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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 2025년 6월 15일

신명기 30:15-20, 시편 81:6-12, 갈라디아서 5:16-26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결코 나 혼자 겪지 않는다는 의식, 언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홀로 외롭게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는 의식을 잃지 않는 성도가 되셔서 평안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누가복음 11장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간절하게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장 우선하여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은 곧 절망 가운데 있을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움 가운데 있던 제자들이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걸어 생명을 살리는 삶으로, 창조적인 삶으로 인도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어가신 선교적 삶을 제자들이 따라 살 수 있도록 하는 영이십니다.

그래서 이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실제로 사도행전에 기록된 이상적인 공동체,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등의 삶의 모습을 이루어 냈습니다. 악의 상징인 리워야단과 같은 로마 제국주의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 수 있게도 되었습니다.

이들이 로마 제국주의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도 하나님이 리워야단을 통제하시듯, 이 세상의 권력 역시도 통제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성령을 통해 굳게 믿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하신 역할이 큽니다. 성령은 제자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을 살아내도록 하고 굳센 믿음을 소유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을 통해 완전히 바뀌어버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오늘 우리도 성령을 받은 성도답게 선교적 삶,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로 살 수 있고, 또 살아야 한다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한 주간 성령 받은 성도답게 살다가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생명을 살리는 삶, 창조적인 삶,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삶으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행하다가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이쯤 되면 질문하거나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나는 성령을 받은 사람인가?’,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는 신약 시대 제자 공동체의 삶은 진짜인가?’, ‘성경이 증언하는 성령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대체 그들과 나는 무엇이 달라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가?’ 등의 질문들입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 초대 교회 성도와 지금 우리의 모습에서 다른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기는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간절하게’ 성령의 임재를 바랐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기를 ‘간절하게’ 바랐다는 점입니다. 이들에게는 이런 간절함 외에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 외에 많은 것을 바라며, 취하며, 행하며 살고 있습니다. 삶의 초점을 성령에 맞추어야 할 시간과 여력이 없습니다.

오쇼 라즈니쉬가 도마 복음을 풀이한 <도마복음강의>에서 재미있는 예화를 하나 보았습니다. 오쇼의 관점에서 쓴 예화입니다. ‘몰라 나스루딘이 나를 찾아오기 위해 택시를 잡아타고 말했다. “운전사 양반, 오쇼 아쉬람으로 갑시다.” 그 말을 들은 택시 운전사는 매우 화를 내면서 택시에서 내렸다. 왜냐하면 그 택시는 코레가온 파크 17번지(뭄바이 근처 뿌나 시에 있는 오쇼 아쉬람의 주소)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운전사는 차 문을 벌컥 열고는 나스루딘에게 말했다. “이봐요, 아쉬람에 도착했으니까 나오시오!” 나스루딘이 말했다. “좋아요. 그러나 다음번에는 이렇게 빨리 운전하지 마시오.”’

이 예화를 오쇼는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마음은 취해 있다. 마음은 현재를 볼 수 없다. 그대 앞에 있는 현존재를. 마음은 욕망과 꿈으로 가득 차 있다. 그대는 현존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놓치고, 붓다를 놓치며, 크리슈나를 놓치는 것이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그러한 마음의 현존을 얻었을 때 비로소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초대 교회 성도들과 우리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시선과 목적이 성령이 아닌 다른 곳에 온통 있어서 성령의 존재와 인도를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임한 성령이 우리와도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의 삶은 바뀌지 않는 것 같고, 성령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조차 없음에도 왜 여전히 성령이 우리에게 희망인지 말씀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서는 아주 단순, 명쾌, 간단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요약하면, ‘내가 네 앞에 생명과 사망을 선택하도록 두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선택을 하면 네가 소유한 땅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마음을 돌려 다른 신을 택하는 불순종을 하면 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생명을 택하라.’입니다.

읽지는 않았지만, 15절 위의 본문을 살펴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도 했습니다. “11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이 명령은, 당신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14 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까지 읽으면 사망이 아니라 생명을 택하는 것, 저주가 아니라 복을 택하는 삶이 더 단순, 명쾌, 간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이 단순하고 간단하고 명쾌한 선택을 못 했습니까? 왜 이 쉬운 선택을 못 해서 망하는 길로 가고 말았습니까?

고난의 길을 지나 그들이 정착하고 삶이 나아졌을 때,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율법이나 말씀이 다른 우상과 물질보다 더 우선한 가치가 되지 못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자신들의 욕망을 만족시켜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초점은 이제 하나님의 기준보다 자신들의 기준을 더 우월하게 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초점을 더 이상 하나님에게 맞출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라는 모세의 말을 잊었습니다. 또는 무시했습니다.

말씀의 또 다른 본문인 시편 81편을 보시면, 신명기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의 말씀이 나옵니다.

“6 “내가 네 어깨에서 짐을 벗겨 주고, 네 손에서 무거운 광주리를 내려놓게 하였다. 7 너희가 고난 가운데 부르짖을 때에, 내가 건져 주고, 천둥치는 먹구름 속에서 내가 대답하고, 므리바 물 가에서는 내가 너를 시험하기도 하였다. (셀라) 8 내 백성아, 들어라. 내가 너에게 경고하겠다. 이스라엘아, 나는 네가 내 말을 듣기를 바란다. 9 ‘너희 가운데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아라. 10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의 입을 크게 벌려라. 내가 마음껏 먹여 주겠다’ 하였으나, 11 내 백성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은 내 뜻을 따르지 않았다. 12 그래서 나는 그들의 고집대로 버려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가게 하였다.”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고, 무거운 광주리를 내려놓게 하시는 하나님. 고난 가운데 건져 주시는 하나님. 입을 크게 벌려 마음껏 먹여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기계적으로 자신을 따르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선택하도록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자유 의지로 하나님을 더 이상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길이 더 좋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들의 삶에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저자는 망하는 길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고집대로 버려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가게 하였다.”

시편의 저자는 다음 구절인 81:13에서 “나의 백성 이스라엘이 내 말을 듣기만 했어도, 내가 가라는 길로 가기만 했어도,”라는 하나님의 괴롭고도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구약의 시대에서는 스스로 깨달아 선택하지 않으면, 예언자의 말을 들어 다시 선택하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다 망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길 뿐이었습니다.

이런 선택, 하나님을 택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택하는 성도와 관련하여 바울은 갈라디아서 5:13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육체의 욕망이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향하는데, 방해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생명을 택하지 못하게 한 구약에서 말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집, 그들의 원함이 바울에게서는 육체의 욕망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육체의 욕망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육체가 하나님께로 향하는데, 방해 요소가 됩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육체 자체가 악이 될 수 있기에 영국의 성서 신학자이자 주석가인 윌리엄 바클레이(W.Barclay)는 바울이 말한 육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육체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과 대조되게 인간 자신이 만든 것이다. 그 육체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인간과 대조되게 인간 자신이 되도록 허용한 인간이다.” 육체 자체가 악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악이 되도록 허용한 육체가 악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도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역시나 육체입니다. 이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일들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에 분명한 방해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권면합니다. “16a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성령이 어떤 역할을 하시기에 이렇게 말했습니까? “16b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17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 구절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17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저는 이 구절의 해석을 육체의 욕망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선택할 것이냐는 또 다른 ‘선택의 문제’로 보지 않고, 성령이 반드시 이긴다는 말씀으로 봅니다.

시편에서는 “그래서 나는 그들의 고집대로 버려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가게 하였다.”의 말씀처럼 아무도 망하는 길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초대 교회 공동체 그리고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오늘 우리와의 차이점입니다. 성령이 원하시는 바를 결국 우리는 하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 전하는 바울의 권면을 통해 ‘성령은 인도하시는 영’임을 다시 확인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24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25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나 혼자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도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도 우리의 삶도 어떤 도움도 없이 나의 선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어떤 도움 없이 우리 스스로만의 선택으로 무언가를 했다면,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인도를 우리가 지금 ‘따르고 있느냐 있지 않느냐.’라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결국 이것도 나의 선택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의 삶과 말씀을 따르게 하십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15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16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대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당신들이 잘 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또 당신들이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17 그러나 당신들이 마음을 돌려서 순종하지 않고, 빗나가서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하고 섬기면, 18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당신들이 요단 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그 땅에서도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 20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이 살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그 땅에서 당신들이 잘 살 것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혼자 선택하지 않아도 됩니다. 성령과 함께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나의 모습에서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보게 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결국 나와 우리의 삶을 이끄실 성령님을 믿으며 다시 일어서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