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부활의 의미 – 2026년 04월 05일
요한복음서 20장 1-10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우리 삶의 주인이 누구이신지를 잊지 않고, 나와 함께 계신 이가 누구이신지를 기억하며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이렇게 인사할까요.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빈 무덤이 등장하고, 긴박하게 움직이는 제자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가 놓인 무덤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에 시체라도 놓인 무덤 앞에 가면 마음이 위로받을까 싶어 옮긴 마리아의 발걸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앞에서 충격을 받습니다. 성인 남성 여러 명이 힘을 합쳐야만 열 수 있는 무덤의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바로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한 제자에게 달려가 자신이 본 상황을 전달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한 제자도 무덤으로 정신없이 달립니다. 도착해서 열려 있는 무덤의 문과 무던 안쪽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본 풍경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베가 놓여 있었고,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그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무덤 안에 예수님의 시체는 없었고, 그제야 막달라 사람 마리아의 말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습니다. 이 사실은 이들에게 더 큰 절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스승의 시체마저 사라져버린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 채 오늘 본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가져가는 것은 벌금형조차 없는, 오직 징역형으로만 다스리는 중범죄입니다. 2천 년 전 마리아와 제자들에게 ‘누가 주님을 가져갔다.’라는 소식은 단순한 분실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사랑하고 존경했던 예수님의 존엄을 완전히 짓밟는 인륜 파괴적 범죄이자, ‘최악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빈 무덤을 보고 절망이 아닌 다른 것을 발견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처럼 예수님이 살아나셨음을 빈 무덤을 통해 기억해 낼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기억해 내지 못했고,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다시 돌아간 삶의 자리는 어떤 곳입니까?
요한복음 20장 19절에 제자들이 돌아간 자리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제자들이 돌아간 자리는 두려움의 자리였고, 실패자의 자리였고, 아직 깨닫지 못한 자리였습니다. 여전히 과거에 머무는 자리였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 속에 갇혀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빈 무덤을 보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 어떤 말씀이었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복음 2:19, 21)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요한복음 10:17-18)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요한복음 16:16)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은 왜 기억해 내지 못했을까요? 그 부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제자들은 자기 기대와 욕망이 너무 강해서, 예수님의 그 말씀을 붙들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죽는다. 부활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깊이 생각할 점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이 자기 마음에 꽂힌 것이 있을 때, 부모가 아무리 중요한 말을 해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귀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마음이 이미 다른 데로 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 외에 들려주신 말씀과 보여주신 삶도 제자들에게 아직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익숙한 세상 방식의 성공과 실패, 기준과 가치에 매여 있는 제자들은 살아생전에 해주신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도 하시기 전에 이런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하신 말씀과 삶이 자신들이 바라보아야 할 진정한 삶임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조롱했지만, 진실로 자신들의 삶에 예수님만이 왕이심을 고백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19:38-40에 나오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대해서 말씀은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라고 기록합니다.
니고데모는 어떻습니까? 유대 사람의 지도자이자 바리새파인 니고데모는 사람들이 볼 것이 두려워 어두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입니다. 즉,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같이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예수님의 제자임을 숨기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아십니까? 한 사람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요구했고, 한 사람은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장례하고,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했습니다. 이런 행동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 두 사람의 행동은 제자들도 하지 못한 놀라운 행동입니다. 둘 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안정을 모두 내던진 결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치욕스럽게 죽어간 사람의 시신, 유재 종교 기득권자들의 원수인 예수의 시신을 거두고 장례를 치루고, 무덤에다 시신을 안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이 두 사람은 당장 큰 사고를 당할 것이 명백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제자임이 발각되면 자신들도 죽게 될까 싶어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는 예수님을 보며 오히려 깨달았습니다. ‘아,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정말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삶, 따라야 할 삶을 예수님이 사셨구나.’, ‘진실로 사랑 그 자체 셨구나.’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지난 자신의 과거를 과감하게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모습에서 바울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빌립보서 3:7-9a)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는 ‘공회원의 지위’가, 니고데모에게는 ‘바리새인의 명성’이 더 이상 삶을 지탱하는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재산이 더 이상 삶을 지탱하는 기준이 될 수 없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목격하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방식이 참임을 발견했기에 그들의 삶을 기꺼이 내려 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을 옭아매던, 또는 열심히 추구했던 사회적 시선, 권력, 재산이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발견되는 것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가치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묵상할수록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롭게 여겼던 것이 해로운 것이 되고. 오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지점은 여러 번 말씀드리기도 했지만, 굉장한 해방의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은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티켓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의 방식’으로 살아도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의 징표입니다.
부활은 성도의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징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래서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따라야 할 참삶임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됩니다.
제자들은 빈 무덤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지식, 경험, 과거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빈 무덤을 보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마주한 빈 무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이것은 단순히 ‘야~ 이제 죽어도 살겠구나’라는 개인의 영생 티켓 확인증이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이 생전에 하신 모든 말씀과 보여주신 삶의 방식이 ‘참’이었다는 하나님의 화인(火印)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진정으로 깨달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해방을 경험합니다.
증명으로부터 해방됩니다. 더 이상 세상의 잣대로 나를 증명하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성공의 기준은 이제 우리에게 무가치한 것이 되었습니다.
가치가 전복됩니다. 나를 힘들게 했던 세상의 가치관. 즉, 더 많이 소유해야 하고, 더 높은 곳에 가야 한다는 압박은 부활의 빛 앞에서 ‘오물’이 됩니다.
존재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인정받는 것으로 충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더 이상 우리가 과거에 사로잡혀 살지 않아도 됨을 의미합니다. 과거가 괴로웠던 이유는 우리가 그 과거에 세상 적인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의 방향성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의미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분이 사신 그 길이 참된 길이었다는 하나님의 최종 선언입니다.”
그러니 부활을 맞이한 우리는 제자들처럼 다시 두려움의 자리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가 우리를 옭아매게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십자가를 통과한 그 사랑의 방식이 승리한다는 것을 믿고 오늘을 살아내야 합니다.
예수의 삶이 참임을 믿기에 우리는 이제 해방되었습니다. 괴로움 한가운데서도 우리는 다른 힘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일어났습니다. 이 기쁜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오늘부터 영원까지 다스리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