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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 2025년 5월 25일

요한복음 14:1-14, 에베소서 4:14-16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평안은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습니다. 평안은 이미 우리 안에 주어졌습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내 삶을 인도하시는 이가 누구신지를 다시 기억해 낼 때 성도는 ‘이미 평안 속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동시에 불안과 두려움은 어느 누가 아닌 나 스스로 만들어 낸 감정임도 알게 됩니다.

나의 지식, 경험, 가치, 기준의 한계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기에 느끼는 감정입니다. 믿음의 반대말을 무엇이라고들 말합니까? 불안과 두려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늘 기억하십시오. 내 생각과 경험을 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리하여 평안을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람에게 칭찬받고,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며 살 때, 사람은 반드시 상심하고 낙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를 위해 복음을 위해 성도를 위해 교회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습니까?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의심받았습니다.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그러나 지난주 말씀을 통해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앙 생활할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에베소서 본문에 적혀 있는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입니다.

바울은 명확하게 성도는 모든 면에서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체되거나 퇴보하지 않고, 자라야 합니다.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르도록 자라야 합니다. 그러나 저절로 자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르도록 자라기 위해서는 나의 노력과 공동체의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다다르도록 서로를 향한 노력이 필요한 것을 말하기 위해 바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가운데 하나를 설명합니다.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에베소서 4:11-12)

다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이런 봉사의 직분을 가진 성도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에베소서 4:16)

교회 안에서의 봉사 직분이건, 교회 밖에서의 봉사 직분이건 그 봉사의 직분은 사실 타인을 위한다기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중요합니다. 맡은 봉사의 직분을 통해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르는 기회가 각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맡은 봉사의 직분이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르는 기회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진리를 말할 수 있고, 사랑의 실천을 할 수 있도록 주어진 자리, 사랑의 말을 경험하고, 사랑의 실천을 경험할 수 있는 자리이지만 우리는 주어진 봉사의 직분을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쉽지 않은 현실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에베소서 4:14)

교회 안과 밖에서 교회를 흔드는 온갖 교훈, 속임수, 술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온갖 교훈의 풍조 속에서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방해 요소는 어느 특정한 시대나 교회에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가 있습니다. 함께 읽은 요한복음의 본문을 통해 무엇이 우리의 방해 요소인지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첫 구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당시 제자들이 실제로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동요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 발언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건 기대와는 달리, 이들을 불안하게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21b-22,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서, 서로 바라다보았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부터 예수님을 통해 로마로부터 해방될 날이 곧 올 것이라 제자들은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팔려 넘겨지게 될 것이라뇨, 게다가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런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기를 깎아도 이렇게 깎는 말을 자신들의 리더가 하고 있으니 당연히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어이없는 말씀이었기 때문에, 요한복음 13:28, “그러나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아무도, 예수께서 그에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베드로와의 대화도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3:36-37, “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 중에 수장인 베드로조차 자신이 가는 길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함께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여도 해방이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베드로는 놀라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자기가 팔릴 것이라고 하시고, 자신이 가는 길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거나 부인할 것이라고 하시니 당연히 제자들은 그야말로 헛소리하는 예수님 때문에 마음이 심란하지 않았겠습니까? 게다가 지금 상황은 평상시와는 다릅니다. 점점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불안하게 만든 당사자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앞으로 겪게 될 상황 그리고 자신들이 겪게 될 상황 그러나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펼쳐질 것이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 근심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님의 미래 그리고 제자들의 미래는 죽음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자신을 믿어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며 이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3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그래, 예수님이 내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시는 거구나. 예수님 계신 그곳에 내가 있을 자리가 있구나. 아~ 편하다.’ 생각했겠습니까? 여전히 제자들은 예수님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오늘 본문에서 두 번의 질문을 합니다. 5절입니다.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8절입니다.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이런 질문에 예수님은 어떤 대답을 하셨습니까? 길을 보여 달라는 도마의 요구에는, “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의 요구에는, “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뭐가 문제입니까? 제자들은 언제나 확실한 것을 요구하고, 예수님은 언제나 불확실한 것을 말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길을 보여 달라는 요구,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요구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이며, 불확실하지 않은 확실한 답을 알려달라는 말입니다.

이런 요구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도록 하지 못하는 방해 요소입니다. ‘확실함의 함정에 빠진 신앙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방해요소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만이 방해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구도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름에 방해 요소가 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1-2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2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이미 존재하고 확실하고 보증된 것을 향해 가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불확실성을 향해 나갈 때 성장하고 성숙하고 확증됩니다. 히브리서에서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불확실한 이야기만 늘어놓으셨습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라고 하셨지만, 제자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말씀을 하실 때마다 마음에 근심이 쌓여갔습니다.

왜 근심이 쌓여만 갔습니까? 보이는 것, 확실한 것만이 전부라고 여기는 신앙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 너머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볼 수 있는 하나님을 제자들은 볼 수 없었습니다.

에베소 교회 공동체가 흔들린 까닭은 결국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불확실한 말씀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보이지 않고, 불확실하니 불안합니다. 불안하니 흔들립니다.

뭔가 더 보이는 것 같고, 확실한 것 같은 것을 붙들고 싶은 욕망에 쓰러져버립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함정, 이런 방해 요소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보이는 것 너머에, 불확실함의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 성도님들이 고난주간에 모아주신 금식 헌금을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분들께 전달하고 왔습니다. 그 자리에는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뿐아니라 다양한 그러나 여전히 투쟁의 현장에 계신 노동자분들이 와 계셨습니다.

3년, 9년 아니 그 이상 길 위에서 투쟁하시는 노동자분들을 보며 ‘나보다 믿음이 좋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오르지 못할 벽 앞에 서 있으면서도, 결국엔 저 벽을 넘어갈 수 있으리라 여기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성도는 확실할 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뭔가 보일 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길이 보이지 않고, 불확실해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보이지 않는 길, 불확실함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마음에 근심하지 않는 성도, 믿음이 더욱 성숙하고 성장하는 그리스도에 다다르는 성도와 교회 공동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