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베드로전서 1:3-9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에게 큰 희망이며 기쁨입니다. 이런 희망과 기쁨의 마음을 담아 앞뒤 옆에 있는 분들과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교육부 친구들에게 부활이 왜 희망이고 기쁨이 되는지를 어떻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간단한 예화 두 가지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예화입니다. “한 꼬마 아이가 길거리에서 애벌레를 발견하여 집에서 통에 길거리에서 봤던 비슷한 환경을 꾸며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애벌레는 보이지 않고 무언가가 들어가 있을 것 같은 작은 주머니가 보였어요. 꼬마는 애벌레가 사라져 큰 실망을 했습니다. 애벌레가 보이지 않아 ‘이제 끝났나 보다, 사라졌나 보다’ 하고 생각했죠.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작은 주머니가 흔들리더니, 예쁜 나비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도 숨을 거두셨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 예수님도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생명, 이것이 부활의 한 의미입니다. 이 부활을 통해 우리 역시도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라고 고백하지 않고, 앞에 수식어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를 붙였습니다.

이 베드로의 증언에 부활 신앙이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하다고 베드로는 이야기합니다.

그럼, 왜 예수님의 부활이 산 자들에게 산 소망이 됩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살아나셨기에, 당시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고도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셔서 계속 같이 살아가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의 한 사건으로 나타나셨던 예수님으로 인해 산 소망을 얻고, 성도가 새로 태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준비한 다른 예입니다. “우리 친구들이 이 공간에서 시험 준비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자신이 이번에 수능에서 만점을 받았다고 하며 이런저런 공부 방법을 알려준 거죠. 만약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낯선 사람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이 사람이 수능 만점을 받은 사람인지, 정말 공부를 잘하는 사람인지 증명할 길이 없어서 듣기는 했지만 진지하게 듣지는 않을겁니다. 그런데 그날 집으로 돌아와 뉴스와 유투브를 보는데 낮에 봤던 그 사람이 수능 만점을 받았다며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생각하죠. ‘아, 그 사람 진짜였구나.’”

예수님의 부활은 ‘아, 그 사람 진짜였구나.’를 확증해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과 삶이 진짜였음을 인증하는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가 말 한 ‘산 소망’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당시 성도에게 그리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예수님이 들려주신 말씀과 삶의 방식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옳지 않은 것을 드러내실 일이 없고, 틀린 것을 가르치실 분이 아니십니다. 완전하고 또 영원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셨고, 예수님 또한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기쁨입니다. 너무나도 큰 기쁨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모든 것이 가짜가 아니구나, 틀린 것이 아니구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두의 기쁨이 되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 이들에게 기쁨이 되는 사건이기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이 없기에 부활이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부활절 계란은 손에 쥐었지만, 도무지 부활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저 매 주일과 같이 예배드리다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부활주일 예배가 고난주간 예배인지 부활주일 예배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이 부활이 기쁠 수밖에 없음을 어떻게든 이해시켜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이해되어야 하는 부활이 아니라 부활이 기쁨이 되는 경험이 될 수 있도록 고난주간 우리 나름의 정의와 평화의 순례를 진행했습니다.

정주현 목사님이 남겨주신 글에 작가 한강이 한겨레와 인터뷰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감지해서 자신의 고통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건 인간의 고귀함을 증언하는 최후의 방어선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인간 됨의 경계선을 지키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라고 하셨습니다.

적어도 우리 자신이 고난과 고통을 겪고 있지 않다면, 부활을 기쁨으로 경험할 수 있는 최후의 방어선이 된다고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산불 피해 이재민과 많은 생명들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
거제 통영 조선 하청 노동자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지회 해고 노동자들
전세사기 피해자들
그리고 고난주간 금식기도표에 적은 여러 불편함을 감수하는 신앙의 태도를 통해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지기 위해 우리는 노력했습니다. 이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 없이는 부활의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잘 먹고 잘살면서 유일하게 두려움으로 남아있는 죽음이라는 과제를 해결해 주어 호의호식하는 이들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사건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한 것처럼, 말씀대로 살아가며 피치 못하게 고난을 겪어야 하는 이들이 경험해야 할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성도에게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주어질 것을 소망하며 사는 이들이 누려야 할 기쁨입니다.

바울이 말한 고린도전서 13:1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와도 상통하는 베드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고난과 고통 속에 살아가며 부활의 소망이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또는 고난과 고통을 함께 짊어지며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에게 기쁨이 되는 사건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도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영혼의 구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 우리의 삶입니다. 이 삶이 바로 영혼의 구원입니다. 올바르지 않았던 삶에서 돌이켜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된 삶. 이것이 영혼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우리가 겪는 고난, 우리가 연대하는 고난을 견디게 하며,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가치를 거슬러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합니다.

이해 되어져야 하는 부활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을 위해 어떤 장치들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기쁨이 즉각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성도로 살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