석다’라고 책망받은 이유는 단순히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알고도 속아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이미 복음을 들었고,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했으며, 성령을 체험했지만, 거짓 교사들의 말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방인도 유대인인 자신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라는 주장에 설득당하고 말았습니다. 은혜로 믿음의 삶이 시작되었으면서도 다시 행위의 종교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혼란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부정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절규하듯 말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마치려고 합니까?” 믿음으로 성도의 정체성을 얻었으면서, 다시 행함으로 정체성을 얻는 무모한 믿음으로 다시 돌아가려 합니까?

이 책망은 갈라디아 성도들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책망입니다. 우리도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은혜로 믿음의 삶이 시작되었고, 성령을 통해 믿음의 삶을 살고 있음에도 어느새 내 능력과 내 자랑, 내 성공 등 육적인 삶으로 신앙을 마무리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교회 안에도 당시의 율법주의와 같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고 홀리는 능력주의, 성공주의, 효율주의, 성과주의, 인정주의가 들어와 성경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삶의 가치들을 훼손하고 믿음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홀림은 외부에서만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끊임없이 경쟁하고 성취해야 한다는 세상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어느새 그 가치를 ‘나의 정체성’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나는 성공해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야. 믿음으로 성공한 사람이야. 무엇을 이루어야 성도가 될 수 있어.’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이미 세상의 홀림에 깊이 사로잡히고 맙니다. 이것은 ‘어리석다’라는 책망을 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처럼,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을 망각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히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역사는 당신들의 능력과 성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당신들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여되는 것이지, 당신들의 ‘무엇무엇을 함’에 의해 부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우리의 정체성을 앗아 가기 위해 ‘홀리는 것들’로부터 이기는 길은 무엇입니까?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의 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온종일 그것만을 깊이 생각합니다.”(97절)

나의 경험, 지식, 목적, 가치관에서 오는 소음, 인간 중심의 소음을 멈추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시편 기자는 권면합니다.

시편 기자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주님의 계명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으므로, 그 계명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내 원수들보다 더 지혜롭게 해주십니다. 내가 주님의 증거를 늘 생각하므로, 내가 내 스승들보다도 더 지혜롭게 되었습니다. 내가 주님의 법도를 따르므로, 노인들보다도 더 슬기로워졌습니다.”(98–100절)

진짜 지혜는 나이, 경험, 세상의 학식에서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정한 지혜는 말씀과 함께 머무는 데서 온다고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그래서 성공주의, 물질주의, 효율주의, 성과주의, 인정주의 라는 홀림을 뚫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나쁜 길에서 내 발길을 돌렸습니다.”(101절) 말씀을 묵상하고 사랑하는 성도는 결국 발걸음을 돌립니다. 말씀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마주하게 하고, 깨닫게 하며, 말씀이신 주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노래합니다. “주님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도 단지요? 내 입에는 꿀보다 더 답니다.”(103절) 말씀이 꿀보다 달다는 것은 단순히 기분이 좋아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의 소음 속에서 ‘너는 충분하다’라고 속삭여주는 진리의 맛이며, 성공, 효율, 성과주의에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인정주의에 목마른 영혼을 채워주는 생명의 단맛입니다.

세상 욕망은 달콤해 보이지만, 말씀은 그보다 더 깊은 단맛을 줍니다. 말씀의 기쁨이 세상의 유혹을 이기는 힘이 됩니다.

이처럼 시편 기자는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함으로 홀림을 이기는 삶을 보여주었다면, 바울은 갈라디아서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삶을 소환하며 홀림으로부터 이겨내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운 일로 여겨 주셨다”(6절) 아브라함은 율법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단순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합니다. 행함이 아니라, 무엇을 이룸으로서가 아니라, ‘아멘’으로 받아들임으로 성도의 정체성은 확증됩니다.

인간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의 행위에 근거하여 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기록된 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계속하여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에 있다”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10-11a절)

그렇기에 예수님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율법의 삶이 아닌 다른 삶이 있음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13a절)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행하는 종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기에, 우리의 정체성을 위해 더 이상 ‘무엇을 더 해야 한다.’라는 강박에 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선포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4절)

여기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특별한 은사나 능력을 경험하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6-7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 사람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4:6–7)

성령은 우리 안에 오셔서 매일 같이 속삭이십니다. “너는 더 이상 종이 아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너는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곧 이 자녀 됨의 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복입니다. 이 정체성,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정체성을 상기시키시고, 확신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종처럼 늘 불안에 떨며 ‘더 해야 인정받는다’라는 거짓말에 홀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끊임없이 확인해 주십니다. “너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다.”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이 우리에게 성취된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홀림은 2000년 전 갈라디아 성도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귀에 속삭입니다. “돈이 전부다. 성공이 전부다. 성과가 전부다. 효율이 전부다, 인정이 전부다” 이런 소음, 이런 소리에 휘둘리다 보면, 우리는 언제든 정체성을 잃고 방향을 놓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합니다. 시편은 길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사랑하라. 말씀을 묵상하라!” 말씀은 분별을 주고, 그 분별은 결국 우리의 발걸음을 바꾸게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세상의 달콤한 유혹이 아니라 꿀보다 더 단 하나님의 음성으로 살아가며 정체성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갈라디아서는 확증합니다. “믿음으로 살라.” 아브라함처럼 계산하거나 증거를 봄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며 길을 걸으라고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 때 정체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남신도회 성도 여러분, 세상의 압력이 헛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참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없다고 이름 붙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끊임없이 성도님들에게 말을 건네며 정체성을 흔들기 위해, 정체성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홀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처럼 말씀을 묵상하고, 예수를 바라보고, 겸손히 나 자신을 내려놓고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침으로써 성도의 정체성을 깨닫고, 성도의 정체성을 지키고 가정, 일터, 교회, 세상 속에서 성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이 은혜가 이 자리에 모여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를 또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