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중 목사]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서는 날 – 2025년 9월 14일
시편 66편 1-12절, 마가복음서 13장 14-27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어느 날은 너무 행복하다가도, 한순간에 ‘그 누구보다 불행한 나’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방금까지 아름답게 여겼던 주변이 갑자기 아무 의미 없는 것들로 바뀌기도 합니다.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나의 밖에서 일어나는 상황,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삶의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중에 전사례 권사님 댁으로 심방을 갔습니다. 권사님이 전도하기 위해 기도하고 또 애쓰고 계신 인상이 너무 좋으시고, 인품도 좋으신 아파트 관리 소장님과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대화 중에 관리 소장님이, ‘교회 다니는 사람도 똑같이 아프고, 좋지 않은 일을 경험하니, 그런 모습을 보면 신앙을 갖기가 어렵다.’라는 의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해서 좋은 일들만 경험하며 사느냐? 그러면 너무 좋겠지만,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또 경험했듯이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좋은 점은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같은 일을 겪지만, 겪는 그 일을 다르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두려움과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함께 그 일들을 다르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너무나 큽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성도가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성공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건강하고, 누구보다 부유하고, 누구보다 큰 힘을 갖는 것이 성도가 보여주어야 할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모습, 창조 세계 회복을 위해 멈추지 않는 모습이 성도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몸부림이 믿지 않는 이들과 믿음 가운데 쓰러진 이들에게는 오히려 더 큰 위로와 용기가 될 것입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평안을 선택하고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그 때에는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14절)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은 오늘 본문의 앞 구절인 1-2절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이스라엘이 자랑스럽게 또 소중하게 여기던 성전이 로마 군대에 의해 무너지고 그 위에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의 우상, 신이나 다름없는 로마 황제의 동상이 세워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서지 못할 곳에 서는 날’은 그렇기에 눈에 보이는 핍박과 폭력의 날이고, 공동체가 무너지고 목숨을 위협받는 극심한 현실의 날들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백성의 정체성이 사라지게 되는 날들입니다.
이날의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국민을 일본 천황의 충실한 백성으로 만들려는 ‘황국신민화 정책’과도 같습니다. 당시 어떤 정책을 폈습니까? 조선인들에게 일본식 성(氏)을 만들고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도록 강제한 창씨개명(創氏改名) 정책이 있습니다. 이는 가족의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가장 직접적인 시도였습니다.
단순한 종교 행위로서가 아니라 일본 천황을 신격화하고 일본의 국가주의에 복종하게 하려는 신사참배 강요와 학교와 공공장소에서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만 사용하게 하는 한국어 말살 정책도 펼쳤습니다.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뿌리 뽑고 일본의 식민지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심으려 한 시도들입니다. 이런 정체성이 심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린 채 영원한 노예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서지 못할 곳에 서는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 문화, 법, 가치관 등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이 로마 식민지 백성으로 전환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말살되는 날입니다.
시편 66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온 땅아, 하나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하여라. 하나님께 말씀드려라. “주님께서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주님의 크신 능력을 보고, 원수들도 주님께 복종합니다. 온 땅이 주님께 경배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하여라. (셀라)”
주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이기에 ‘얼마나 놀라운지요?’라고 감탄하고 있습니까?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신 구원의 사건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바다를 육지로 바꾸셨으므로, 사람들은 걸어서 바다를 건넜다. 거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기뻐하였다.”(6절)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놀라운 구원 사건은 물리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이집트라는 제국 아래 억압받던 ‘노예’라는 정체성으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해방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의 여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 ‘황폐하게 하는 흉측한 우상’인 이집트의 문화와 가치관, 그리고 노예근성을 완전히 씻어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고난의 시기였던 광야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이식되는 시기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셔서, 은을 달구어 정련하듯 우리를 연단하셨습니다.”(시편 66:10)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집트의 지배를 받는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심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한 광야에서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경험했고. 어떤 나라도 갖지 못한 율법을 통해 새로운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배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연단의 과정,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갖춘 뒤 비로소 ‘풍족한 곳’(시편 66:12)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편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상의 ‘황폐하게 하는 흉측한 우상’이 우리를 황폐하게 만들려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으로 연단 하셔서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도록 이끄시는 줄 믿습니다.
이집트 또는 로마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신과 영혼을 황폐하게 하기 위한 시도는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어버리도록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우상’은 성도의 안과밖에 끊임없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삶에서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우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도망가기 힘든 혹독한 현실을 의미합니다. 도망갈 수 없는, 마치 겨울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입니다.
우상은 타인에 의해서도 세워지지만, 때로는 우리 스스로가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우상’을 세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수년 동안 열심히 준비했던 시험에 계속해서 낙방할 때, 혹은 가족을 위해 밤낮으로 일했지만 끝내 사업이 실패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실패자라고 낙인찍기도 합니다.
삶의 목표와 가치를 성공과 돈에 두게 될 때, 우리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밤낮으로 달려가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의 마음은 황폐해집니다. 모든 의욕을 잃고, 나 자신을 비난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기도 합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믿음의 기반을 흔드는 물질 만능주의, 성공 지상주의, 그리고 관계의 단절과 같은 것들이 바로 오늘날 타인이 세우기도 하고 우리가 스스로 세우기도 한 삶과 마음을 황폐하게 하는 흉측한 우상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환난의 시기를 보내게 될 제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절망의 말씀만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이 지난 뒤에, ‘그 날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에 싸여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 때에 그는 천사들을 보내어,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선택된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24-27절)
예수님이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까닭은 단순히 종말의 사건을 예고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약속은 환난 속에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붙드는 힘입니다.
제국이 우리를 노예라 부르고, 세상이 우리를 실패자라 부를지라도, 인자가 다시 오실 때 우리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드러내실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돈과 성공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별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소망은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길 거야’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그 소망은 오늘의 정체성을 붙들어 주는 힘입니다.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그 우상과 직접적으로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 환난의 때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인내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킬 때, 이 모든 황폐하게 하는 일들을 끝내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어떤 삶으로 이 말씀에 응답해야 하겠습니까? 먼저는 성도라는 정체성과 삶을 흔드는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무엇인지를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우상에 압도되지 않고, 이 우상을 통해 성도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작은 실천이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와 함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혼자서는 우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배와 말씀, 교제 속에서 서로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시켜 주고, 믿음을 붙잡아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도의 믿음은 세상이 추구하는 성공, 건강, 부가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하며, 때로는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더라도 끝까지 사랑과 인내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황폐하게 하는 흉측한 우상이 서는 날’에도 성도는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낼 때, 하나님께서 결국 그 모든 것을 끝내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우리 눈앞에 서는 날에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의 정체성은 세상이 주는 성공이나 실패가 아니라, 인자가 다시 오실 때 분명히 드러날 하나님의 자녀 됨에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며, 오늘 우리의 삶에서 믿음의 작은 실천을 이어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