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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 2025년 4월 27일

에스겔 11:14-20, 로마서 6:6-13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우리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우리의 삶을 살피시고 이끌어가시는 이가 누구신지 앎으로서 매일 또 매 순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셨던 모든 말씀과 보여주셨던 모든 삶이 옳았음을 증명한 사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걸어가신 삶의 길, 고난의 길, 짊어지셨던 십자가를 나의 길과 십자가로 여기고 살아왔던 성도는 예수님의 부활이 기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이 비난하거나 어리석다고 여겨왔던 나의 삶 역시도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절을 어떻게든 기쁨의 날로 만들어 내려고 수고하지 않아도, 일상의 삶이 내가 고난 가운데 있든, 타인의 고난을 내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든,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에게 부활절은 기쁨이요, 축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을 자처하는 성도, 고난을 겪는 성도만이 부활의 기쁨도 나눌 수 있습니다.

한 주간 이런 부활의 기쁨을 나누며 살다가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안전하고 안락한 곳에서 홀로 감사하며 안위하며 지내는 성도가 아니라 기꺼이 나의 소유를 나누고 불편함을 감수하며 고난 가운데로 걸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주중에 천주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우리보다 교리 부분에서 더 보수적인 곳으로 알고 있는 천주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소수자를 둔 부모들과의 만남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의 자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성소수자가 죄인이라거나, 성 정체성을 바꾸어야 한다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돌아가신 이후 세계 곳곳에서 존경과 찬사와 사랑을 담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아마 우리 중에서도 프란치스코 교황을 존경하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전 교황들과 비교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이 더 존경받고 사랑받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가 더 많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더 많이 사랑했기에 조직의 철통같은 낡은 교리를 넘어 성소수자의 부모에게도 “하느님은 여러분의 자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난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자신의 또는 자신이 속한 경계와 한계를 넘어 더 사랑할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찾는 사람, 더 사랑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3장의 본문을 보면, 유대인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바리새파의 니고데모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임을 압니다.”(요한복음 3:2)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라 표현하며 지금은 혼자 왔지만,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더 있다고 말합니다. 이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그런 표징, 기적은 다른 마술사도 할 수 없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외적으로 행해지고 보이는 변화의 이야기를 니고데모는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복음 3:3)라고 말입니다.

니고데모가 보고 들은 ‘외적인 변화’보다 진정으로 보고 경험해야 할 것이 따로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다시 나야만’ 볼 수 있는 나라입니다.

다시 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란 니고데모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요한복음 3:4)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고, 몸의 다시 태어남 즉 ‘외적인 변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요한복음 3:5-7)

예수님의 이 말씀은 외적인 세례를 통한 개인의 결단과 성령의 내적인 역사로 인한 변화, 즉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삶의 총체적인 변화, 거듭남에 관한 설명입니다.

외적인 것에만 주목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할 수 없습니다. 내외면 모두 바뀌어야 합니다. 삶의 방향 전환,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고, 사람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을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고, 타인을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다른 시각과 태도로 세상과 사람을 대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더 많이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주일 설교 말씀을 통해 여러 번 말씀드렸듯 내가 있는 곳을 축제의 장소로, 환대의 장소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의 결정적 차이가 무엇이었습니까? 더 많이 사랑한 삶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율법으로 타인을 정죄하며 죄인을 만들어 구분 짓고, 차별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정죄당한 이들, 죄인들의 친구가 되셔서 구분 지어진 경계와 벽을 허물며 사랑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지만, 문제는 많은 사람의 내면이 굳어 있어 자신의 경계와 벽을 허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외적인 변화는 어느 정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행동으로는 구분 짓지 않는 것처럼, 차별하지 않는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까지 타인을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내면의 변화, 의식의 변화는 일어나기가 참 힘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야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놀라 묻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왜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내적 변화, 의식의 변화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기적처럼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변화는 받아들이지만, 자신들의 내면을 깨우고, 의식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는 거부했습니다.

왜 거부합니까? 이런 내적 변화는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옳다고 여긴 것, 전통 등을 허무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미 굳어져 버린 자신들의 옮음, 생각, 가치관, 의식 어느 곳 하나 스스로 뚫으려 하지 않고 방어하려고만 했습니다. 내면이 굳은 사람들이며,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며, 오늘 에스겔 본문에 나오는 ‘돌같이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날 혹 우리에게도 해당하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더 많이 사랑하라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마음이 돌같이 굳어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80세를 넘어 90세가 다된 연세로 지금까지 자신이 겪어오고 쌓아온 삶과 기준, 경험,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자신이 속한 집단의 기준과 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소수자 부모에게, “하느님은 여러분의 자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마음이 돌같이 굳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변화,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진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즉시 나와 타인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랑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고 또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끝끝내 돌 같이 굳은 마음이 부드럽게 되지 못하면 자신의 한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에스겔 본문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유대인 일부는 본토에 남고, 일부는 포로로 끌려가게 된 상황에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은 유대인들은 포로로 끌려간 동포들과 편 가르기를 합니다. 편 가르기를 하는 이유는 자신들은 포로로 끌려간 자들보다 더 거룩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은 우리와만 함께 하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함께 망했지만,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저들과 우리는 분명히 다르다! 저들은 불경한 백성이고,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14절과 15절에 이들이 어떤 의식을 가졌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예루살렘의 주민이 네 모든 친척, 네 혈육, 이스라엘 족속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 ‘그들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이 땅은 이제 우리의 소유가 되었다’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에스겔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6-18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비록 내가 그들을 멀리 이방 사람들 가운데로 쫓아 버렸고, 여러 나라에 흩어 놓았어도, 그들이 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내가 잠시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겠다’ 하여라. 그러므로 너는 포로가 된 동포들에게 이르기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러 민족 속에서 너희를 모아들이고, 너희가 흩어져 살고있는 그 여러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겠다’ 하여라. 18 그들이 그곳으로 가서, 그 땅의 보기 싫고 역겨운 우상들을 그 땅에서 다 없애 버릴 것이다.”

어떤 의미의 말씀입니까? 너희들이 더 거룩해서 남고, 덜 거룩해서 포로로 끌려간 것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유배된 그곳에서도 내가 하나님이 되어 줄 것이고, 시간이 되면 다시 모아 이스라엘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포로로 흩어지게 된 이유는 경건함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포로 된 이들을 통해 ‘그 땅의 보기 싫고 역겨운 우상들을 다 없애기 위해서’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남은 자’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백성 됨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남은 자이든, 떠난 자이든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은 “19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된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20 그래서 그들은 나의 율례대로 생활하고, 나의 규례를 지키고 그대로 실천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너희들의 욕망대로, 또 너희들이 지어낸 규율대로 생각대로 살았던 삶에서 돌이켜 외적 내적인 모든 면에서 다시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율례대로 생활하고, 규례를 지키고 그대로 실천할 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계를 허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과 의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다시 태어나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하고 있습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나아지기는커녕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출생 지역으로 서로를 더 구분하고 차별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자신들이 만든 교리와 자의적 성서해석을 통해 타인과 자신들을 더 구분하고 차별하며, 때로는 비난하기 위해 교회들에 좌표를 찍기도 합니다. 우리 교단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도 않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삶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돌같이 굳은 마음이 제하여지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 더 포용하고 이해하고 존중하는 삶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시 태어남’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6:11-13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나의 기준과 가치와 경험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같이 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살아나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나의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말에서 죄는 감옥에 가야 하는 범죄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절대 바꿀 수 없어!’, ‘내가 옳아!’, ‘불편하니까 바꾸고 싶지 않아!’와 같은 마음. 경계를 허물려 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와 타인을 나누려는 이런 마음들이 돌같이 굳은 마음이며, 죄입니다.

그렇기에 불의의 연장이 되지 말라는 말씀은, 타인에 의해 움직여지는 불의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신념, 가치, 경험에 나의 몸을 내어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몸의 정욕에 굴복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저와 성도님들은 여전히 몸의 정욕에 굴복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변하기 싫어, 내가 옳아! 라고 외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돌같이 굳은 마음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는 우리 곁에 와있습니다. 물과 성령의 세례, 내외적인 전환, 내 삶과 생각의 경계를 허무는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고 경험하는 생명사랑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거듭난 사람답게 더 많이 사랑하는 성도가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