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이상중 목사]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 2026년 05월 24일

에스겔서 36장 22-28절, 요한복음서 7장 37-44절, 사도행전 2장16-18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이번 한 주간에는 유독 많은 사회적 이슈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평범한 우리의 삶에도 많은 일이 발생합니다.

이렇게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과 마음을 흔들고 불안하게 만들어 평안을 누리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렇죠. 외부의 상황을 통제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평안은 외부로부터 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우리들은 종종 하나님으로 인해 주어지는 평안은 찾지 않고, 외부로부터 평안을 구하려 합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평안은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이미 그렇게 얻고자 하는 평안, 평화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미 주어진 이 평안,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오늘 읽은 세 본문을 통해 성령강림주일의 의미와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는 이 성령강림주일이 어떤 의미가 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에스겔 36:22-28의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렇게 시작됩니다.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 까닭은 너희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더럽혀 놓은 내 거룩한 이름을 회복시키려고 해서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 까닭은 너희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이렇게’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족속의 회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들을 생각해서 이렇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22절에서는 이스라엘 족속을 회복하시려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더럽혀 놓은 내 거룩한 이름을 회복시키려고 해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을 차려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선한 일을 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곳마다 더럽힌 하나님의 이름을 스스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이스라엘 족속을 회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더럽혔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참지 못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될 만한 어떤 선한 일과 순종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회복시키겠다고 선포하십니까?

에스겔 36:18-21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은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했고, 온갖 우상을 섬겼다고 기록합니다. 무엇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죄를 저질렀습 니까? 돈과 이익, 자신들의 유익과 편리를 위해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했고 우상에게 절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백성들의 죄를 보시고 이스라엘을 먼 나라들로 흩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흩어진 곳에서도 자신들의 그릇된 행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23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으므로, 거기에서 더럽혀진 내 큰 이름을 내가 다시 거룩하게 하겠다. 이방 사람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내가 내 거룩함을 밝히 드러 내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도,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이방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망해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며, 하나님이라는 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방인들의 눈에는 이스라엘의 실패가 곧 하나님의 실패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다시 흩어져 있는 백성들을 모든 이방 민족이 보란 듯이, 그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모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24 내가 너희를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데리고 나아오며, 그 여러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다가, 너희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여기서 중요한 선언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도,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바벨론 제국의 왕이 ‘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라고 선언하는 장면이라 중요합니다. 하나님 당신이야말로 이 세상의 진정한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진정한 이 세상의 왕인가? 누가 이 세상의 진정한 주님이신가?’에 대한 물음은 우리가 매일 묵상하는 창세기에서도 나옵니다. 요셉이 이집트 왕 바로의 꿈을 해몽해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임금님께서 같은 꿈을 두 번이나 거듭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시기로 이미 결정하시고, 그 일을 꼭 그대로 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창세기 41:32)

요셉은 이집트 왕인 바로 당신이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의 왕임을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당신이 우리의 생명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야, 당신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야.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야.”라고 말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도,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이 선포는 오늘 우리에게도 질문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누가 진정한 주님이신가?, 당신은 누구의 말을 따르고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질문합니다.

나의 상사가 내 생명을 쥐고 있는 것 같아서 때로 그가 주가 되기도 하고, 나의 재산에 이익을 더해줄 수 있는 것 같은 그가 주가 되기도 하고, 의지가 되어 주는 누군가가 나의 주가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시며,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 평안, 인도자가 되셔야 하지만, 때로 우리는 나의 이익과 불안과 공포와 편안함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또는 무엇이 주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과 무엇이 주가 되기에 우리도 때로 무고한 피를 흘리거나, 무고한 피를 흘리는 이들을 방치하거나, 그들의 폭력에 눈을 감거나, 돈과 소유를 우상으로 여겨 숭배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이유로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이유로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조금 더 이익을 보고자, 조금 더 편안해지고자, 조금 더 안전해 보고자 할 때 우리 역시도 얼마든지 무고한 피를 흘리는 자가 될 수 있고, 우상 숭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누가 당신의 주님이신가?’, ‘누가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인가?’ 이 물음에 하나님만이 주님이시며, 진정한 통치자 되신다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5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 너희의 온갖 더러움과 너희가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며, 26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27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방 민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회복하신 뒤에 가장 먼저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나라로서의 기틀을 세우기 위한 정비를 하지 않으십니다. 돌아온 백성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군사력도 아니고, 행정 체계도 아니고, 경제 재건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먼저 정결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국가 장치에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안전은 군사력에서 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옵니다. 그래서 ‘맑은 물을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 ‘온갖 더러움과 너희가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어긋나게 살아왔던 삶으로부터 먼저 벗어나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 백성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영’을 넣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익과 탐욕과 편리, 승리를 위해 이방의 우상을 숭배하며, 제국의 논리가 옳다 여기고 따라 살았기에 더 이상 다른 삶의 방식인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되었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힘과 돈과 제국의 논리와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인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 즉,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영이 내주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이십니다. 잊어버린 정체성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28 그 때에는 내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살아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우리를 아무렇게나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씻으시고, 새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영을 우리 안에 두셔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조종되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영이 마음대로 조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 예수님이 보내신 영을 통해 살아가기 위해 오늘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7:37-44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37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요한복음 7장은 초막절을 배경으로 합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장막 생활을 했던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동시에 가을 수확과도 연결된 큰 절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절기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서서 외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굉장히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초막절을 기념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올릴 광야에서 물을 주신 하나님, 비를 내려 땅을 살리시는 하나님, 마지막 날 성전에서 흘러나올 생명의 물에 대한 예언적 기대까지 이제 이런 생수가 예수님에게서 나온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다만, 이제 예수님을 믿을 때 생수는 하나님에게서만 나오지 않고, 나를 믿는 너희들을 통해서도 생수가 흘러나오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입니다. 먼저는 목이 말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치와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삶의 방향과 다르거나 틀린 가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말고 다르게 살 수는 없을까?’라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더 체제 순응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도움으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이 세상이 강요하고, 가르치고, 설계한 어떤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다른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기를 갈망하는 목마름이 성도에게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돈을 숭배하고, 힘을 숭배하고, 돈과 힘이면 뭐든 다 되기에 그 돈과 힘을 좇는 자라면 목이 마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목이 말라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삶을 추구하는 이들은 예수님에게로 와서 생명수를 구할 리가 만무합니다.

돌같이 굳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 요한복음 본문에서도 나옵니다. 자신의 목적과 욕망과 경험과 지식에 갇힌 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가운데는 “이 사람은 정말로 그 예언자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41 “이 사람은 그리스도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더러는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리에서 그리스도가 날 수 있을까? 42 성경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날 것이요,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43 무리 가운데 예수 때문에 분열이 일어났다.”

그들의 얄팍한 지식이, 그들의 세상을 살며 한 경험이, 자신이 생각하고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며 자신이 세운 장벽 깨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볼 수가 없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라는 예수님의 이 선포는 오늘날에도 혁명적이고 놀라운 말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선택이 가능하고, 다른 삶의 방식이 가능함을 알려주시기에 “다른 삶에 대한 목마름”을 가진 이들에게는 생명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목마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는 성령이 인도하시는 걸음을 따라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이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목마른 사람입니까?” 돈과 힘과 우상을 숭배했던, 황제를 주님이라 불렀던 바벨론 제국, 이집트 제국, 로마 제국을 오늘날에도 여전히 좇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다른 삶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저와 성도님들은 과연 목마른 사람입니까?”, “다른 무언가를 숭배하며 돌처럼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2:16-18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각자 자기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은 자기들끼리만 알아듣는 종교적 언어를 늘리는 영이 아닙니다. 세상이 알아들을 수 있는 생명의 언어를 주시는 영입니다.

“16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17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18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십니다.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성령강림은 영적 엘리트의 탄생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는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에스겔, 요한복음과 같이 이 본문에서도 성령강림의 사회적 급진성이 드러납니다.

성별의 경계가 흔들립니다. 나이의 위계가 흔들립니다. 신분의 벽이 흔들립니다. 말할 수 없던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성령은 침묵 당한 이들에게 예언의 언어를 주십니다. 생명의 언어를 주십니다. 그 배에서 생명수가 흐르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성령이 주시는 예언의 언어, 생명의 언어는 어디에서 필요합니까? 바로 누군가의 고통이 조롱의 언어로 소비되는 자리, 역사의 상처가 왜곡되는 자리, 아파해야 할 마음이 돌처럼 굳어지는 자리에서 필요합니다.

2026년 5월 18일, 스타벅스코리아의 “탱크데이” 이벤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과 겹쳤고, “탱크”와 “책상에 탁”이라는 표현이 광주민주화운동의 국가 폭력과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보며 물어야 할 것은 단지 “누가 잘못했는가?”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한 사회가 누군가의 죽음과 고통을 조롱의 언어로 소비할 수 있게 되었는가?”, “어떻게 역사의 상처 앞에서 마음이 이렇게 무감각해질 수 있는가?” 이것이 오늘 말씀의 ‘돌 같은 굳은 마음’입니다.

아파해야 할 자리에서 웃고, 기억해야 할 자리에서 조롱하고, 회개해야 할 자리에서 편을 가릅니다. 저항하지 않고, 틀렸다고 말하지 않고 침묵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역사의 아픔 앞에서 무감각할 수 없습니다. 성령 받은 공동체는 혐오와 왜곡의 언어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기억하는 마음, 아파하는 마음, 정의를 향해 움직이는 마음을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하시면 목마른 영혼에 생수가 흐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닫힌 공동체가 말하기 시작하고, 세상은 자기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듣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세련된 종교적 언어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돌 같은 마음을 살처럼 바꾸시는 영, 목마른 사람 안에 생수의 강을 흐르게 하시는 영,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우시는 성령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령강림은 하나님 백성이 다시 하나님 백성답게 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씻겠다. 내가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겠다. 내가 너희 속에 내 영을 두겠다.”

예수님은 초막절 마지막 날에 외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그리고 사도행전의 오순절에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부어졌습니다.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하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이 꿈을 꾸며, 남종과 여종들도 하나님의 일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목마른 사람입니까?”, “세상의 논리와는 다른 삶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힘과 혐오와 왜곡의 언어가 아니라,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언어로 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까?”

성령은 돌 같은 마음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역사의 아픔 앞에서 무감각한 마음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현실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회복하기 위해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를 다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세우시고, 우리 안에 생수의 강을 흐르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의 큰 일을 듣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시여,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시오. 목마른 우리 안에 생수의 강을 흐르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다시 드러나게 하실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