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Description
[이상중 목사] 여러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습니다. – 2025년 9월 7일
창세기 1장 1-5절, 데살로니가전서 3장 1-8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예수님이 주신, 우리 안에 있는 성도가 누려야 할 평안은 외적 환경이나 소유를 통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아픔이나 질병이 있더라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여전히 나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평안의 근거가 됩니다.
성도가 평안을 누릴 때 타인에게, ‘아니, 너는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태평하니?’라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생각해도 평안을 누리는 자신이 놀랍습니다. 그렇기에 성도의 평안은 믿음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대단한 삶의 변화가 일어날 때 믿음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누리는 평안이 진정한 믿음의 신비입니다. 성도가 누려야 할 믿음의 신비인 이 평안을 매 순간 선택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강미희 목사님은 ‘진실하게 걷는 삶’이라는 고별 설교의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악인을 심판하시고, 빛과 선이 이기게 하실 것이기에 성도는 낙심하지 말고, 작은 자리에서 빛을 비추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는 삶이 아니라 더 진실하게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더 많이 소유하지 않고 사는 삶이란 쉽지 않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실패자’라고 낙인찍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멈출 줄 모르는,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좋다!”고 말씀하신 피조세계가 병들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피조세계를 보존하고 가꾸어야 했지만,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여 마음대로 파괴하고 훼손하고 말았습니다.
최근 지난 8월 30일, 강릉시에 가뭄으로 인한 자연재해로는 최초로 ‘재난 사태’가 선포되었습니다. 강릉의 주요 식수원인 오봉저수지의 저수율이 15%대까지 떨어지는 등 물 부족이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강릉만 물과 식수 부족을 경험할까요?
기후 위기로 인한 재난은 나와 거리가 멀게 느껴졌었지만, 어느새 내가 겪어야 하는 재난이 되고 있습니다. 기온은 계속해서 상승하고, 땅은 점점 말라가고, 집중 폭우가 쏟아지고, 산불이 일어날 확률과 더 강하고 크게 번질 확률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재난은 인간이 더 소유하고자 하는 끝없는 욕망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이처럼 파괴된 피조세계를 생각하며 오늘부터 시작되는 창조절 절기 동안에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또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선택을 해보는 시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교회력의 시작이 되는 창조절 첫째 주일입니다. 창조절은 삼위일체 교회력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생태적 회복과 정의를 실천하자는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출발한 절기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예배 시간에 고백하는 사도신경이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는 창조 고백으로 시작하듯, 삼위일체 교회력의 시작도 예수의 탄생이 아니라, 천지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과거의 단 한 번으로 끝난 창조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동참하며, 교회가 기후위기 시대에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하라는 부르심이 이 창조절 절기에 담겨 있습니다.
성경의 맨 처음인 창세기 1장의 본문을 읽으면 성도는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아름답고 좋은 피조세계와 대조될 수밖에 없는 파괴된 오늘날의 피조세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창세기 1:1-5의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 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이렇게 시작되는 창조의 이야기는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아름다운 피조세계를 상상하게 됩니다. 훼손되지 않은, 아름다운 그 자체의 피조세계를 말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말씀 읽기를 그치고 현실로 돌아오면, 파괴되고 훼손된 피조세계가 더 극명하게 부각이 됩니다. 이런 파괴된 피조세계를 마주하며 성도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이 ‘생명사랑’입니다. 생명을 사랑해야 하는 우리가 점점 더 어그러지는 피조세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살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말과 구호로만 그치지 않기 위해 이제 정말, 사실 ‘이제 정말’도 몇 번째 쓰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정말 피조 세계를 위한 작은 불편, 그 작은 고통을 이제는 감당해야 할 때입니다. 말과 구호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신앙을 선택할 때입니다.
저는 성도님들에게 어떤 실천을 해서 대단한 성과를 내자는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해주기를 바라며 넋 놓고 있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자는, 실패하더라도 다시 툴툴 털고 일어나서 다시 뭐라도 도전해 보자는 의미의 제안입니다.
피조세계를 위해 무언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교회라는 정체성으로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바울과 디모데의 위로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피조세계 회복을 위해 여전히 주저주저하는 교회 그리고 실패 속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교회와 공동체에 위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설립한 교회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 안식일에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했고, 경건한 그리스 사람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사도행전 17:2-4)
하지만 이런 바울을 시기한 유대인들은 거리의 불량배를 모아 패거리를 지어서 야손의 집을 습격해 바울과 일행을 군중 앞에 끌어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을 찾지 못했고, 대신 야손과 성도 몇 명을 데살로니가의 시청 관원들에게 끌고 가서, “세상을 소란스럽게 한 그 사람들”이라며, 로마 황제의 명을 거역하여 예수라는 또 다른 임금을 사람들에게 전파했다고 고발했습니다.(사도행전 17:5-7)
이 과정에서 야손과 몇 명의 성도는 보석금을 내고 풀려날 수 있었지만, 바울과 실라는 결국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손의 집을 습격했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무리를 선동해 소동을 벌였습니다.(사도행전 17:13-15)
3주라는 짧은 기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들었지만, 받은 말씀을 잘 간직해서 삶에 적용했습니다.
사실 데살로니가라는 도시는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라는 데살로니가전서 1:9의 말씀처럼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는 주전 1세기 말부터 카이사르를 숭배하는 신전이 세워졌으며, 이 신전을 섬기는 사제직이 확립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관리들이 로마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황제숭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데살로니가 귀족들은 데살로니가인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카비루스라는 우상의 제의를 이용하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섬기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사회적 단절과 핍박’을 떠안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이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당할 고난을 염려하였고, 이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서 본인이 직접 가지는 못하고 디모데를 보내 성도들의 믿음을 격려하려 했습니다.
이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는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테네에 남아 있기로 하고, 2 우리의 형제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여러분에게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그가 여러분을 굳건하게 하고, 여러분의 믿음을 격려하여, 3 아무도 이러한 온갖 환난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우리는 이런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는 이런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환난은 당시 성도들에게는 당연히 겪어야 하는 삶의 일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런 환난을 통해 성도들의 믿음은 더욱 성숙해졌고 단단해졌으며 말씀을 삶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5:3-4에서 말한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고백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모습, 자신이 경험한 삶이 있었기에 나온 고백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말씀을 살아내기 위해 ‘사회적 단절과 핍박’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마다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까? 어떤 불편함과 희생을 하면서 믿음의 삶을 지키기 위해 또는 믿음의 성숙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우리의 삶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있습니까?
바울은 염려함으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디모데를 보냈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디모데를 통해 들은 소식은 놀라웠습니다. “6 그런데 지금 디모데가 여러분에게서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아주 짧은 3주라는 시기 동안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만으로도 이들에게는 충분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어떠했는지 드러나 있습니다.
“6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8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으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열악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살았을 뿐이지만 그 믿음의 삶이 많은 이들에게 본이 되었고, 마찬가지로 고난 가운데 있는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대단한 무언가를 이룬 것이 아닙니다. 단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았을 뿐입니다.
“7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보고, 우리의 모든 곤경과 환난 가운데서도, 여러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습니다. 8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게 서 있으면, 이제 우리가 살아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박노해 시인의 ‘촛불을 켜라.’는 제목의 시를 성도님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어둠이 오면 / 촛불을 켜라.
세상이 어두우면 / 촛불을 켜라.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 나 자신이 어둠이 되지 않기 위해 / 촛불을 켜라.
눈부신 거짓에 진실이 죽어갈 때 / 나 자신이 꺼져버리지 않기 위해 / 촛불을 켜라.
나 하나를 지켜 / 세상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켜라.
창조 절기에 성도가 서는 삶의 자리에서, 또 공동체의 자리에서 작은 몸부림을 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무언가를 이루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그런 우리의 노력이, 애씀이 분명히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여전히 자신들도 살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줄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적은 노력은 박노해 시인의 글처럼 우리 자신도 살아 있도록 하며,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잊지 않도록 해줄 것입니다. 우리 안의 생명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촛불처럼 믿음을 지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다시 ‘보시기에 좋다’는 세상으로 회복되리라 믿습니다. 창조 절기를 온전히 살아낼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