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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중 목사]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 2025년 6월 29일

창세기 12장 1-4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전교인 수련회 관계로 성도님들이 피곤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한 주간 은혜 가운데 쉼과 회복이 있으셨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입니다. 여기서 ‘서 있다.’라는 말은 단지 우리가 머무는 공간적 위치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며, 어떤 결정과 판단을 내리는 자리인지 즉, 우리의 사회적 위치까지 포함한 질문입니다. 같은 장소에 서 있어도,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보는 풍경과 느끼는 마음은 달라집니다.

성도는 어디에서 살고, 또 어떤 곳을 다닐지에 관한 공간적 위치와 어떤 사회적 위치에 서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고 선택하고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성도의 고민과 선택과 노력은 신앙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공간적 위치와 사회적 위치가 성도의 삶을 성도답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쿵, 쿵’하는 큰 소리가 바깥 멀리에서 집 안으로 들려왔습니다. 성도님들은 ‘쿵, 쿵’하는 소리가 들리면 보통 어디에서 나는 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공사 현장이라고 생각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저희 둘째는 ‘쿵, 쿵’하는 소리를 듣더니 ‘엄마, 여기도 포 쏴?’라고 물어왔습니다. 고성에서 일상적으로 포 사격 소리를 듣다 보니, 서울에 와서도 ‘쿵, 쿵’하는 소리가 포 소리로 들렸던 것입니다.

만약 고성에서 살지 않았다면, 둘째도 당연히 공사 현장에서 들려오는 소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어디에서 사는지에 따라 보는 풍경도 다르고, 경험도 다르고, 갖게 되는 생각도 다릅니다.

대형마트에서 벌어진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송곳’에 이런 명대사가 나옵니다.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 마.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최초의 민주노총 출신의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는 “제 출신이 어디인지 항상 기억하겠지만, 저는 지금 모든 일하는 시민을 대표해서 노동 행정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서 있는 자리가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면 세상을 보는 눈이 변하거나 혹은 변해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이처럼 공간적 자리이든, 사회적 위치의 자리이든 ‘서 있는 자리’가 달라지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느낌이 달라집니다.

고성에서 살아본 둘째에게는 ‘쿵, 쿵’ 소리가 포 소리로 들립니다. 드라마 <송곳>의 대사처럼,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김영훈 장관의 말처럼, 우리가 선 자리에 따라 책임과 시선이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사람들은 어디에 서 있기를 좋아합니까? 어디에 서 있기를 바라며 인생의 많은 시간을 쓰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더 안락하고 편안한 자리, ‘갑’이라는 사람들 위에 서는 공간적 사회적 위치에 서려고만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세상의 풍조 속에서 성도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합니까? 공간과 사회적 위치에서 어디에 서기를 노력해야 하겠습니까? 사는 곳을 어딘가로 옮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에 시선을 두기 위해 애써야 하는지를 묻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에 강원도 고성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여전히 대물림 되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실향민 무덤, 왕곡마을, 대진 등대, 통일전망대 등을 찾아가서 보고 듣고 느꼈습니다. 아마 남과 북의 통일과 평화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시간이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낯선 장소로 떠나서, 보고 느끼고 경험하면 우리의 생각은 달라집니다. 우리의 지경이 넓어집니다. 불편함을 무릅쓰고 떠났을 때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느낌과 경험으로 인해 평상시에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결단과 실천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단과 실천 속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크신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에게 이런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구체적인 복의 청사진, 민족의 청사진을 제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두리뭉실한 하나님의 계획을 아브람에게 전달하실 뿐이었습니다. 큰 민족을 어떻게 만들어 가실지, 이름을 어떻게 떨치게 될지, 복의 근원이 어떤 방식인지 알 방도가 아브람에게는 없었습니다.

모든 게 불투명하고, 불확실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불투명하고 불확실하지만, 아브람이 스스로 투명하게 여기고, 확실하다고 여기는 것은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땅과 재산입니다. 이것은 불투명하거나 불확실하지 않습니다. 계산이 서는 것들이고 그래서 아브람을 안심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도 다르지는 않습니다. 이런 소유에서 안심을 느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뭐라 말씀하고 계십니까?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비전 제시에 더해서 그나마 안전하게 여기고 익숙하게 여기던 터전마저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아브람에게는 이제 삶에서 안정된 것은,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온통 불안정하기만 합니다.

누가 이런 삶을 원하겠습니까? 대부분은 아닙니다. 익숙함을 좋아하고, 불확실함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믿음이라는 모험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은 더 안락하고 편안한 자리, ‘갑’이라는 사람들 위에 서는 공간적 사회적 위치에 서려고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더라도, 한 번도 누리거나 가져본 적이 없는 불확실한 복을 위해 사서 고생을 누가 하겠습니까? 더욱이나 요즘과 같은 시대라면 더하지 않겠습니까?

아브람에게도 안전장치는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이 안전장치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차라리 “네가 가는 그 길에서 그 어떤 이도 너를 방해하거나 해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다면 더 좋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안전장치로서 하신 말씀은, ‘응, 네가 내 말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그 길에 어려움은 겪게 될 거야.’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안전하고, 계산이 서는 확실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길을 떠나는데, 그 길에서조차 원치 않는 일을 겪어야 하고 견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그렇기에 누가 이런 불확실하고 손해 보는 삶을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 불확실한 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떠났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나이 일흔다섯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 가장 혈기 왕성한 나이가 아닙니다. 자신의 체력과 능력을 믿고 무언가를 할 만한 나이는 이미 지나간 뒤입니다.

그의 나이 일흔다섯에, 안정된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온통 불확실한 삶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이런 불확실함을 견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현대인 그리고 성도 역시 자신의 삶에 이런 불확실함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제거하기 위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모든 불확실함을 제거하고, 안정되고, 모든 일이 계산이 서는 삶을 살 때 사람들은 ‘복 받았다.’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삶이 과연 복 받은 삶입니까? 안정된 삶, 많은 것을 누리는 삶, 소유가 많은 삶, 세상의 인정을 받거나, 부러워하는 직장을 다니는 삶이 복 받은 삶입니까? “아니요!”

그런 삶은 하나님과 전혀 관련 없는 삶입니다. 복 받은 삶은 무엇입니까? 아브람과 같이 자신을 불확실성 속으로 던져 그 불확실성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바로 복을 누리는 삶입니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성도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면서 성도가 되어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뒤 겪게 된 40년의 기간이 바로 이런 시간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는 법을 몸으로 체화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모습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가 완전한 신이어서, 나면서부터 완벽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가 우리가 아는 예수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마태복음 4:12-16의 말씀에 나오는 예수의 행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 13 그리고 그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14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15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16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광야,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되는 삶을 위해 떠나셨기에 예수가 예수 될 수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 역시도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삶의 상황으로 자신을 내던졌기 때문에 그 속에서 예수 자신의 정체성이 발휘되고 단단해질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8:19-20 “19 율법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2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그리고 예수님은 늘 머리 둘 곳이 없는 삶을 사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였기에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겠으나, 머리 둘 곳 없는 나그네와 같은 삶을 통해 예수가 예수 될 수 있었고, 예수로부터 흐르는 은혜와 사랑이 예수 자신과 타인들을 통해 경험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제자를 자처하려는 우리의 삶이 참으로 부끄러워지지 않습니까? 삶에서 어느 것 하나 손해 보려 하지 않고, 더 소유하고, 더 편해지고, 더 사람들의 영광을 얻기 위해 애쓰는 삶이 참으로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운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가식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입니까?

아브람처럼, 예수님처럼 안락하고, 안전한 곳을 떠나야 경험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더욱 그렇습니다.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다른 소리를 듣고, 다른 풍경을 봅니다. 우리가 떠났기 때문에,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다른 풍경을 보고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성도님들 개척자들이라고 아십니까? 분쟁 지역에서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지어 언어와 컴퓨터 등을 가르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송강호 박사님에 관해서는 들어보신 성도님들이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분이 ‘삼난三難의 세례’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가난의 세례, 비난의 세례, 고난의 세례를 송강호 박사는 삼난의 세례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유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삼난三難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굳이 이 세 가지의 어려움을 세례라 칭하는 이유는 세례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통과 의례이듯이 이 삼난의 세례가 이들이 하나님의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단련시키는 통과 의례가 되기 때문이다.’로 시작된 이 글은

이 삼난에 관해 설명하다가 ‘나는 이 삼난을 치를 각오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누구나 하나님의 소명을 실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 어려움을 이겨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인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가 이겨 나가야 할 가난과 비난과 고난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즐거움과 보람에 견줄 수 없는 먼지 같이 가벼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나의 동료들, 친구들이 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끝을 맺습니다.

예수님도 불편한 삶,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여정은 영광으로 가득 찬 길이 아니라, 가난과 비난과 고난으로 점철된 길이었습니다.

아브람도, 예수도, 송강호 박사도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에 순종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었고,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경험하며 살았고 또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성도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서 계신 그 자리에서 무엇을 보고 있으신가요? 어떤 풍경을 보고 어떤 느낌으로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으신가요?

일흔다섯에 낯선 땅으로 떠난 아브람처럼 말씀에 따른 모험의 여정을 떠나지 않을 때, 우리 자신이 더 이상 삼난三難의 세례를 거부하며 낯선 광야로 나가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록 숨은 쉬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자이며 죽은 공동체입니다.

성도라면 교회 공동체라면 누가 이런 죽은 삶을 원하겠습니까?

그러니 성도 여러분,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아브람처럼 불확실한 여정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인가?

나는 예수님처럼 머리 둘 곳 없는 삶 속에서도 빛을 전하는 사람인가?

나는 삼난三難의 세례를 통과한 자유인인가?, 아니면 안전한 틀에 머물며 신앙을 소비만 하는 사람인가?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불러 세우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